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제님진주 강씨 문중(門中)의 계보(系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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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07.12 조회5,616회 댓글0건본문
지금으로부터 136년 전, 천상의 구천대원조화주신(九天大元造化主神)으로 계시던 상제님께서 비겁(否劫)에 쌓인 신명과 재겁(災劫)에 빠진 세계 창생을 건지시기 위하여 인세(人世)에 강림(降臨)하셨음은 주지(周知)의 사실이다. 그때 상제님께서 잠시 인간의 몸[人身]을 의탁하신 곳은 전라도 고부에 있는 한 진주 강씨 집안이었다.
강성(姜姓)은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성
진(晉)나라 황보밀(皇甫謐, 215∼282)이 서술한 『제왕세기(帝王世紀)』에 따르면, 강씨는 염제신농씨가 그 시조이며 인류 최초의 성(姓)인 태호복희씨의 풍성(風姓) 다음으로 출현한 성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세상에 성으로는 풍(風)성이 먼저 있었으나 전하여 오지 못하고 다만 풍채(風采)·풍신(風身) ·풍골(風骨) 등으로 몸의 생김새의 칭호만으로 남아올 뿐이오. 그 다음은 강(姜)성이 나왔으니 곧 성의 원시(元始)가 되느니라. 그러므로 개벽시대를 당하여 원시반본이 되므로 강(姜)성이 일을 맡게 되었느니라.”(행록 4장 17절)고 하신 상제님의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풍성은 전해오지 않기 때문에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성은 강성이 되며 개벽시대에는 근본으로 다시 돌아가는 원시반본(原始返本)의 이치에 의해 상제님께서는 인세(人世)에 오실 때 강씨가(姜氏家)를 택하시게 된 것이다.
강씨의 시조, 염제신농씨
강씨의 시조인 염제신농씨(炎帝神農氏)는 상고시대(上古時代)의 성군(聖君)들인 삼황(三皇: 태호복희씨, 염제신농씨, 황제헌원씨) 중 한 분이다. 『진주 강씨 대동보(大同譜)』에는 신농씨가 약 5000여 년 전인 서기전 3218년 4월 16일에 천수(天水: 지금의 감숙성 위천현)에서 태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날은 중국에서 ‘신농선제만세일(神農先帝萬歲日)’이라 하여 신농씨에게 제사지내는 날이기도 하다. 신농씨는 강수(姜水: 지금의 섬서성 기산현)로 옮겨와 이곳에서 유년시절을 보냈고, 이로부터 ‘강(姜)’을 성으로 삼았다고 전해진다.
신농씨는 태호복희씨가 창안한 팔괘(八卦)를 이용하여 육십사효(六十四爻)의 점(占)을 보는 점술을 고안해 냈을 뿐만 아니라, 오현금(五鉉琴)을 만들어 음악을 일으키고 저자(시장)를 통해 백성들이 교역하도록 가르쳤다고 한다. 특히 쟁기와 보습 등의 농기구를 발명함으로써 농경을 획기적으로 발전시켰고 또한 각종 풀들의 약성(藥性)을 밝혀 백성들을 구제하였으므로 지금까지도 농업과 의약의 창시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01 염제신농씨는 약초를 찾기 위하여 온갖 풀들을 다 먹어보았는데, 전설에 따르면 극독이 있는 단장초(斷腸草)를 맛보다가 중독되어 손도 쓰지 못한 채 장이 끊어져 죽었다고 한다.02 이처럼 인류 역사에 많은 치적을 남긴 신농씨는 백성들의 고통을 구제하기 위해 ‘자기희생(自己犧牲)’을 몸소 실천한 성군이었다.
그로부터 약 900년 정도가 지나면 요순시대이다. 이 무렵 염제신농씨의 한 자손03이 사악(四嶽: 임금이 나라 안을 다니며 두루 살피는 일을 보좌하는 벼슬)이 되어 우(禹)의 치산치수(治山治水)를 도와 큰 공을 세움으로써, 여(呂: 지금의 하남성 남양시 서쪽)와 신(申: 지금의 하남성 남양시) 땅에 제후로 봉해졌다. 그 이후로 강씨가(姜氏家)는 크게 번성하기 시작하였다.
▲ 옛날 한의원에 붙였던 신농유업(神農遺業: 신농씨가 후세에 전해준 업적) 문패<한국 민속촌 소재>
3100년 전에 강태공은 부국강병의 술법을 내고 신명을 땅에 봉안해
지금으로부터 3100년 전인 상(商) 왕조 말기에는 강씨가에 한 위인(偉人)이 출현했으니 그는 곧 강태공(姜太公)이다. 강태공은 본명이 ‘강상(姜尙)’이나 옛날 그의 선조가 여(呂) 땅에 제후로 봉해졌으므로 대개 ‘여상(呂尙)’이라고 불린다.
강태공은 나이 72세 때 위수(渭水: 지금의 섬서성 보계현 번계)에서 낚시를 하다가 제후국인 주(周)나라의 문왕을 만나 그의 스승이 되었다. 그리고 부국강병의 술법04으로 주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어 폭정을 일삼던 천자국 상나라의 폭군 주왕(紂王)을 물리치는 데 성공하였다.
또한 강태공은 365신명(神明)을 땅에 봉안함으로써 신봉어지(神封於地)의 시대를 열었다. 강태공이 신명을 땅에 봉했다는 사실은 역사에 기록되지는 않았으나 구전(口傳)을 통한 전설로는 끊임없이 전해져 내려왔고, 명나라 때는 이것을 주제로 한 『봉신연의(封神演義)』05라는 소설이 나오기에 이른다. 강태공이 신봉어지(神封於地)한 사실이 현재 전설과 소설로만 전해지고 역사 기록으로 제대로 남겨지지 못한 이유는 역사 기록에 관여했던 주 계층이 유학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즉 신명을 땅에 봉한다는 ‘신(神)들의 이야기’는, 철저히 눈에 보이는 세계에만 치중하는 유학자들의 가치 기준과는 동떨어진 것이었으므로 기록 대상에서 제외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한편 큰 업적을 이룬 강태공은 지금의 산동성 지역인 제(齊)나라를 봉지(封地)로 받아 그곳의 제후가 되었다. 그는 이곳에서도 농업·어업·상업을 일으켜 제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었다. 강태공의 후손들도 대대로 제나라를 잘 다스렸는데, 그 중에서도 환공[桓公, 기원전 685~643년 재위. 이름은 강소백(姜小白)]은 명재상 관중(管仲)과 함께 제나라를 강국(强國)으로 만들어 춘추시대의 첫 번째 패자(覇者)가 되기도 하였다.
강씨들의 천수 이주와 강이식의 등장
그러나 기원전 386년 제나라 강공[康公, 이름은 강대(姜貸)] 때에 이르면 전씨(田氏)들에 의해 나라를 찬탈 당하게 되고, 이에 따라 강씨들은 전씨들로부터의 화를 피하여 전국으로 뿔뿔이 흩어져야만 했다. 중국의 동쪽인 산동을 떠나 방랑하던 강씨들 중 일부는 유방이 한(漢)나라를 건국할 즈음인 기원전 2세기 무렵, 중국의 서쪽인 천수(天水)에 정착하기에 이른다. 앞서 언급한 대로 천수는 염제신농씨가 태어난 곳이다. 이로부터 약 700여 년이 더 지나면 이곳 천수에서 강이식(姜以式)이라는 분이 나타나게 된다. 그는 양견(楊堅: 수 문제)을 도와 당시 남북조로 갈라져 있던 중국을 통일하고 수(隋)나라를 건국하는 데 많은 공을 세운 인물이다.
이 사실은 812년에 당나라의 임보(林寶)가 지은 『원화성찬(元和姓纂)』의 ‘生太公封齊爲田和所滅子孫分散…因天水上縣漢初以豪族徙關中遂居天水[강태공은 제나라의 제후가 되었고, 전화(田和)에 의해 제위를 찬탈 당하자 그 자손들은 흩어졌다. … 자손들은 천수(天水)의 규현(縣)에 몸을 의지하였다가 한나라 초기에 호족으로서 관중으로 이주하였으나 결국은 천수에 정착하였다]’라는 기록과 강익문(姜翼文, 1568~1648)06의 문집인 『당암집(戇庵集)』07에 ‘公天水縣人其先本山東豪族系出齊康公漢太祖時移于天水縣[공(강이식)은 천수현 사람이다. 그 조상은 본래 산동의 호족이었는데 제나라 강공의 후예였으며 한나라 유방 때 천수현으로 옮겨와 살았다]’라는 기록, 그리고 중국 『광동 강씨보(廣東姜氏譜)』의 ‘公佐太祖以定天下後煬帝簒位公以退野[공(강이식)이 태조(수나라 문제)를 도와 중국 천하를 안정시켰으나 (태조의 아들인) 양제가 제위를 찬탈하자 벼슬에서 물러났다]’라는 기록을 종합하면 확인할 수 있다.
강이식은 진주 강씨의 시조
『전경』에 ‘강씨는 상고 신농씨로부터 시작되고… 우리나라에 건너온 시조는 이식이니…’(행록 1장 1절)라고 하였듯이, 강이식은 수나라 때 우리나라로 건너와 진주 강씨의 시조가 된 분이다. 이 사실을 증명해주는 자료는 몇 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서 중요한 것은 최산두(崔山斗, 1483~1536)가 지은 「대사간 서계공 휘 렬(姜烈, 1400~1465, 조선 문종 때 판중추원사를 지냄) 행록」의 ‘遠祖姜以式爲隋元帥伐高句麗因留東國(첫 조상은 강이식이니 수나라 원수가 되어 고구려를 치고 그대로 머물렀다)’라는 기록이다.
초계 최씨(草溪 崔氏)의 시조인 최산두는 사인(舍人)08 벼슬을 지낸 분으로서 문장이 뛰어나 ‘호남의 삼걸’로 알려졌던 분이다. 이 분이 「서계공 행록」을 언제 지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대략 그 시기가 1500년대 초기일 것은 확실하다. 「서계공 행록」은 『진주 강씨 대동보(大同譜)』에도 실려 있으며, 현재 전해지는 강이식 관련 문헌들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라는 점에서 강이식이 수나라 때 우리나라로 귀화하였음을 입증해주는 중요한 사료라 하겠다.
또한 예조참의를 지낸 남양희(南梁喜)가 1559년에 찬한 「서계공 묘비문」09 에도 ‘晉陽姜氏自隋元帥諱以式出留東方世有名德赫赫於羅麗至我[진양(=진주의 옛 이름) 강씨는 수나라 원수 이식이 나타나 동방에 머물면서 그 후손들이 신라와 고려를 거쳐 지금까지 대대로 이름나고 덕망이 혁혁한 집안이다]’라는 기록이 있으며, 『당암집(戇庵集)』에도 ‘姜氏貫慶尙道晉州郡隋煬帝時元帥公始出東國奠于晉陽(강씨의 본관은 경상도 진주이니, 수나라 양제 때 원수공(강이식)께서 처음 동국에 나오셔서 진양(진주)에 자리를 잡았다)’라고 하여 위 사실을 확인시켜주고 있다.10
그런데 우리나라 강씨 족보 가운데 가장 오래되었다는 『숙종 을축년보』(1685년 간행, 남한보라고도 함)에는 강이식에 대해서 ‘始祖姜以式隋煬帝伐高句麗時爲兵馬元帥以禦隋師或云以隋元帥知隋將亂仍留不返未知孰是(시조는 강이식이니, 수나라 양제가 고구려를 침략할 때 병마원수가 되어서 수나라 군대를 막았다고 하고, 혹은 수나라 원수로서 수나라가 장차 어지러워질 것을 알고 이로 인하여 돌아가지 않았다고 하니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 없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또 『당암집』에도 이와 동일하게 ‘隋煬帝伐高句麗時爲兵馬元帥以禦隋將帥或云以隋元帥知隋將亂仍留不返云未知孰是’11라고 적혀 있다. 즉 강이식이 고구려의 병마원수인지 아니면 수나라의 원수인지 알 수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엇갈리는 두 가지의 서술을 확인해보기 위해서는 강이식이 활동하던 당시의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신채호는 임유관 전투를 승리로 이끈 고구려 군의 장수가 강이식이라고 주장
강이식이 살았던 때는 고구려와 수(隋)나라 간에 치열한 전쟁이 벌어지던 시기였다. 남북조 시대를 종식시키고 중국을 통일한 수 문제가 동북아의 최강자 고구려마저 굴복시키기 위하여 침략전쟁을 일으켰고[598년: 임유관(臨關) 전투], 뒤이어 양제도 세 차례에 걸쳐 고구려를 침입(612년 살수대첩, 613년, 614년)하였던 것이다. 물론 이 전쟁들은 모두 고구려의 승리로 끝났으며 그 결과 수나라는 급속히 쇠망의 길을 걸어야만 하였다.
총 네 차례에 걸친 고구려·수나라 간의 전쟁에서 2·3·4차 전쟁은 비교적 그 내용이 잘 알려져 있는 편이나 1차 전쟁은 거의 역사에 전해지는 것이 없다. 다만 『수서(隋書)』와 『삼국사기』에, 수나라의 대군 30만 명이 고구려로 쳐들어갔으나 태풍·장마·홍수 등 자연 재해로 80~90%의 병사가 죽었다는 내용만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그러나 현대 역사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임유관에서 수 개월에 걸친 전투가 있었고, 이 전투 끝에 수나라 대군 30만 명이 거의 전멸당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라고 한다. 특히 동국대학교 윤명철 교수와 부경대학교 변희룡 교수는 당시의 기후와 해양 환경을 분석하는 과학적인 방법을 통해 수나라의 군대가 태풍이나 장마의 영향을 별로 받지 않았고 이 자연 재해 이후에도 수개월간의 전투가 더 벌어졌음을 밝힘으로써, 수나라의 30만 대군은 고구려 군과의 전투에 의해 거의 궤멸되었음을 입증하였다.12
임유관 전투를 승리로 이끈 고구려 군 최고 지휘관의 이름은 오랜 세월 동안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대략 70여 년 전에 민족사학자인 신채호(申采浩, 1880~1936)가 임유관 승리의 주역이 바로 강이식이라는 주장을 편 적이 있었다. 그가 저술한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에 따르면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의 문제가 고구려에 모욕적인 국서(國書)를 보내오자 강이식이 “이같이 오만무례한 글은 붓으로 회답할 것이 아니요 칼로 회답할 것입니다.”하고 곧 개전(開戰)을 주장하였다. 이에 고구려 영양왕이 그의 말을 좇아 강이식을 병마원수(兵馬元帥)로 삼아서 정병 5만을 거느리고 임유관에서 적과 싸우게 했다’는 것이다.
신채호는 『대동운해』와 『서곽잡록』의 기록을 그 근거로 내세웠지만, 현재 이 책들은 전해지지 않아 확인할 길이 없다. 학자들에 따르면 이 책들은 중국이 아닌 우리나라에서 저술되었을 것이며 정사는 아니고 야사일 것이라는 추정만이 가능하다고 한다.
그런데 최근 들어서 어떤 이유에서인지 명확한 검증이 생략된 채 신채호의 주장은 그냥 정설로 굳어져버렸고 이에 따라 고등학교 역사 부도(2002년 판)에 강이식이 임유관 전투를 승리로 이끈 고구려의 명장이라고 소개가 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전경』에는 ‘…진주 강씨(晋州姜氏)는 중국(中國) 수 양제(隋煬帝) 때에 우리나라에 건너 오니라’(행록 1장 1절)고 하였으므로, 진주 강씨의 시조인 강이식이 수 양제의 아버지인 수 문제 때 고구려 군의 장수로 임유관에서 수나라와 맞서 싸울 수는 없는 일이다.
문헌을 검토해보면 강이식은 임유관에서 고구려 군의 장수로 참전할 수 없어
실제로 현재 전하는 문헌들을 검토해보면 강이식이 고구려의 병마원수로서 임유관에서 수 문제와 싸웠다고 보기는 어렵다. 앞서 언급한 대로 「서계공 행록」과 「서계공 묘비문」, 『당암집(戇庵集)』에 강이식이 수 문제의 아들인 양제 때 수나라 병마원수로서 고구려를 치기 위해 왔었다가 돌아가지 않고 그대로 고구려에 머물렀다고 기록되어 있는 점을 상기해보면, 수나라의 네 차례 고구려 침입 중에서 첫 번째 침입인 임유관 전투(수 문제의 고구려 침공) 때 강이식이 고구려의 지휘관으로서 수나라와 싸울 수는 결코 없는 것이다.13
강이식은 수 양제 때 고구려로 귀화하여 수나라와 맞서 싸워
강이식은 임유관 전투 승리의 주역은 아니었지만 수나라에서 귀화하여 고구려의 장수가 된 후에는 수나라에 맞서 싸웠다. 이것은 조선 선조 때의 학자인 권문해(權文海)가 89년에 편찬한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에 ‘高句麗時姜以式爲兵馬元帥以禦隋師(고구려 때 강이식은 병마원수로 수나라의 군대를 물리쳤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과 강이식의 묘가 고구려 군영 안에 조성되어 있었다는 사실로 충분히 증명이 가능하다.
그의 묘가 있다고 알려진 마을은 ‘중국 요녕성 무순시 장당향 고려영자촌 원수림’인데14 고려영이란 고구려 군영이라는 뜻이고, 원수림이라는 명칭은 묘하게도 강이식의 직책인 병마원수와 일치하고 있다. 현재 강이식의 묘소는 중국에 의해 묘비가 파괴되는 등 심하게 훼손되어 누구의 묘인지 확인하기가 어려운 상태라고 한다.
하지만 1930년 강씨 문중에서 그곳을 방문했을 당시에는 묘비에 ‘고구려병마원수강공지총(高句麗兵馬元帥姜公之塚)’이라고 새겨져 있었다는 사실이 족보에 기록되어 전하고 있고, 또한 일제강점기 때 그곳의 보장(군수)이었던 강보환(姜寶煥)이 그 묘소가 강씨의 시조 묘라 하여 극진히 보살폈으며 죽을 때 묘를 부탁하는 편지까지 남겼다고 한다. 이런 정황에 따르면 강이식 장군의 묘는 고구려·수나라 간 접전 지역에서의 고구려 군영 안에 호화롭게 조성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것은 강이식이 수나라와의 전투에서 고구려군의 장수로 참전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유력한 증거로 여겨질 수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모든 논의를 종합해보면, 수 문제가 고구려를 침략하여 벌어진 임유관 전투에서는 강이식이 고구려 측 장수로 참전하지 않았고, 문제를 죽이고 왕이 된 양제가 고구려를 재차 침공하자 강이식은 수나라의 병마원수로서 고구려와의 전쟁에 참여하였던 것이며, 그 이후에 강이식은 고구려로 귀화하여 고구려의 병마원수로서 수나라의 공격을 막았던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숙종 을축년보』와 『당암집』에서는 강이식이 고구려의 병마원수인지 수나라의 병마원수인지 알 수 없다고 하였으나 사실 강이식은 수나라의 병마원수였다가 후에 고구려의 병마원수로 활동하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강씨가 진주를 본으로 삼게 된 것은 7대 손인 강진(姜縉) 때부터
강이식 이후로 우리나라에서는 강성(姜姓)이 번성하기 시작하였다.15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러 헌강왕(憲康王: 신라 제49대 왕) 때에 강이식의 7대 손인 강진(姜縉)이 태중대부 판내의금에 올라 정순공(正順公)의 시호를 받고 ‘진양후(晋陽侯)’에 오르자 이로부터 강씨가(姜氏家)는 본관을 경상도 진주(진양)로 삼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문헌상으로 전하는 강씨의 본관은 무려 114개나 되지만, 이들은 모두 진주 강씨에서 갈라져 나온 것이라 한다.
5대파 중에서 박사공파(博士公派)가 대종파
현재 진주 강씨가는 박사공파(博士公派)·소감공파(少監公派)·시중공파(侍中公派)·은열공파(殷烈公派)·인헌공파(仁憲公派) 등 크게 5개의 파로 뻗어나가 있으며, 이중 박사공파가 대종파(大宗派)로 전체 강씨 인구의 약 80%를 차지하고 있다.
박사공파는 진주 강씨 21대 손인 박사공 강계용(姜啓庸)을 시조로 하고 있다. 그는 고려 때 국자박사((國子博士: 現 국립대학 교수)를 지냈고 통신사의 서장관으로 일본을 다녀와 진산부원군(晋山府院君)에 봉해진 분이다. 한편 박사공파는 강계용의 손자인 강사첨(姜師瞻: 진주 강씨 23대 손)이 어사를 지냈다고 하여 어사공파(御史公派)로 불리기도 한다.
박사공파는 7대가 지나면 통계공파와 통정공파로 갈려
박사공파 7대 손은 강회중(姜淮仲: 진주 강씨 27대 손)이며 이 분은 통계공파(通溪公派)의 파시조(派始祖)가 된다. 한편 강회중의 형은 강회백(姜淮伯)이며 그는 통정공파(通亭公派)의 파시조이다.
강회중은 대제학(大提學: 지금의 문교부 장관)을 지낸 고려 말의 문신이다. 고려가 망한 뒤 조선 이씨왕조는 강회중에게 모두 네 차례에 걸쳐 관직을 내렸으나, 그는 충절을 지키기 위해 두문동(杜門洞)에 은거한 채 모두 거부하였다. 이에 따라 그는 태형(笞刑)을 당하고 귀양을 가야만 했다. 조선이 개국한지 15년이 지나자 강회중은 왕조에 구애받지 않고 오로지 백성들을 위해 헌신할 뜻을 세우고, 한성부윤·공조참판·경기도 및 충청도 관찰사 등을 두루 거치면서 몸도 돌보지 않은 채 힘쓰다가 결국 순직(殉職)하기에 이른다.
통계공파 3대 손인 강이온이 연산군에게 화를 입자 그 손자 강세의는 고부(古阜)로 낙향
강회중의 손자는 통계공파 3대 손(진주 강씨 29대 손)인 진천군 강이온(姜利溫)이다. 그는 도승지로 재직 중이던 연산 10년(1504)에 연산군이 집현전에서 놀이한 일을 직언하여 악정(惡政)을 바로 잡으려했다가, 왕을 능멸한 죄로 다음 해에 효수 당하는 참화를 입었다. 이 일로 해서 강씨 문중(門衆)은 박해를 받게 되어 결국 9명이 화를 입기에 이른다. 이에 강이온의 손자 강세의(姜世義, 1492~1547, 진주 강씨 31대 손)도 난을 피해 고부(古阜)로 낙향해야만 하였다.
상제님께서는 진주 강씨 43대 손의 인신(人身)으로 탄강
강세의로부터 6대를 내려온 진창(晋昌)·우창(愚昌)·응창(應昌) 삼형제도 계속 고부에서 살았으며, 종가인 진창 어른(진주 강씨 37대 손)부터 6대에 이르러 상제님께서 진주 강씨 43대 손(박사공파 23대 손, 통계공파 17대 손)의 인신(人身)을 빌려 탄강하시게 된다. 존휘는 일순(一淳), 자함은 사옥(士玉), 존호는 증산(甑山)이셨으며 때는 신미(辛未)년 9월 19일로서 단기 4204년, 서기 1871년 11월 1일의 일이었다. 상제님께서 탄강하시기까지의 강씨 문중의 계보(系譜)는 『진주 강씨 대동보(大同譜)』에서 찾아볼 수 있다.
▲ 상제님께서 人身으로 오신 진주 강씨 통계공파의 족보(『진주 강씨』 대동보에 수록)
01 신농씨(神農氏)가 농사와 의약을 천하에 펼쳤으되 세상 사람들은 그 공덕을 모르고 매약에 신농 유업(神農遺業)이라고만 써 붙이고…(예시 22절)
02 혹은 지네를 먹었는데 그것이 뱃속에서 많은 벌레로 변하여 결국 고통 속에서 죽어갔다고도 한다.
03 이름은 전해지지 않는다.
04 상제님께서는 “강태공(姜太公)이 부국강병의 술법을 천하에 내어놓아…”(예시 22절)라고 말씀하셨으며, 사마천의 『사기(史記)』에서도 “후세에 용병술과 권모(權謀)를 말하는 이들은 모두 태공을 그 주모자로 존숭하였다.”라고 전하고 있다.
05 『봉신방(封神榜)』 또는 『봉신방연의(封神榜演義)』라고도 불린다. 중국 명나라 때의 장편소설로서 육서성(陸西星) 또는 허중림(許仲琳)의 작품이라고 전하지만 분명하지 않다. 오늘날 『봉신연의』는 『서유기』, 『수호전』, 『삼국지연의』와 더불어 중국의 4대 소설로 꼽히고 있다.
06 조선 중기의 문인(文人)으로 예조좌랑·정언·헌납·지평 등을 역임하고 문학(文學)·장령·사간을 거쳐 제용감정(濟用監正: 왕실에 필요한 의복이나 식품 등을 관장한 정3품 벼슬)에 올랐다.
07 1848년에 간행되었다고 하나, 현재 규장각에 전하는 당암집은 1908년에 재편집되어 간행된 후필사본이다.
08 의정부에 둔 정4품관으로 사무를 정리하여 정승의 결재를 받아 육조의 관원에게 나누어주는 일을 맡아보았다.
09 이 묘비문은 최산두의 제자이자 강렬의 증손이던 강응규(1507∼1576)가 己未년(1559)에 남양희에게 의뢰하여 씌어졌다.
10 1985년에 완간된 『동아원색대백과사전』에 ‘강이식은 중국인 예부랑(禮部郞) 문성(文星)의 아들이다. 수나라 병마원수로 있을 때 정적의 모함으로 고구려에 귀화하였으며…’라는 내용이 있으나, 이에 대한 원천 근거 자료가 남아있지 않아 사실 여부는 확인하기 어려운 상태라고 한다.
11 글자 한 두 글자만 다를 뿐 『숙종 을축년보』와 거의 똑같다.
12 KBS1-TV 역사스페셜, 2003년 1월 25일 방영분(高隋전쟁 최대의 미스테리, 임유관 전투)
13 각종 문헌들에는 강이식이 수 양제 때 병마원수로서 우리나라로 왔다가 귀화하였다고 되어 있는데 반해, 중국 측 기록인 『광동 강씨보』에서는 강이식이 수 양제가 문제를 죽이고 제위를 찬탈하자 이에 벼슬에서 물러났다고 하여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당시의 상황을 따져보아 다음과 같은 추정이 가능하다. 우선 604년에 양광(楊廣)이 자신의 아버지 문제와 황태자인 형 양용(楊勇)을 죽이고 양제로 등극했을 때, 문제를 도와 중국을 통일했던 강이식으로서는 이런 정치적 참변이 달가웠을 리가 없었을 것이다. 또한 대운하와 궁궐 건설 등으로 많은 국고를 낭비하고 백성들의 생활을 힘들게 하는 양제의 통치 방식에 대해서도 많은 반감을 가졌을 것임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양제는 모든 국력을 동원하여 고구려를 침공하였고, 그간 벼슬에서 물러나 있었든지 혹은 계속 조정에 남아 있었든지 간에 어쨌든 강이식은 수나라의 병마원수로서 참전하였다가 고구려로 귀순하게 된다. 아마도 강이식으로서는,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패하고 아무런 소득도 거두지 못하면서도 무리하게 계속 전쟁을 도발하는 양제에게서 더 이상의 희망을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중국 측의 입장에서 보면, 나라를 건국한 공신(功臣)이자 병마원수 즉 군대 최고 지휘관이 전쟁터에서 적에게 귀순했다는 사실은 무척 치욕스러운 일이다. 그러므로 중국의 광동 강씨들은 그들의 족보에 강이식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그대로 기술하기는 어려워 강이식이 수 양제 때 초야에 묻혀 은거했다는 식으로 기록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14 살수대첩이 이루어진 곳이 현재는 청천강으로 알려져 있지만, 고려영자촌 바로 옆에도 살수대첩지로 추정되는 곳이 있다.
15 강씨는 조선시대만 놓고 보더라도 문과급제자 227명, 재상급 대신 5명, 대제학 1명, 청백리 7명을 낸 명문집안이다.
<대순회보 7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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