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제님관운장 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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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11.07 조회4,871회 댓글0건본문
글 대순종교문화연구소
1907[丁未]년 4월 초순, 상제님께서는 신원일(辛元一)을 데리고 태인에 이르셨다. 그때 머무신 곳은 태인 관왕묘(關王廟)에서 제를 올리는 일을 맡고 있던 신경원(辛京元, 1863∼1924, 字가 敬彦)의 집이었다.
하루는 상제님께서 경원과 그의 가족들에게 “관운장이 조선에 와서 받은 극진한 공대의 보답으로 공사 때에 반드시 진력함이 가하리로다.” 하시며 양지(洋紙)에 글을 쓰시고 불사르셨다. 천지공사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었던 경원은 매우 해괴한 일이라 생각했다. 다음 날 경원은 동료와 더불어 태인 관왕묘를 살피러 갔는데, 놀랍게도 관운장의 삼각 수염 중 한 갈래가 사라져 온데간데없는 것이었다. 경원은 이 일이 상제님께서 어제 하신 공사와 관련이 있음을 그제야 깨달았다. 감복한 경원은 이로부터 상제님을 따르는 종도가 되었다.
관운장, 즉 관우(關羽, ?~219)는 충의(忠義)의 화신이라 하여 많은 사람들의 귀감이 되어왔던 인물이었다. 중국에서는 송나라 때부터 관우에 대한 신앙이 번성하기 시작하였고,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관우의 생일에는 학교가 휴교하고 각 가정에서는 관우에게 제를 지낼 정도였다고 한다.02 관우에 대한 신앙은 지금도 식지 않았는데, 특히 재신(財神)으로서의 성격이 많이 부각되어 웬만한 식당에는 관운장을 모시고 있을 정도이다.
관우는 우리나라에서도 융숭한 대접을 받아왔다. 관우를 모시는 풍속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임진왜란 때 명나라 유격장(遊擊將) 진인(陳寅)이 진중의 뒤뜰 가옥 건물에 관우를 모시는 사당인 관왕묘를 설치한 것이 시초인데, 그 후 조선 조정에서는 서울 동서남북에 각각 관묘(關廟)를 세웠다. 또 광해군은 매년 경칩일과 상강일에 관우에게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으니, 이로부터 관우는 단순한 민간신앙 차원이 아니라 국가의 수호신으로 나라에서 주도하는 공식적인 공대를 받게 되었다.03 물론 1800년대 이후로 관우에게 복을 비는 기복신앙이 민간에 퍼져나가기는 했지만, 일제의 압력으로 1908년 관우에 대한 국가 제사가 끊어질 때까지 나라에서는 관우에게 무엇인가를 바라는 기복적인 차원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공대(恭待), 즉 존대의 차원으로 접대했던 것이다. 따라서 관우가 우리나라로부터 받은 그간의 은혜에 보답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그 보답이란 우리나라가 잘 되도록 만드는 것이어야 했을 것이다. 당시 상제님께서는 천지공사를 보고 계셨고, 천지공사에 따른 모든 선천의 도수가 마무리되면 이제 우리나라는 중국을 섬기고 외세에 시달려야만 했던 지난날의 슬픈 역사를 마감하고 세계에 으뜸가는 중심국이 될 터였다. 그러한즉, 관우가 상제님의 천지공사를 받들기 위해 신명을 다하는 것은 지당한 일이었다. 아름다운 수염으로 이름 높던 관우의 초상에 수염이 떨어져 나갈 정도였으니, 관우가 얼마나 성심껏 일을 하고 있었는지 충분히 상상이 가고도 남을 만하다.
그 해 5월 5일, 상제님께서는 동곡에 계셨다. 동네 사람들이 상제님을 찾아 뵙고, 단오절이니 동곡 뒷산인 구성산(九城山, 487.6m)에 있는 학선암(學仙庵)04에 가서 소풍하시기를 청하였다. 상제님께서 응낙하시고 김자현(金自賢, 1875∼1927)을 데리고 산을 오르셨다. 그런데 갑자기 하늘에서 먹구름이 몰려오면서 폭우가 쏟아지려고 하였다. 산중이라 비를 피할 길이 없어서 사람들은 모두 뛰었다. 상제님께서는 허둥지둥하던 자현을 부르셔서 “천천히 갈지어다.”고 하시며 그냥 길가에 앉아버리시는 것이 아닌가! 그러시면서 담배를 꺼내 태우시고는 몰려오는 먹구름을 향하여 담배 연기를 내뿜으셨다. 상제님께서는 느긋하게 천천히 걸으셔서 학선암에 오르셨는데, 학선암에 다 도착하시고 나서야 비가 억세게 내리기 시작했다.
<대순회보> 11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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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정읍문화재지』, 정읍문화원, 1999, 550∼551쪽.
02 마노 다카야 지음, 『도교의 신들』, 이만옥 엮음, 들녘, 2001, 95쪽.
03 관우 신앙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상생의 길』 창간호(대순진리회 출판부, 2004)에 실려 있는 김주우의 글, 「조선에서 극진한 대접을 받은 관운장」 참고.
04 현재 전북 김제시 금산면 청도리 산 309번지에 위치한 암자이다. 학선암이 있는 구성산은 굴성산이라고도 불리는데, 아홉 개 봉우리에 성을 쌓아 적의 침입을 막았다거나 혹은 앉은뱅이가 이 산을 아홉 번 올라 소원을 빌고 병이 나았다고 하여 붙은 이름이라 한다. 학선암의 창건과 관련해서는 구전으로 두 가지의 설이 전해진다. 첫째는 통일신라시대 말에 함월(含月) 스님이 창건하였다는 것이고, 둘째는 고려 초인 성종 7년(988년)에 창건되었다는 것이다. 유명한 진묵대사도 한때 이 암자에 머문 적이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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