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제님김병욱의 화(禍)를 풀어주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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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11.03 조회5,058회 댓글0건본문
글 대순종교문화연구소
김병욱(金秉旭, 1874∼1938)은 1903[癸卯]년부터 상제님을 따르기 시작한 종도였다. 그가 하루는 상제님께 명당(明堂) 자리를 하나 부탁 드렸더니, 상제님께서 “믿고 있으라.”고 하셨다. 얼마 후 김병욱은 바라던 아들을 하나 얻어 매우 기뻐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도 상제님께서 땅을 보아주시지 않으시기에 그가 “주시려던 명당은 언제 주시나이까?”고 여쭈었더니, 상제님께서는 “네가 바라던 아들을 얻었으니 이미 그 명당을 받았느니라.”고 일러주셨다. 그리고 다시 “선천에서는 매백골이장지(埋白骨而葬之: 백골을 묻어서 장사를 지냄)로되 후천에서는 불매백골이장지(不埋白骨而葬之: 백골을 땅에 묻지 않고서 장사를 지냄)니라.”고 말씀하셨다.
김병욱은 전주 육군 진위대01 하급 장교였다. 전주를 지키는 관군들은 10년 전인 1894[甲午]년에 전봉준(全琫準)이 이끄는 동학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여 많은 사상자를 낸 적이 있었으므로 전봉준에 대해 좋게 생각하지 않고 있던 터였다. 이를 두고 상제님께서는 김병욱에게 “남은 어떻게 생각하든지 너는 전명숙(全明淑=전봉준)의 이름을 더럽히지 말라. 너의 영귀(榮貴)02에는 전명숙의 힘이 많으니라.”고 가르치셨다.
하루는 김병욱이 힘이 세어지게 해주는 차력약(借力藥)03을 먹고자 했는데, 상제님께서는 “네가 약을 먹고 차력하여 태전(錢)04을 지겠느냐, 길품을 팔겠느냐, 난리를 치겠느냐, 그것은 사약(死藥)이니라!”고 깨우쳐 주시며 그런 생각을 버리게 하셨다.
1903[癸卯]년 4월이 되자 김병욱은 남원으로 가서 세금을 거두는 직책을 맡았다. 그런데 얼마 후 김병욱은 박영효(朴泳孝)의 일당으로 연루되어 화를 당하게 되었다. 박영효는 1884년 혁명으로 급진 개화를 주도했다가(갑신정변) 실패하여 일본에 망명한 인물이었다. 그는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끝나고 일본에 의해 친일정권이 수립되자 귀국하여 다시금 근대국가로의 개혁을 단행하였으나, 왕비를 시해하고 정부를 전복하려 한다는 역모의 누명을 쓰고 1895년 재차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박영효는 1898년 무렵 고종을 밀어내고 고종의 아들인 의화군(義和君, 1877∼1955)05을 왕으로 옹립하려다가 실패했고, 1900년에는 러시아와 일본이 만주와 한반도를 분할 점령한다는 밀약을 체결했다는 소문이 돌자 이 난국을 타개하기 위하여 무능한 정부를 전복하고 새로운 정부를 수립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06 이런 박영효를 눈엣가시로 여기고 있던 조정은 1903년 여름이 되자 박영효를 따르던 국내 인사들을 대거 잡아들이기 시작했다.
김병욱도 박영효의 일파로 알려져 있어서 조정에서는 그를 체포하려고 하였다. 8월에 포교들이 전주로 내려와 김병욱을 잡으려 하였으나, 당시 김병욱은 세금을 걷기 위해 남원에 머물고 있던 중이었다. 포교들은 다시 남원으로 향했는데 전주에서 남원까지는 동남쪽으로 불과 50㎞밖에 떨어지지 않은 짧은 거리였다. 그러나 이런 급박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김병욱은 자신에게 닥칠 화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포교들이 닥치기 얼마 전, 갑자기 상제님께서 남원에 있는 김병욱의 숙소로 가셔서 그가 모아 둔 세금을 숙소 주인에게 맡기게 하신 뒤, 가죽신 대신 짚신을 신게 하고 당신의 뒤를 따르게 하셨다. 김병욱은 영문도 모른 채 상제님의 명을 쫓았고, 해가 질 때까지 걸어 그의 선산 밑에 도착하였다. 아무 말씀이 없으시던 상제님께서 그제야 김병욱을 돌아보시며 선산의 묘형(墓形)을 물어보시니, 그는 “와우형(臥牛形)입니다.”고 아뢰었다. 상제님께서 “그러면 소 우는 소리를 들어야 참이 되리라.” 하시고 그 자리에 앉아 기다리시니 산 아래서 “음메” 하는 소 우는 소리가 들렸다. 김병욱이 소 울음소리를 아뢰자 상제님께서는 “먼 데서 들리면 소용이 없나니라.” 하시고 계속 기다리시니 이상하게도 한 사람이 소를 몰고 묘 앞으로 지나가는데 갑자기 소가 크게 우는 소리를 내었다. 상제님께서 이를 보시고 “혈음(穴蔭)07이 이미 동하였도다.” 하시며 자리를 떠서 그 산소의 재실로 내려가 그날 밤을 새우셨다.
다음날 상제님께서 묘지기를 남원에 보내어 형세를 알아보게 하셨더니, 그제야 김병욱은 조정에서 포교들이 자신을 잡으러 남원에 들이닥쳤다는 사실을 알고 크게 놀라 두려워하였다. 상제님께서는 여자가 타는 가마를 구하게 하셔서 김병욱을 태우고 전주 상관(上關) 좁은 목으로 가셨다. 상제님께서는 그곳에서 김병욱을 서원규(徐元奎, 1855∼1935)의 집에 보내어 정세를 살피게 하셨다. 약국을 운영하던 서원규는 평소 김병욱과 절친하게 지내던 사이였는데, 자신의 집에 들어서는 김병욱을 보고 깜짝 놀라며 “그대가 어떻게 사지(死地)를 벗어났으며 또 어떻게 하려고 이런 위지(危地)에 들어섰느냐. 너무나 급한 화이기에 미쳐 연락할 새가 없었노라. 여러 친구와 그대의 가족들이 근심 걱정하는 중이니라.”고 말했다. 김병욱은 포교들이 전주를 떠나 남원으로 향한 때와 상제님께서 자기를 남원에서 데리고 나오신 때가 겨우 한나절 사이 밖에 되지 않는 것을 알고는 상제님께서 하느님이심을 탄복하여 마지않았다.
김병욱을 잡으러 남원에 갔던 포교들은 그를 찾지 못하고 전주에 되돌아와서 전주 군수에게 그의 소재지를 캐묻고 또 각처에 훈령을 내려 그를 잡아들이게 하였다.
서원규의 약국에 숨어 지내게 된 김병욱은 그의 약국이 서천교(西川橋) 네거리의 번화한 곳에 있어서 무척 걱정하였다. 상제님께서 나중에 김병욱을 찾아오셔서 그에게 근심을 말 것을 이르셨다. 그런데 상제님께서는 그를 데리고 왕래하시면서 길거리에서 수배 중인 그의 이름을 높이 부르시는 게 아닌가! 김병욱은 당황하여 모골이 송연하였으나 놀랍게도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또 자기 얼굴을 아는 사람들과 이곳저곳에서 마주쳤으나 신기하게도 그를 알아보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얼마 후 상제님께서는 김병욱을 장흥해(張興海)의 집으로 옮기시고 그곳에서 석 달 동안 머물게 하셨다. 석 달이 지나자 상제님께서는 김병욱에게 이제 마음을 놓으라고 이르셨는데, 과연 그때 러일전쟁이 임박하여 일본군이 나라에 들어오고 박영효를 따르던 당원들에 대한 혐의도 사라졌으며 김병욱도 지명수배에서 풀려나게 되었다.
훗날 상제님께서는 류찬명(柳明)과 김자현(金自賢) 두 종도에게 각각 10만 명에게 포덕하라고 이르실 때, 김병욱의 액을 태을주로 풀었다는 말씀을 전하셨다.
<대순회보> 9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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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갑오개혁의 일환으로, 1895년(고종 32) 9월 지방의 질서유지와 변경수비를 목적으로 설치된 근대적 지방 군대.
02 높고 귀함.
03 신령의 힘을 빌려 몸과 기운을 굳세게 하기 위하여 먹는 약. 「기문둔갑장신법(奇門遁甲藏身法)」에 따르면 주사(朱沙), 황토물, 먹물로 부(符)들을 그려 태운 뒤 그 재를 정수(淨水) 한 잔에 타고, 밀가루에 제독된 구리가루, 철분, 산골, 자석, 우황, 사향, 인삼을 1량씩 섞어서 소 9마리를 만들되 각각 무게는 9전씩이요, 소 등에는 북두칠성을 그리고 15점을 찍어서 쪄서 익힌 다음, 부적 태운 물과 함께 먹는 것을 차력약으로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도가(道家)에서 이르기를 차력은 방술일 뿐 도의 근본 경지가 아니기 때문에 차력약으로 힘을 얻으면 인간의 속성상 다른 사람 앞에서 힘을 과시하기 쉽고 이러한 힘의 과시 때문에 자칫하면 불행을 자초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04 짐을 날라다 주고 받는 삯.
05 의친왕(義親王) 이강(李堈)을 말한다. 어머니는 귀인(貴人) 장씨(張氏)로 고종의 다섯 째 아들이다. 1891년에 의화군으로 봉해지고 일본 게이오 대학을 거쳐 1899년 미국에 유학하였다. 1905년 귀국하여 육군부장이 되었으며, 이어 적십자 총재에 올랐다. 한일합방 후 주색에 빠진 폐인 행세로 일본의 삼엄한 감시를 피하고 있다가 1919년 상해임시정부로 탈출을 기도하였으나 발각되었다.
06 자세한 사항은 김성수, 「최익현과 박영효의 원」, 『대순회보』 65호, pp.67∼74 참고.
07 묏자리의 기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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