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제님상제님의 유년시절(幼年時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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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07.21 조회5,619회 댓글0건본문
상제님께서는 어리실 때부터 성품이 원만·관후(寬厚)01하시었다. 또한 지극히 작은 곤충이라도 해치지 않으셨으며 초목 하나라도 꺾지 아니 하시고 나무심기를 즐겨하실 만큼 호생(好生)의 덕(德)02이 두터우셨다. 거기에 총명함까지 남달랐으니 주변 사람들의 경대(敬待)를 받으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상제님께서 일곱 살 되시던 해03의 일이다. 부친께서는 동네 서당 훈장을 집으로 초청하여 상제님, 즉 소년 증산께 천자문(千字文)을 가르치게 하였다. 소년 증산께서는 훈장이 ‘하늘 천(天)’하고 읽자 이를 따라 읽으시고 ‘따 지(地)’하자 또 따라 읽으셨다. 그러나 ‘검을 현(玄)’, ‘누를 황(黃)’은 따라 읽지 아니하시었으니 훈장은 이를 매우 이상하게 생각하였다.
훈장이 그 이유를 물었더니 소년 증산께서는 “하늘 천(天)에서 하늘의 현묘한 이치를 찾았고 따 지(地)에서 땅의 오묘한 이치를 모두 간파하였으니 그 이상 배울 것이 없소이다.”하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부친께 “그만 훈장을 돌려보내사이다.”라고 하시니, 부친은 할 수 없이 훈장을 그냥 보낼 수밖에 없었다.
증산이 비록 나이 어린 소년의 몸이라 하나, 실은 하늘의 가장 높은 곳에서 구천대원조화주신(九天大元造化主神)으로 계시다 잠시 인신(人身)을 빌려 이 땅에 내려오신 상제님이셨으니, 그 누구도 상제님의 스승이 될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런 일이 있고 얼마 후 어느 글방에 일이 있어 잠시 들르시게 되었다. 그곳의 훈장이 소년 증산이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소문을 들은지라, 시험해보고자 하는 욕심에 소년 증산께 ‘놀랄 경(驚)’의 운자(韻字)를 주면서 시(詩)를 지어보라고 권유하였다. 이때 불과 일곱 살이시던 소년 증산께서 지으신 시는 다음과 같다.
遠步恐地坼(멀리 걸음을 떼면 땅이 갈라질까 두렵고)
大呼恐天驚(크게 고함을 지르면 하늘이 놀랄까 두렵다)
이 시에 표현되어 있는 소년 증산의 기국(器局)에 훈장이 크게 놀랬음은 물론이다.
세월이 흘러 소년 증산께서 열세 살이 되셨다. 당시 부친께서는 가난한 집안의 생계를 위하여 짚신을 삼고 모친께서는 모시를 짜고 계셨다.
하루는 모친께서 짜 놓으신 모시베04을 파시려고 이웃에 사는 유덕안(兪德安)05이라는 사람과 함께 정읍(井邑)장으로 가신 일이 있었다. 모시를 팔기 위해 장터에 앉아 손님을 기다리는 중에 유덕안은 잠시 볼일이 있어 자리를 비우게 되었다. 그런데 소년 증산께서 잠시 다른 곳을 보고 있는 사이 누군가가 모시를 들고 가 버렸다. 곧 유덕안이 돌아왔고 소년 증산은 덕안과 함께 해가 질 때까지 장판을 뒤졌으나 모시를 찾지 못했다.
▲ 상제님 재세시의 일반적인 5일장의 모습06
덕안은 집에 돌아가기를 권하였으나 소년 증산은 집안의 형편을 생각하니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소년 증산은 다음 날이 고창(高敞)의 장날임을 아시고 덕안을 집에 돌려보내시고는 서남쪽으로 약 25㎞ 떨어진 고창으로 홀로 행하셨다. 고창의 장판에서 포목점 근처를 두루 살펴보시다가, 마침 잃어버린 모시를 팔러온 자가 있어 그 모시에 표시해 두었던 점을 근거로 그 모시의 본래 소유주임을 밝힌 후, 모시를 돌려받으시고는 포목점에 모시를 팔고 집에 돌아오셨다.
이틀 만에 무사히 집에 돌아온 소년 증산을 본 가족들의 기쁨은 매우 컸다. 동리 사람들은 증산의 지혜와 담력에 놀라워하며 더욱 증산을 경대하였다.
한편 소년 증산은 장난을 즐기시는 데도 일가견이 있었다고 한다. 소년 증산의 친척인 강연회(姜然會)와 강기회(姜驥會)07은 기골이 장대하고 기력이 출중하여 가끔 소년 증산과 힘자랑을 하였는데, 소년 증산이 돌로 만든 맷돌 밑짝의 가운데 중쇠를 이에 물고 올리시니 주위에서 지켜보던 사람들은 놀라 넋을 잃었다고 한다. 또 때로는 마당에 서서 발로 지붕 처마 끝을 차기도 하시고, 때로는 한손으로 용마름08을 지붕 위로 던지기도 하시고, 때로는 발뒤꿈치와 두 팔을 땅에 대고 떠 있는 몸으로 장정 십여 인으로 하여금 허리를 땅에 닿게 하였으나 장정들은 힘만 빠지고 소년 증산의 허리는 흔들리지도 않았다고 한다. 하루는 소년 증산이 돌절구를 머리에 쓰고 상모 돌리듯 하는 것을 보고 지켜보던 사람들이 크게 놀랐다는 이야기도 있다.
01 너그럽고 후함.
02 살리기를 좋아하는 덕. 곧 인의(仁義)의 마음으로써 모든 생명(生命)을 아끼는 미덕(美德).
03 1877년, 丁丑년.
04 모시뵈(모시의 옛말)를 말함.
05 1860년생으로, 당시 소년 증산보다 11살 많은 24세의 나이였다.
06 『사진으로 보는 조선시대-생활과 풍속』, 서문당, 1986, p.7
07 항렬로는 소년 증산의 아저씨뻘되는 친족들로 상제님과 같은 동리에 살았다. 부친 강기중(姜淇重)과 모친 조난중(趙蘭重) 사이에 난 형제들로 첫째가 강성회(姜聖會, 1859년생), 둘째가 강연회(姜然會, 1873년생), 셋째가 강기회(姜驥會, 1878년생)였다.
08 초가지붕의 제일 높은 곳을 덮기 위해 짚을 양 갈래로 지네처럼 길게 틀어 엮은 이엉. 기와지붕에서는 용마루라고 한다.
<대순회보 7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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