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제님모악산 대원사로 가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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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10.23 조회5,363회 댓글0건본문
글 대순종교문화연구소
진법주·오방신장·사십팔장·이십팔장 공사를 마치신 상제님께서는 시루산을 내려와 전주부(全州府)01로 향하셨다.
도중에서 이치안(李治安)이라는 노인이 황급히 길을 가는 것을 보시고 갑자기 “집으로 곧 돌아가라.”고 말씀하시니, 그가 이상하게 생각하여 그 까닭을 여쭈었다. 상제님께서는 “그대가 지금 혼사(婚事)로 중매인을 찾아가나 그가 그대의 집에서 기다리고 있느니라. 그리고 오늘 중매인을 만나서 결정하지 않으면 그 일은 허사가 되리라.”고 일러주셨다. 이치안은 탄복하여 가던 길을 되돌려 다시 집으로 갔더니, 과연 중매인은 집에서 기다리고 있었고 혼사도 성사되었다. 그는 상제님을 수소문하여 다시 찾아와 감사의 인사를 드렸으며, 이 인연으로 상제님을 따르는 종도가 되었다.
얼마 후 이치안은 상제님을 전주 이동면(伊東面) 전룡리(田龍里) 자신의 집으로 모셨다. 그때 그의 집에 있던 훈장은 상제님이 정말 보통 어른이 아니신지 시험해 보려는 마음을 먹었는데, 이를 미리 아신 상제님께서는 줏대를 가지고 산(算)을 두시며 그 동네의 호구(戶口)02를 정확히 맞추시고, “사흘 안에 한 사람이 줄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치안과 그의 아들 이직부(李直夫)가 동네 호구를 조사해 보니, 과연 하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맞았으며 사흘 안에 동네의 한 사람이 죽었다. 이 일로 이치안과 이직부는 상제님을 더욱 경외(敬畏)하게 되었다.
또 하루는 이직부가 자기 부친의 그해 운수를 봐달라고 간청하자, 상제님께서는 부득이 백지 한 장에 글을 써서 불사르시고 다시 다른 종이에 글을 써서 “급한 일이 있거든 뜯어보아라.”고 말씀하시며 봉하여 주셨다. 이치안은 아들로부터 이 봉서(封書)를 받아 깊이 간직하였다. 얼마 후 그의 며느리가 난산(難産)으로 고생하자 이치안은 급히 봉서(封書)를 가지고 갔으나 이미 아이를 낳았기에 열어보지 않고 다시 넣어두었다. 해가 끝날 때쯤 갑자기 이치안이 병이 들어 매우 위독하게 되자, 아들 이직부가 상제님께서 주신 봉서를 열어보았더니 “소시호탕(小柴胡湯)03 두 첩이라.”고 쓰여 있었다. 그 약을 지어 먹은 이치안은 바로 쾌유되었다.
상제님께서는 이치안의 집에 오래 머무시지 않으시고 곧 모악산(母岳山) 대원사(大院寺)로 떠나셨다. 모악산은 상제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전 30년간 임어하셨던 금산사(金山寺)가 있는 곳이다. 모악산의 정상은 국사봉이고, 이 봉의 서쪽 기슭에는 금산사가, 동쪽 기슭에는 대원사가 자리하고 있다. 대원사는 신라시대에 세워진 고찰(古刹)로 정유재란 때 불에 타 없어졌던 것을 1606년(선조 39) 진묵대사가 중창하여 수도 장소로 삼았던 곳이다. 그후 쇠락하였으나 1886년(고종 23)에 금곡(錦谷)대사가 새로 와서 대웅전과 명부전을 새로 지었다.
산속에 있는 대원사는 주위가 한적하여 시루산과는 달리 세상 사람들의 이목에 간섭을 받지 않는 조용한 장소였다. 상제님께서는 금곡대사에게 조용한 방 한 간을 치우게 하고 사람들의 접근을 일체 금하게 하신 뒤, 드디어 천지대도(天地大道)를 여시기 위해 불음불식(不飮不食)04의 공부에 들어가셨다.
<대순회보> 8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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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지금의 전주는 조선 초기인 1403년 이후부터 1914년 행정구역이 개편될 때까지 ‘전주부(全州府)’라고 불렸다.
02 호수(戶數)와 식구수.
03 한의학 처방의 하나. 인삼탕 또는 삼금탕(三禁湯)이라고도 부른다. 병증(病症)이 신체의 상하(上下)내외(內外)의 중간 부위에 처하여 가슴이 가득 충만된 듯 답답한 느낌이 있는 증상, 모든 열성병에서 한열(寒熱)이 왕래하는 증상, 식욕부진, 구토, 어지럼증을 치료하는데 쓰이며, 임산부 감기에도 쓰인다. 특히 현대에는 간질환 등에 응용률이 높은 한방의 필수 처방이다. 한 첩에 든 약재는 시호 12g, 황금(黃芩), 인삼, 반하(半夏) 각 4g, 감초 2g, 생강 3쪽, 대조 2알이다.
04 마시지도 않고 먹지도 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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