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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제님수륙병진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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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11.05 조회4,83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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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대순종교문화연구소

  

  1906[丙午]년 2월 그믐, 여러 종도들이 동곡으로 모였다. 다음 날인 3월 초하루, 상제님께서는 공사를 보시기 위하여 서울로 떠나신다 하시며 김형렬(金亨烈)에게 “전함(戰艦)은 순창(淳昌)01으로 회항(回航)하리니 형렬은 지방을 잘 지키라.”고 이르셨다.

  다시 상제님께서 “각기 자기의 소원을 종이에 기록하라.”고 모여 있는 종도들에게 명하시니, 종도들은 소원을 적어 상제님께 올렸다. 상제님께서는 그 종이에 안경을 싸서 잘 간수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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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제님께서는 정남기(鄭南基)·김갑칠(金甲七)·정성백(鄭成伯)·김병선(金炳善)·김광찬(金光贊) 등 5명을 데리고 군항(群港: 군산항)에서 배를 타고 인천항을 거쳐 서울로 가기로 하시고, 신원일(辛元一) 등 5명은 대전(大田)으로 가서 기차를 타고 서울로 가라고 이르시고는 이것을 ‘수륙병진(水陸幷進)’이라고 말씀하셨다. 수륙병진이란 바다(또는 강)와 육지에서 동시에 군대가 나아가는 것을 묘사하는 말이다.02 그리고 상제님께서는 원일에게 “너는 입경(入京)하는 날로 먼저 종이에 ‘天子浮海上(천자는 바다 위에 떠 있다)’이라고 정서하여 숭례문(남대문)에 붙이라.”고 명하셨고, 원일 일행은 곧 대전으로 떠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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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뒤이어 상제님께서는 병선에게 “영세화장건곤위(永世花長乾坤位) 대방일월간태궁(大方日月艮兌宮)을 외우라.”고 명하시고 종도들을 데리고 군항으로 발걸음을 옮기셨다. 군항에 도착하신 뒤 배를 타시기 전에 종도들에게 “바람을 걷고 감이 옳으냐? 놓고 감이 옳으냐?”고 물으시니, 광찬이 “놓고 가시는 것이 옳은가 생각하나이다.”고 아뢰었다. 상제님께서는 종도들에게 매실을 연기에 검게 그을려 만든 약재인 오매(烏梅)를 5개씩 준비하게 하시고 곧 배에 오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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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윽고 배가 군항을 떠나 인천항으로 출발했는데, 바람이 몹시 불어 배가 심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종도들이 멀미가 나서 괴로워하자 상제님께서는 각자 준비한 오매를 입에 물도록 시키셨다. 곧이어 상제님께서는 갑칠에게 갑판 위에 올라가 종이에 싼 안경을 북쪽을 향하여 바다에 던지게 하셨다. 갑칠은 갑판 위에 서서 안경을 던지려 하였으나 어느 쪽이 북쪽인지를 몰라 망설이고만 있었다. 상제님께서는 갑칠을 불러들여 “왜 얼른 던지지 않느냐.”고 꾸짖으시자 갑칠이 사정을 아뢰었다. 다시 상제님께서 “번개 치는 곳으로 던지라.”고 이르셨고, 갑칠이 다시 갑판 위에 올라가니 과연 한 쪽에서 번개가 치기에 그곳을 향하여 힘껏 안경을 내던졌다. 

  다음 날 배는 인천항에 닿았고, 상제님께서는 종도들과 함께 기차로 바꿔 타고 서울에 도착하셨다. 광찬은 상제님을 창경궁 옆 황교(黃橋)03 근처에 사는 그의 사촌동생 김영선(金永善)의 집으로 모셨다. 육로로 서울로 온 원일 일행은 상제님의 명하심 대로 남대문에 글을 써 붙이고 먼저 와 있었다. 

  수륙병진 공사는 상제님의 공사 중 그 의미가 명확하게 밝혀진 몇 안 되는 공사 중의 하나다. 도전님의 훈시에 따르면 이 공사는 상제님께서 부산 태극도에서 대순진리회로 종단이 변화되는 과정을 도수로 짜 놓으신 것이라고 한다.04 

  상제님께서는 서울에 10여 일 동안 머무시면서 여러 공사를 보셨다. 이때 영선의 이웃에 사는 오의관(吳議官)이라는 사람이 3년 전부터 해소[咳嗽]05로 잠을 이루지 못해 매우 고통 받고 있었는데, 상제님의 신성하심을 전해 듣고는 영선에게 상제님을 뵙게 해 달라고 애원하였다. 영선이 이 사정을 상제님께 아뢰자, 상제님께서는 의관을 불러 글을 하나 써 주시며 “이것을 그대가 자는 방에 간수하여 두라.” 이르셨다. 의관은 매우 감사하게 여기면서 그대로 따랐더니 과연 그날 밤부터 잠을 편히 이룰 수 있었고, 얼마 후에는 해소도 완전히 나았다. 매우 기뻐한 의관은 여러 해 동안 청맹(靑盲)06으로 앞을 못 보는 자신의 아내의 병도 고쳐주시기를 애원하여 왔다. 상제님께서는 의관의 집에 가셔서 의관의 아내를 창문 앞에서 상제님과 마주하여 서 있게 하시고 양산대를 땅에 대고 그어 돌리셨다. 그렇게만 하시고 그냥 돌아오셨는데, 의관의 아내는 그로부터 눈이 밝아져 앞을 잘 보게 되었다. 크게 감읍한 의관 부부는 지성으로 상제님을 공양하였다. 

  또 갑칠은 서울에 오기 전부터 설사가 있었는데 더 이상 참지 못할 지경이 되자 상제님께 하소연하였다. 이를 들으신 상제님께서는 “이로부터 설사가 멎고 구미가 돋으리라.” 하시고는 크게 웃기만 하실 뿐이었다. 갑칠의 병도 곧 나았는데, 이는 갑칠이 상제님의 신성하심에 대해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순회보> 11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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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순창은 부모산(父母山) 중 부(父)에 해당하는 회문산(回文山)이 있는 곳이다. 회문산에는 24혈(穴)이 있고,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오선위기형(五仙圍碁形)이다. 오선위기는 우리나라의 국운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지금은 강대국에 의해 시련을 겪지만 앞으로 때가 되면 우리나라가 상등국(上等國)으로 올라서게 된다는 뜻을 담고 있다. 

02 중국 후한(25~220) 말 소규모 병력인 손권(孫權)과 유비(劉備)의 연합군이 양쯔강[揚子江] 중류 적벽에서 조조(曹操)의 대군을 물리친 전투가 적벽대전(赤壁大戰)이다. 『자치통감』에서 이 전투를 서술한 부분에 ‘수륙병진’이라는 말이 보인다. 操引軍從華容道步走, 遇泥 , 道不通, 天又大風, 悉使羸兵負草塡之, 騎乃得過. 羸兵爲人馬所蹈藉, 陷泥中, 死者甚衆劉備周瑜 水陸幷進, 追操至南郡. 時操. 軍兼以飢疫, 死者太半. (조조는 병사들을 이끌고 화용도를 따라 걸어서 도망갔다. 흙탕을 만나 길이 통하지 않았고 날씨 또한 바람이 거칠게 불었다. 춥고 지쳐버린 병사들에게 풀을 져다가 진흙탕을 메우게 하고서야 겨우 기병이 지날 수 있었다. 지친 군사들은 사람과 말에게 밟히고 깔렸으며 진흙 속에 빠지니 죽은 자가 아주 많았다. 유비와 주유가 강과 육로로 같이 진군하여 조조를 뒤쫓아 남군에 이르렀다. 이때 조조의 군대는 굶주림과 전염병까지 겹쳐서 죽은 사람이 태반이었다.)

03 서울 종로구 원남동 76번지 현 이화예식장 부근에 있던 다리로서 황참의(黃參議)라는 사람이 사재를 들여 다리를 놓았다 하여 황참의다리, 황참의교(黃參議橋) 또는 황참교(黃參橋), 줄여서 황교(黃橋)라 했다.

04 “서울도장의 창건은 상제님의 수륙병진도수에 의한 것이다.”(1988년 10월 27일 훈시), “부산(釜山)은 팔금산(八金山)이다. 상제님께서 군산(群山)에서 수륙병진도수 보신 것이 부산 공사를 의미한다. … 내가 부산을 떠나게 되었던 것이고, 내가 떠나니 신명들도 아미동 산 고개를 넘어 다 떠나가더라.”(1989년 4월 4일 훈시), “『전경』에 ‘천자부해상(天子浮海上)’은 수륙병진(水陸幷進) 도수를 보신 것이다. 그것은 내가 부산에서 나와 서울로 가는 것을 의미한다.”(1990년 12월 28일 훈시)

05 기침. 세종 27년(1445)에 편찬된 한방의학 백과사전인 『의방유취(醫方類聚)』에 따르면, 가래는 나오지 않고 기침소리만 나는 것을 해(咳), 기침소리는 나지 않으면서 가래만 나오는 것을 소(嗽), 기침소리와 가래가 다 있는 것을 해소라고 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해와 소를 구별하지 않고 모두 해소로 쓴다.

06 청맹과니의 준말로 겉으로 보기에는 눈이 멀쩡하나 앞을 보지 못하는 병을 말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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