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제님진보회(進步會)와 일진회(一進會)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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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11.03 조회5,071회 댓글0건본문
글 대순종교문화연구소
진보회와 일진회는 원래 성격이 전혀 다른 단체들이었다. 그런데 진보회가 1904년 여름에 설립되어 그해 겨울에 일진회에 흡수 합병되어 존속 기간이 짧았기 때문에, 진보회와 일진회는 서로 혼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 글에서는 두 단체를 구분하기 위하여 1904년 12월 이전 즉 두 단체가 합병하기 전을 ‘진보회’와 ‘원(原)일진회’라 부르고, 합병한 후는 모두 ‘일진회’로 표기하기로 한다.
동학도들은 진보회를 통해 재기를 꿈꾸었으나, 진보회는 얼마 지나지 않아 동학 단체라는 것이 탄로나 정부와 지방 관리들로부터 탄압을 받게 되었다. 특히 10년 전 동학농민운동 당시 민보군(民堡軍)을 조직해 동학농민군들과 싸운 전력이 있었던 아전들은 동학을 적대시하고 있었으므로 진보회 공격의 중심에 섰다. 게다가 진보회가 단발 등 급진적인 개혁을 추구하며 향촌 사회의 질서를 뒤흔들어 놓고 있었으니 이들이 진보회를 타도의 대상으로 생각함은 당연한 일이었다.
1904[甲辰]년 7월 전주부(全州府)01에서 아전들과 진보회원들 사이에 교쟁이 발생하자 최창권(崔昌權)이란 사람이 사대문(四大門)을 굳게 닫고 진보회원들의 출입을 막은 뒤에 전주부 내의 아전들을 모아 진보회를 타도하려고 각 군 각 면으로 통문을 보낸 일이 있었다. 상제님께서는 이 소식을 들으시고 “어렵게 살아난 것이 또 죽겠으니 그들을 내가 제생하리라.” 하시며 화정동(花亭洞)02의 이경오(李京五)에게 돈 70냥을 가지고 오게 하셨다. 이경오는 2년 전인 1902년에 상제님으로부터 크나큰 은혜를 입었던 사람이었다. 당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할 정도의 원인모를 큰 병을 앓고 있을 때 상제님께서는 그의 병을 고쳐주신 적이 있었던 것이다.03 그런데 이경오는 돈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없다고 딱 잡아떼고는 거절하는 것이 아닌가!
부득이 상제님께서는 다른 곳에서 돈 7냥을 구하셔서 “이 돈이 능히 칠십 냥을 대신하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는 김형렬을 데리고 용머리 주막에 오셔서 많은 사람들을 불러 술을 같이 드시고는, 종이에 글을 쓰신 뒤 그 종이를 여러 쪽으로 찢어 노끈을 꼬아서, 그 주막 문의 돌쩌귀와 문고리에 연결하여 두시는 공사를 시행하셨다. 과연 그날 오후 아전과 진보회원들 사이에 화해가 성립되어 진보회원들이 전주성 사대문을 열고 전주부에 들어왔다. 이 공사에 쓰인 비용이 모두 6냥이었고, 상제님께서는 “고인은 바둑 한 점으로써 군병 백만 명을 물리친다 하나 나는 돈 엿 냥으로써 아전과 일진회(진보회)의 싸움을 말렸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이후에도 얼마간 상제님께서는 용머리 주막에 머물고 계셨는데, 밤마다 전주부 내의 순검들이 순회하면서 사람들을 조사하여 진보회원들을 색출하고 다녔다. 그러자 상제님께서는 진보회원들에게 “그대들이 이 같이 고난을 겪기만 하고 벗을 줄을 모르니 무슨 일을 하느뇨. 내가 그대들을 위하여 관부(官府)의 조사를 면케 하리라.” 하시니 이로부터 그렇게 엄격하던 취체(取締)04가 풀리게 되었다.
훗날에 상제님께서는 이경오에게 “내가 그대에게 돈 칠십 냥이 있음을 알고 청구한 것인 바, 왜 그렇게 속이느뇨?”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이경오는 정색을 하면서 “참으로 없었나이다.” 하고 아뢰는 것이었다. 그러자 다음 날, 이경오의 집에 화적이 들어 70냥을 몽땅 훔쳐가 버렸는데, 이 소식을 들으신 상제님께서는 “그 돈에 척신(神)이 범함을 알고 창생을 건지려고 청한 것이어늘 그가 듣지 아니하였도다.”고 일러주셨다.
상제님 덕분으로 진보회는 전주부에서 탄압을 받지 않게 되었으나, 전국적으로 보면 진보회는 여전히 정부와 지방 아전들의 탄압 대상이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진보회는 과거 동학농민운동 때 자신들과 피를 흘리며 싸웠던 일본군으로부터는 별 탄압을 받지 않았다. 일본 군부는 진보회가 동학당임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만, 진보회원들이 무기를 휴대하지 않고 일본 순사를 만나면 반드시 경례를 한다는 점 때문에 옛날의 동학당과는 달리 위험하지 않다고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진보회가 일본군을 위한 부역에 나서는 일이 많았으므로 일본 군부는 진보회의 이용가치를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군의 후원을 받고 있던 원(原)일진회는 자신들의 세력을 확장시키기 위해서 전국적인 조직망을 가지고 있던 진보회를 흡수하려고 온갖 회유에 나섰다. 원래 진보회는 동학 교단이 주체가 된 전국 규모의 민회운동 단체였고, 원(原)일진회는 친일을 표방하면서 서울에만 기반을 둔 소규모 정치 단체였다. 이 두 단체는 계급적 기반도, 지역적 기반도, 나아가 사유 체계, 가치관, 종교성 등도 전혀 달랐다. 그럼에도 이 두 단체는 일본을 기반으로 하면서 문명개화를 표방했다는 점, 정치적 불평·불만 계층이었다는 점, 반정부적이었다는 점에서 일치했기 때문에, 외부에서는 이 두 단체를 종종 같은 단체로 혼동하는 경우가 많았다. 원(原)일진회는 처음에는 지방의 진보회가 자신들로 잘못 알려지는 일이 불이익을 가져다 줄 것으로 보고 자신들은 진보회와 아무런 관련이 없음을 적극 해명하곤 했다. 그러다가 자신들의 세력을 확장시키기 위해서는 진보회가 가진 전국 조직을 이용하는 것이 좋다는 것을 깨닫고는 진보회를 흡수하기 위해 갖은 회유에 나섰던 것이었다.
원(原)일진회를 이끌던 송병준은 진보회 회장 이용구에게 많은 향락을 제공하면서 정부의 탄압을 피하고 진보회를 지키기 위해서는 일본 군부의 비호를 받는 일진회의 그늘로 들어가는 것이 최선이라고 설득하였다. 때마침 각 지방의 진보회 지회(支會)들도 탄압을 모면하기 위해 친일 정치 조직인 일진회(一進會)와의 통합을 요청하였다. 이런 이해관계가 맞물려 진보회는 설립된 지 불과 몇 달 만에 일진회와 통합되었고 결국 나라를 팔아먹는 친일단체로 전락하고 말았다.05
<대순회보> 10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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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지금의 전주는 조선 초기인 1403년 이후부터 1914년 행정구역이 개편될 때까지 ‘전주부(全州府)’라고 불렸다.
02 現 전북 전주시 완산구 중인동 화정마을.
03 「삼계 개벽공사와 제생의세」, 『대순회보』 제 92호, pp.15∼17 참고
04 규칙, 법령, 명령 따위를 지키도록 통제함. 단속(團束).05 이용창, 『동학·천도교단의 민회설립운동과 정치세력화 운동』, 중앙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박사 학위 논문, 2004, pp.99∼102, pp.211∼217 참고.
05 이용창, 『동학·천도교단의 민회설립운동과 정치세력화 운동』, 중앙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박사 학위 논문, 2004, pp.99∼102, pp.211∼217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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