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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제님정읍에서 차경석이 상제님의 공사를 받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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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11.07 조회4,86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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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대순종교문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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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읍 대흥리. 지금은 전북 정읍시 입암면 접지리에 편입되어 있다. 차경석이 상제님께 가물치를 잡아 올렸던 시내가 이 마을 앞에 흐른다.

  

  1907[丁未]년 6월 초순, 정읍 입암면 대흥리 차경석의 집에 도착하신 상제님께서는 글을 써서 벽에 붙이시고는 “내가 머무는 곳을 천지가 다 알아야 하리라.”고 말씀하시니 갑자기 천둥이 크게 치는 것이었다. 상제님을 좇아 친구 차경석의 집에 왔던 박공우는 크게 놀랐고, 마을 사람들도 구름 한 점 없는 밝은 대낮의 갑작스런 천둥소리를 이상하게 여겼다.

  상제님께서 차경석에게 “갑오년(1894년) 겨울에 너의 집에서 삼인(三人)이 동맹한 일이 있느냐?”고 물으시니, 놀란 그가 “그렇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다시 상제님께서 “그 일을 어느 모해자가 밀고함으로써 너의 부친이 해를 입었느냐?” 하시니, 경석이 “그렇습니다.” 하며 눈물을 흘렸다.
  차경석의 부친인 차치구(車致九, 1851∼1894)는 동학농민운동의 주역 중 한 사람이었다. 동학농민운동의 총대장은 전봉준이었고, 바로 그 밑에 서열 2위에 해당하는 것이 장령(將領)이었는데, 차치구는 손화중, 김개남, 최경선 등과 함께 장령을 맡고 있었다. 특히 동학군이 집강소를 설치하여 고을을 통치하던 시절, 정읍 지역의 집강소를 맡았던 사람이 바로 차치구였다.01 차치구는 정읍 지역을 돌며 농민들을 돌보았는데, 흥덕 현감 윤석진이 농민군 두령 고영숙을 잡아 가두자 즉시 흥덕을 공격해서 고영숙을 구하고 윤석진을 죽이려고 하였다. 그러나 고영숙의 부탁으로 윤석진을 죽이지 않고 풀어주었다. 얼마 뒤 동학농민운동이 실패로 돌아가고 동학군이 관군에 쫓기게 되자, 차치구도 전봉준을 따라 순창 피노리까지 도피하였다가 그와 헤어지고 정읍시 입암면 마석리 뒷산 토굴에 숨었다. 그때 그의 친구 최제칠이 몰래 밥을 가져다주며 도왔는데, 이 사실을 안 흥덕 관아에서 최제칠을 잡아 고문했으나 최제칠은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고 한다. 보다 못한 마을 사람 하나가 차치구가 숨은 곳을 흥덕 관아에 고발하니 결국 잡히게 되었다. 흥덕 현감 윤석진은 차치구를 고문하였으나 도리어 차치구가 그를 꾸짖으니, 노한 윤석진은 그 자리에서 칼로 차치구의 가슴을 찔러 죽였다. 그때가 갑오년(1894년) 12월 29일이었다.02 차치구에게는 아들 네 명이 있었는데, 첫째가 차경석(본명은 輪洪), 둘째가 윤경(輪京), 셋째가 윤칠(輪七), 넷째가 윤덕(輪德)이었다. 당시 15세였던 차경석은 형장에 찾아가 부친의 시신을 거두어 장례를 치루면서 언젠가는 자신의 부친을 해친 자를 찾아내어 반드시 복수하리라 다짐하였는데, 상제님께서는 이 일을 마치 다 알고 계신 듯이 말씀하신 것이다.
  상제님께서 “너의 형제가 음해자에게 복수코자 함은 사람의 정으로는 당연한 일이나, 너의 부친은 이것을 크게 근심하여 나에게 고하니 너희들은 마음을 돌리라. 이제 해원시대를 당하여 악을 선으로 갚아야 하나니 만일 너희들이 이 마음을 버리지 않으면 후천에 또다시 악의 씨를 뿌리게 되니 나를 좇으려거든 잘 생각하여라.”고 차경석에게 이르시니, 그는 세 아우를 데리고 옆방에 가 의논 끝에 원한을 없애기로 정했다. 차경석이 이 결심을 상제님께 아뢰니, 상제님께서는 “그러면 뜰 밑에 짚을 펴고 청수 한 동이를 떠다 놓은 후, 그 청수를 향하여 너의 부친을 대한 듯이 마음을 돌렸음을 고백하라.” 하셨다. 경석은 세 아우와 함께 상제님의 명을 받들어 행하다가 갑자기 설움이 북받쳐 대성통곡하였다. 상제님께서 이것을 보시고, “너의 부친은 너희들이 슬피 우는 것을 괴로워하니 그만 울음을 그치라.”고 타이르셨다.
  그 후 상제님께서는 차경석에게 기운을 붙여주시고자 “너는 강령(降靈)을 받아야 하리라.” 하시며, ‘원황정기(元皇正氣) 내합아신(來合我身)’의 글귀를 읽게 하신 후에 문을 조금 여셨다. 차경석은 그 글을 읽다가 갑자기 방성대곡하였는데, 상제님께서는 15분 정도가 지나서 울음을 그치도록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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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상제님께서는 차경석에게 선대 조상의 기운도 붙여주시고자 “너의 선묘인 구월산(九月山) 금반사치(金盤死雉)의 혈음(穴蔭)을 옮겨와야 되리라.”고 말씀하셨다. 금반(金盤)이란 금 쟁반 형태의 땅을 말하는데 풍수지리에 따르면 부귀영화를 담고 있는 곳이다. 또 사치(死雉)란 죽은 꿩 모양의 땅으로서 만리(萬里)를 부는 긴 바람이 통해야만 빨리 상하지 않고 오래도록 좋은 기운이 발하는 곳이라고 알려져 있다. 상제님께서 박공우에게 북을 치게 하시고, “이 혈음은 반드시 장풍(長風)을 받아야 발하리라.”고 말씀하시니 그때 갑자기 이도삼(李道三)의 아우인 ‘장풍(長豊)’이 방에 들어왔다. 박공우가 치던 북을 잠시 멈추고 “장풍이 오느냐?” 하고 인사를 하니, 이를 보신 상제님께서는 “이제 그만 그치라.”고 말씀하셨다.

  이로부터 상제님께서는 차경석을 데리고 두어  달간 정읍에서 여러 공사를 처결하셨고, 이 무렵에 일진회원이었던 안내성(安乃成)ㆍ문공신(文公信)ㆍ황응종(黃應鍾)ㆍ신경수(申京洙)ㆍ박장근(朴壯根) 등이 상제님을 따르게 되었다.
  이해 6월 20일은 경진일(庚辰日)로서 중복(中伏)이었다.03 이날 상제님께서는 대흥리 앞의 접지리(接芝里) 마을에 계시면서 차경석 등 여러 종도들에게 “중복인 오늘에 뇌성이 울리지 않으면 농작물에 충재의 해가 있으리라.”고 말씀하셨다. 날이 저물도록 우레 소리가 들리지 않자 상제님께서는 하늘을 향하여 “어찌 생민의 재해를 이렇게도 좋아하느뇨!” 하고 꾸짖으시고 한 종도를 시켜 마른 짚 한 개를 가져오게 하신 후, 그것을 무명지(無名指) 손가락에 맞추어 잘라 화롯불에 꽂고 다 태우셨다. 그러자 갑자기 번개가 북쪽에서 번쩍였다. 다시 상제님께서 “북쪽 사람만 살고 타 곳 사람은 죽어야 옳으냐!”고 하늘을 꾸짖으시니, 사방에서 번개가 번쩍이고 천둥이 쳤다.
  이 무렵 상제님께서 차경석에게 시중들게 하고 보신 공사들 중 하나는 서양에서 발명된 문명이기(文明利器)에 대한 것이다. 상제님께서 차경석에게 “전에 네가 나의 말을 좇았으나 오늘은 내가 너의 말을 좇아서 공사를 처결하게 될 것인 바, 묻는 대로 잘 생각하여 대답하라. 서양 사람이 발명한 문명이기를 그대로 두어야 옳으냐? 걷어야 옳으냐?” 물으시니, 차경석이 “그대로 두어 이용함이 창생의 편의가 될까 하나이다.”고 답하였다. 상제님께서는 그의 말이 옳다고 하시며 “그들의 기계는 천국의 것을 본 딴 것이니라.”고 알려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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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제님께서 두어 달 차경석의 집에 머무시는 동안 종도들도 대흥리에 계신 상제님을 찾아와 배알하였다. 하루는 상제님께서 서양식 종이 온 장에 사람을 그려 벽에 붙이시고 제사 때와 같이 신위(神位)를 두시면서 종도들에게 “그곳을 향하여 상악천권(上握天權)하고 하습지기(下襲地氣)식으로 사배(四拜)하면서 마음으로 소원을 심고하라.”고 명하셨다. 종도들이 명하신 대로 행하자, 상제님께서도 친히 그 앞에 서서 식을 마치시고 “너희는 누구에게 심고하였느냐?”고 물으셨다. 종도 한 사람이 “상제님께 심고하였나이다.” 하고 말씀을 올리니, 상제님께서 빙그레 웃으시며 “내가 산 제사를 받았으니 이후에까지 미치리라. 자리로서는 띠자리04가 깨끗하니라.” 하고 일러 주셨다.

  또 한 번은 상제님께서 서양식 종이로 30쪽의 책을 묶으시고는 앞 15쪽 마다에는 ‘배은망덕만사신(背恩忘德萬死神) 일분명일양시생(一分明一陽始生)’을, 뒤 15쪽 마다에는 ‘작지부지성의웅약(作之不止聖醫雄藥) 일음시생(一陰始生)’을 쓰셨다. 그리고 김광찬에게 “이 일은 생사의 길을 정함이니 잘 생각하여 말하라.”고 말씀하시니, 김광찬이 “선령신을 섬길 줄 모르는 자는 살지 못하리이다.”고 여쭈었다. 상제님께서는 아무런 말씀이 없으시다가 잠시 후에 “네 말이 가하다.” 하시며 접시를 종이에 싸서 주사(朱砂)를 묻혀 책장마다 일일이 찍으시고는 “이것이 곧 마패(馬牌)라.”고 이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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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어느 날은 상제님께서 차경석의 집 앞에 있는 버드나무 밑에 서시고 종도들을 줄 지어 앉히신 다음, 북쪽을 향해 휘파람을 부시니 별안간 남쪽의 고창 방장산(方丈山)05으로부터 한 줄기의 안개가 일더니 사방으로 퍼져 문턱 모양이 되었다. 이를 보시고 상제님께서 “곤이내짐제지 곤이외장군제지.”06라고 말씀하신 일이 있으셨다. 

  상제님께서 두어 달간 대흥리 주변에서 여러 공사를 보시고 동곡에 돌아가지 않으시자, 동곡에 있으면서 상제님의 공사를 받들었던 종도들은 점차 불안한 마음이 생겼다. 특히 이들은 차경석이 본래 동학당이고 일진회까지 가담하여 불의한 일을 많이 한 자임에도 상제님의 문하에 있는 것을 매우 싫어하였다. 그중 김광찬의 불평이 가장 심했는데, 그는 상제님께서 차경석을 문하에 들이신 것이 공평하지 못한 일이라 하면서 그간 도덕을 닦아온 것도 모두 허사가 되리라고 불평하였다. 상제님께서 몇 달간 동곡에 들르시지 않자 김광찬의 불평은 더욱 심해갔고, 할 수 없이 김형렬은 상제님을 찾아뵙고 김광찬의 불평을 아뢰면서 “어찌 그러한 성격의 소유자를 문하에 머물게 하시나이까?” 하고 여쭈니 상제님께서 “용이 물을 구할 때에 비록 가시밭길이라도 피하지 않느니라.”고 말씀하셨다. 김형렬은 동곡으로 돌아와서 김광찬에게 ‘고인절교불출오성(古人絶交不出惡聲)’07이라 이르고 금후부터 불평을 말끔히 풀라고 달랬다.
  상제님께서 차경석을 문하에 들이시고 공사에 쓰신 이유는 오직 그가 성경신이 지극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훗날 차경석은 상제님의 뜻을 외면하고 천자를 꿈꾸는 헛된 야망에 사로잡히게 된다.08

 <대순회보> 11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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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김상기, 『동학과 동학란』, 대성출판사, 1947, pp.99∼102.

02 이이화, 「농민전쟁 1백년 / 동학인물열전」, <한겨레신문>, 1993년 12월 28일자, 9면. 

03 중복은 하지 이후 4번째 경일(庚日)이다.

04 띠풀을 재료로 해서 친 자리. 띠적이라고도 한다. 띠자리는 전라도 외에 충청도, 경기도, 제주도 등 전국 각지에서 고르게 사용되었다. 특히 띠자리는 신성시되는 면이 있어서 경남 함양 지리산 부근에서는 애기를 낳을 때면 반드시 이 띠자리를 깔고 출산했다고 한다. 또 전북 남원에서는 제사나 고사 때 까는 돗자리인 배석자리를 띠풀로 엮었다고 한다.

05 해발 743m의 산으로, 원래는 방등산(方登山)이었으나 산이 넓고 커서 백성을 감싸준다는 뜻으로 방장산이라 고쳐서 부르게 되었다.

06 “성곽문 안은 짐이 통제하되, 성곽문 밖에서 일어나는 일은 모두 장군이 알아서 조치하라.” 이는 『통감』 제8권 「한기(漢紀)」 중 한나라 5대 황제였던 문제(文帝)와 그의 신하 풍당의 대화에 나오는 구절이다.

07 “옛 사람은 절교할 때 비난하는 소리(말)를 내지 않는다.” 이와 유사한 표현이 『사기』 「악의열전(樂毅列傳)」에 다음과 같이 보인다. 古之君子 交絶不出惡 忠臣去國 (옛날의 군자는 사람과 교제를 끊어도 그 사람의 나쁜 점을 말하지 않고, 충신은 나라를 떠나도 자신의 명예를 위해서 결백을 주장하려고만은 하지 않는다)

08 차경석의 헛된 야망에 대해서는 『대순회보』 68호, pp.17∼29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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