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제님상제님의 주유천하 3 - (3)김일부와 만나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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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10.23 조회10,941회 댓글0건본문
글 대순종교문화연구소
▲ 향적산. 국사봉이라고도 하며 계룡산 남쪽에 있다. 해발 574m
그후 이운규는 띠울마을을 떠나 홀연히 종적을 감췄고, 김일부는 영가무도에 힘쓰면서 『서전』 읽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 무렵 그가 영가무도를 얼마나 열심히 했던지 마을 사람들은 미쳤다고 생각하여 귀신을 쫓아내고자 『옥추경』까지 읽어댔다고 하며, 집안에서는 가문 망신이라 하여 광산 김씨 족보에서 그의 이름을 지워버리기까지 하였다고 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갑자기 가사를 대신 돌보던 김일부의 동생까지 병으로 죽어버렸고, 생활이 극도로 어려워진 김일부는 민씨부인을 띠울에 살던 딸집으로 보내고 자신은 다오개(多五介)01에 사는 매부 최형석(崔泂奭)의 집으로 가게 되었다.
그럼에도 김일부는 시련에 굴하지 않고 스승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더욱 공부에 힘썼다. 다오개에서 얼마간 머물던 그는 은진(恩津)에 사는 고종사촌 동생 권종하(權種夏, 후에 일부의 제자가 됨)의 집으로 옮겼다가 당골로 돌아와 박씨부인과 재혼하여 자녀를 몇 명 더 두었다.
▲ 향적산방으로 가는 길. 충남 계룡시 엄사면 향한리에 있는 사찰 무상사(無上寺) 뒤편에 있는 두 갈래 산길 중 왼쪽으로 가면 된다. 아마 상제님께서도 이길을 걸으셨으리라 생각된다.
계속 학문에 정진하던 김일부는 드디어 54세가 되던 1879년에 스승 이운규가 말해준 한시 구절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 그런데 그 후 갑자기 김일부의 눈에 이상한 괘(卦)들이 나타나 점점 커지더니 나중에는 천지가 모두 괘로 보이는 것이었다. 이런 현상은 3년이 지속되었고, 『주역』에 이러한 괘가 없음을 안 김일부는 비로소 1881년에 그 괘 즉 ‘정역팔괘도(正易八卦圖)’를 그리게 되었다. 이때 공자가 나타나 “내가 일찍이 하고자 하였으나 이루지 못했던 것을 그대가 이루었으니 이런 장할 데가 있나”라고 크게 격려했다고 전해진다. 김일부는 자신의 깨달음을 한 권의 책으로 엮어 60세가 되던 1885년에 완성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정역(正易)』이었다.
당골마을에서 정역을 완성한 김일부는 회갑을 지내고 다시 다오개에 있는 매부 최형석의 집으로 이주하였다. 그는 68세가 되던 해인 1893년 2월에 동학농민운동이 발발할 것을 예상하고는 세상의 혼란스러움을 피하여 제자 36명을 데리고 계룡산의 한 줄기인 향적산(香積山, 국사봉이라고도 함, 해발 574m)에 은거하였다. 이 산 중턱에는 거북바위와 용바위가 있었고 김일부의 제자들은 그 가운데 빈 터에 초가 세 채를 지었다. 김일부는 이곳에서 지냈는데, 바로 이 무렵 그러니까 대략 1897년경 천상에 오르는 꿈을 꾸고 상제님의 방문을 맞이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곳에 있었던 초가들은 지금 사라지고 없고 대신 정역 공부를 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향적산방(香積山房)이 들어서 있다.
다음 해인 1898년 가을, 김일부는 추석이 되기 직전에 한 제자의 등에 업혀 다오개 마을로 돌아왔다. 그해 11월 24일, 김일부는 박씨부인과 두 자녀를 불러 앉히고 “내가 평생에 공부만 알고 금전을 몰라서 집안이 이 꼴이 되었으니, 너희들을 고생시킨 일을 생각하면 딱하고 가엾다. 참 안됐다. 그러나 성인(聖人)의 일을 알아보느라고 그리 된 일이니 할 수 있느냐. 너무 걱정 말고 참고 살아가노라면 자연히 돕는 사람도 생겨서 그럭저럭 부지할 것이다. 그리고 후일에 네가 아들을 낳을 터이니 이름을 ‘수득(壽得)’이라고 하여라.”고 유언하고 그 이튿날 아침에 숨을 거두었다. 한편 김일부는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 제자 일행에게 집에 돌아가서 펴 보라며 ‘戊戌 甲子 甲戌 戊辰’을 적어 주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그 자신의 사망 사주였다고 한다.
▲ 거북바위와 용바위 사이에는 제법 너른 터가 있다. 김일부는 이곳에서 상제님을 뵌 것으로 추정되며, 현재 이 장소에는 정역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향적산방이 서 있다.
김일부에게는 현재 전해지는 초상화가 없다. 그것은 그가 생전에 “후일에 서로 만나볼 것을 무엇하려고 그리느냐. 그림이야 아무래도 터럭 하나라도 틀릴 것이 아니냐.”고 하면서, 자신의 모습을 그리기를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라 한다.
평생 학문에 몰두하여 정역을 완성시키고 후천이 열린다는 것을 깨달은 김일부! 실로 그는 죽기 한 해 전에 상제님을 뵘으로써, 그가 꿈꾸던 후천이 상제님에 의해 열리고 그로 인해 도탄에 빠진 천하창생들이 화평한 세상을 맞이하게 될 것을 알았던 사람이었다. 이런 그였기에 훗날 상제님의 명에 의해 청국의 명부를 관장하는 직책을 맡게 되었을 것이다.
<대순회보> 8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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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現 충남 논산시 부적면 부황 2리. ‘다오개’라는 지명은 다섯 고개가 있고 감, 대추, 밤, 호두, 은행의 다섯 과실나무가 잘 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다현(茶峴)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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