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제님상제님 강세하신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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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07.10 조회5,824회 댓글0건본문
지명(地名)
세상을 구원하는 대역사(大役事)를 펼치시기 위하여 상제님께서 인간의 몸으로 친히 강세하신 곳은 전라도(全羅道) 고부군(古阜郡) 우덕면(優德面) 객망리(客望里, 일명 손바래기 마을)01이다.
이 마을은 원래 선인독서혈(仙人讀書穴)이 있다고 하여 선망리(仙望里, 일명 선(仙)바래기 마을)라고 불렸던 곳이다.02 상제님께서 화천(化天)하신 뒤로는 이름이 신월리(新月里) 새터(신기(新基)마을)로 변경되었다가 현재는 신기마을과 이웃 송산(松山)마을을 합쳐 ‘신송(新松)마을’이라고 불리고 있다.
신송마을 한 가운데에는 상제님께서 강세하신 집터가 있으며, 현재 그곳에는 후대에 지어진 두 채의 가옥이 세워져 있다.
여기 신송마을은 시루산 아래에 자리를 잡은 마을인데, 시루산은 호남 삼신산(三神山) 중의 하나인 고창의 방장산으로부터 산줄기가 이어져 내려온 곳이다.
예로부터 우리나라에서는 금강산을 봉래산(蓬萊山), 지리산을 방장산(方丈山), 한라산을 영주산(瀛洲山)이라 하여 이 세 산을 삼신산으로 일컬어왔다.03 그런데 ‘호남의 삼신산’이라 불리어오던 곳이 따로 있으니 부안의 변산(봉래산), 정읍의 두승산(영주산), 고창의 방장산이 바로 그것이다.
전북 부안군에 있는 변산(邊山)은 봉래산(蓬萊山)으로 불리며 최고봉은 의상봉(508m)이다. 1,300년 전 진표율사가 미륵을 만나 수기(授記)를 받은 장소인 부사의방(不思議房)이 바로 이곳 의상봉 동쪽 절벽 중턱에 있다.
고창의 방장산(方丈山)은 높이가 743m로 산세가 깊어 옛날에는 도적떼가 많았다고 알려져 있다. 원래 방등산(方等山)이라고 불렀다가, 근래에 들어 산이 넓고 크니 백성을 잘 감싸준다는 뜻으로 방장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04 이 산으로부터 산줄기가 북쪽으로 뻗어나가 이루어진 산이 정읍 영주산(瀛洲山: 두승산)과 망제봉(望帝峰)이다.
영주산은 현재 두승산(斗升山)이라고 불리며 모두 9개의 봉우리에 최고봉의 높이는 443.9m이다. 『영주읍지(瀛州邑誌)』에 의하면 산에 석두(石斗: 1말, 2말 등으로 곡식의 분량을 헤아릴 때 쓰는, 돌로 만든 원기둥 모양의 그릇)와 석승(石升: 1되, 2되 등으로 곡식의 분량을 헤아릴 때 쓰는, 돌로 만든 사각형 모양의 그릇)이 있어 두승산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 산에 석두와 석승이 있는 이유는, 옛날 고부관아에서 도량형의 기준을 확실히 하기 위하여 고을의 진산(鎭山)이 되는 이 산 바위에 말과 되를 새겨서 그 기준을 삼고자 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05 한편 지금의 영주산(두승산)은 ‘말[斗]은 둥글어 하늘을 상징하고 되[升]는 네모져서 땅을 상징하며, 이 말과 되로 인간의 수명과 복록을 정해주는 산’이라고 알려져 있다.
▲ 진선마을. 전북 정읍시 고부면 소재. 마을 뒤편의 산이 영주산이며 그 산세가 선인포전이라는 설이 있다.
▲ 영주산 서북쪽 정상 부근에 있는 유선사. 그 주변 형세가 선인포전이라는 설이 있다.
이 영주산의 뒤쪽 산세는 전체적으로 선인포전(仙人布氈: 신선이 자리를 까는 형국. 선인포전(仙人鋪氈)이라고도 함)의 형세를 이루고 있으며, 그 혈처가 ‘삼십육대장상지지 삼성인당대출(三十六代 將相之地 三聖人當代出: 정승과 장군이 36대 동안 이어지고 세 성인이 당대에 나옴)’의 대혈이라 하여06 예로부터 이를 찾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현재 이 산 서쪽 자락은 무덤이 빼곡이 들어차 있다. 선인포전형의 정확한 혈처는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으나, 영주산 서쪽 아래 진선(鎭仙)마을 근처에 있다는 설07과 영주산 서북쪽 자락 정상 부근에 위치한 유선사(遊仙寺)에 있다는 설08이 있다.
또 영주산의 남쪽 기슭에는 ‘선인좌부(仙人坐部)’라는 터가 있는데, 이곳은 문천무만(文千武萬) 장상부절지지(將相不絶之地), 곧 문무대관이 수없이 나오고 장수와 정승이 끊이지 않는다는 호남 제일의 명당이라고 한다.09
영주산에서 동쪽으로 솟아 있는 산은 해발 257m 높이의 망제봉(望帝峰)10이다. 망제봉으로부터 북쪽으로 산줄기가 기복연면(起伏連綿)11하여 동죽산(東竹山, 223m)과 매봉(114m)12을 이루고, 그 산줄기의 끝에 시루산이 있다.
시루산 북쪽 끝자락 동쪽 들에 객망리가 있고 그 아래쪽에는 필동(筆洞)이 있는데, 지금 필동에는 두서너 가구밖에 살지 않는다. 필동 앞에는 농사를 짓기 위해 물을 대어놓은 객망제(客望堤)가 있고, 그 남쪽으로는 등(燈)판재라는 작은 고개가 있다. 등판재는 등잔재라고도 불리며 그 주변 지세가 선인독서혈(仙人讀書穴)이어서 책을 읽는 신선을 위하여 등잔(燈盞)을 켠다는 의미에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13
이 고개를 넘으면 바로 연촌(硯村)마을인데, 지형이 베루(벼루)같이 생겼다고 하여 ‘베루물’이라고 불린다. 그곳에서 남쪽으로 더 내려오면 두지(斗池)마을이 있다.
『정읍시사』에 따르면 이 마을 앞에 ‘강동모탱이’가 있다고 한다.14 덕천면사무소에 근무하는 나이 지긋한 한 공무원에 따르면, 두지마을 앞의 굽은 도로를 ‘모탱이(모퉁이의 방언)’라고 부른다는 이야기를 자신의 할아버지에게 직접 들었다고 한다. 또 그 모탱이 앞으로는 정읍천(井邑川)이 흐르는데 옛날에는 수심이 깊어 서해안의 배가 이곳까지 드나들었고, 정읍천 주변은 제법 큰 모래밭이어서 사람이 살 수 있는 환경은 아니었다고 한다. 지금은 그 모래밭에 몇 개의 공장들(정읍 지방산업단지)이 들어서 있다. 『전경』에 기록되어 있는 ‘강동(講洞)’이 이곳이라고 단정짓기는 아직 어려우나, 어쨌든 강동이 이 근처일 가능성은 매우 커 보인다.
▲ 강동 모탱이. 좌로 굽은 도로 끝 모퉁이를 돌면 좌측에 공업단지가 있다
두지마을의 서쪽이자 매봉 남쪽 자락에는 시목동(枾木洞)이라는 마을이 있다. 현재도 수십 가구가 모여 사는 이 마을은 옛날부터 감나무가 많다고 하여 ‘감남기’라고 불렸던 곳이다. 지금은 이곳 시목동과 주변의 용전리(龍田里), 배장리(拜將里)를 합쳐 용전마을이라고 부른다.
시목동 뒷산은 매봉이며, 매봉 산자락을 따라 동북쪽으로 가면 배장(拜將)마을이 있고, 배장마을 뒷산 골짜기가 매봉과 시루산 사이에 있는 배장골[拜將谷]이다. 배장마을 뒷산에는 장군대좌혈(將軍大坐穴)이 있기 때문에 ‘배장(拜將)’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고 한다.
배장골에서 동북쪽에 있는 작은 산줄기를 하나 넘으면 골짜기가 하나 있는데 이곳이 유왕골[留王谷]이다. 지금은 이 골짜기 사이에 신작도로가 건설되고 있다. 유왕골에서 동쪽으로 시루산 등성이를 넘어가면 다시 객망리(客望里)가 나온다. 이 객망리 앞에 펼쳐진 넓은 평야가 기름들[油野]이며 객망리와 기름들 사이에 나 있는 길 북쪽에 덕천(德川) 사거리가 있다. 이 사거리에서 북쪽 방향 즉 이평(梨坪)으로 가는 고갯길을 넘으면 바로 우측 언덕 너머로 부정리(扶鼎里)가 있다. 부정리는 마을이 가마솥을 엎어놓은 것 같은 형태라 하여 붙은 이름인데, 지금은 마을이 없어지고 논밭만이 남아있어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부정리에서 서쪽 옆 도로 맞은편에 있는 골짜기가 좃바골 혹은 덧밧골이라고도 불리는 쪽박골이며, 골짜기의 형태가 와우형(臥牛形)이라고 알려져 있다.
▲ 덕천 사거리. 약간 좌측에 있는 산이 시루산이며, 그 산 밑자락에 신송마을이 있다.
신송마을은 선인독서혈같은 명당이 있는 자리라고 해도 그 주변에 화려하거나 뛰어난 절경(絶景)을 찾아보기 어려운, 그저 평범하고 조그마한 시골마을이다. 세상을 구원하실 하느님께서 인간으로 탄강하신 자리가 이런 곳이라는 사실은 약간의 의아심을 자아내게 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신송마을 주변을 찬찬히 살펴보면, 마을 앞으로는 풍성하고 여유로운 넓은 들판이 펼쳐져 있고, 뒤로는 아늑하고 부드러운 산이 자리하고 있어 평화스럽고 따뜻한 분위기가 물씬 풍기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구천의 하느님께서는 신성·불·보살의 하소연을 들어주시는 분이시며 또한 온 우주에 사무친 신명과 인류의 처절한 원(冤)을 다 이해하고 풀어주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상제님께서는 감히 우리가 도저히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무서운 분이 아니라, 어머니의 품속처럼 따뜻한 분이심에 틀림없다. 따라서 봄, 여름에는 넓은 들판에서 파릇파릇한 싹이 고개를 내밀며 기지개를 힘차게 켜고, 가을에는 풍성한 결실을 알리는 벼가 바람에 일렁이며, 겨울에는 온통 백색의 눈밭이 인간의 때 묻은 마음을 씻겨주는 곳! 뒤로는 높고 험준한 산이 아니라 한없는 안락함과 평화를 간직한 시루산이 있는 바로 이곳 신송마을이야말로 세상의 고통을 치유하시고 새 시대를 여실 하느님의 탄강지로 전혀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01 현재의 전라북도 정읍시(井邑市) 덕천면(德川面) 신월리(新月里) 신송(新松)마을이다.
02 정읍시사편찬위원회, 『井邑市史』, 신아출판사, 2003, p.128 / 최창조, 『한국의 자생 풍수』 2, 1997, p.440 참고.
03 『열자(列子)』에 의하면 발해(渤海)의 동쪽 수억만 리 저쪽에 오신산(五神山)이 있는데, 그 높이는 각각 3만 리이며 금옥(金玉)으로 지은 누각(樓閣)이 늘어서 있고, 주옥(珠玉)으로 된 나무가 우거져 있으며, 그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불로불사(不老不死)한다고 한다. 오신산은 원래 큰 거북의 등에 업혀 있었다가, 뒤에 두 개의 산은 흘러가 버리고 삼신산만 남았다고 한다. 삼신산이라는 말은 여기에서 유래하였다고 알려져 있으며, ‘삼신산이 세 개의 산이 아니라 하나의 산을 말하며 그것은 백두산’이라는 또 다른 주장도 있다.
04 1000미터도 안 되는 700여 미터의 산을 높다고 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하지만 방등산은 평지에 우뚝 솟아있기 때문에 크고 웅장하게 보여 사람들로 하여금 신령스러움을 자아내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근처에 있으면서 신산(神山)으로 여겨지는 지리산(방장산)의 이름을 따서 방장산이라고 불리게 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05 김기빈, 『한국건설산업연구원 건설저널』 35호, 2004, p.49
06 고창문화원 이기화 원장의 증언. http://jechoroba.com/bbs/view.php?id=nCourse&no=139 참고
07 정읍시사편찬위원회, 『井邑市史』, 신아출판사, 2003, p.106
08 최창조, 『한국의 자생풍수』 2, 민음사, 1997, pp.438∼439.
09 각주 6 참고
10 망제봉은 산 전체가 거대한 왕관을 쓰고 있는 모습이며 산 중턱에 제자두건형(帝字頭巾形)의 명당이 있다고 한다.(최창조, 『한국의 자생풍수』 2, 민음사, 1997, p.440 참고)
11 지세(地勢)가 높았다 낮았다 하면서 끊이지 않고 계속하여 잇닿아 있음.
12 산이 매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13 최창조, 『한국의 자생풍수』 2, 민음사, 1997, p.440 참고
14 말두(斗)자와 못지(池)자를 써서 두지마을이라고 이름을 하였다고 한다. 「강동모탱이」는 마을 앞에 있으며, 상정평(上井坪)은 이 모탱이 끝에 있는 들이다.(정읍시사편찬위원회, 『井邑市史』, 신아출판사, 2003, p.131)
<대순회보 7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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