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전님도전님의 발자취를 찾아서 - 양평 용문산 용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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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11.12 조회5,718회 댓글0건본문
종단역사연구팀
1971년 7월에 도전님께서는 양평 용문사로 향하셨다. 그때 도전님을 모셨던 조○○ 선감은 도전님께서 열흘을 기한으로 공부하시기 위하여 들어가셨다고 기억하였다. 따라서 이번 답사는 양평 용문산 용문사의 지명을 밟아 가면서 용문사에 남아있는 도전님의 발자취를 찾아보고자 한다.
용문사는 경기도 양평군 지평면의 용문산 아래에 있다. 원래 양평이라는 지명은 양근(陽根)군과 지평(砥平)현으로 나누어진 지역을 1908년 이후 한 개의 군으로 통합하면서 붙여진 명칭이다.
여주도장을 출발하여 대신면을 거쳐 30km쯤 가다 보면 용문산 관광단지와 용문사가 자리한 지평면 신점리가 나온다. 지평면은 동쪽으로 양동면, 북쪽으로 단월면, 서북쪽으로 용문면, 서쪽으로 개군면과 접하고, 남쪽으로 여주시 북내면 및 대신면과 경계를 이룬다. 지평면에서 바라본 용문산의 정상과 백운봉은 양근면에서 바라본 산세와 정반대이다.
광주산맥의 일부인 용문산(龍門山: 1,157m)은 경기도에서 가평군에 있는 화악산, 명지산 그리고 국망봉 다음으로 높다. 용문산은 산세가 웅장하고 빼어나며, 골이 깊어서 예로부터 경기의 금강산으로 이름이 높았다. 그리고 북한강과 남한강이 산을 에워싼 채 흐르고 사방으로 뻗어 내린 산줄기에 계곡들이 깊으며 곳곳에 기암괴석 사이로 흐르는 시냇물이 절경을 이룬다.
용문산은 고서나 고지도에서 미지산(彌智山)이라고 불렀다. ‘미지’를 우리말 어원으로 풀어보면 ‘미르’, 곧 ‘용’이다. 승려들은 그 미지산에 대해 “용문산의 고승대덕들의 덕풍지광(德風智光)이 충만해 있었다”라고 하였다. 미지산이 용산(龍山)이 되지 않고 용문산으로 불리어지게 된 것은, 이 산 동남쪽에 자리한 용문사(龍門寺)때문이라고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에 기록되어 있다. 용문산은 곧 용문사라는 절 이름에서 유래한 산명이다.
용문사는 용문산 자락에 있고 용문사 은행나무가 유명해서인지 오래전부터 관광지로 조성되어 있다. 매표소를 지나 관광단지 공원을 쭉 걸어가면 용문사 입구인 일주문이 나온다. 일주문은 두 기둥이 용(龍)으로 조각되어 있고 “용문산 용문사(龍門山龍門寺)”라는 간판이 적혀 있다. 용이라는 동물은 중화문화권에서 신성시 여기는 상상의 동물이다. 특히, 용은 등용(登龍)이라 하여 어떤 관문을 들어선다는 뜻으로도 많이 쓰인다. ‘용이 드나드는 문’을 뜻하는 ‘용문’을 지명이나 사명(寺名)으로 쓰는 데는 무언가 이룰 수 있는 풍수지리적 조건을 갖춘 곳으로 여겼던 것 같다. 두 기둥을 용이 꿈틀거리며 휘감아 오르는 일주문은 용문사를 상징하고도 남는다.
녹음(綠陰)으로 물든 숲을 지나 계곡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너면 용문사 사찰 경내의 입구에 도달한다. 몇 년 전까지는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용문사 은행나무였다. 그런데 이제는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사천왕문이 앞을 막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사찰 경내에 들어가기 전에 절을 지키는 사천왕문이 있는 것이 통례이다. 그러나 용문사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천 년 넘은 은행나무가 사천왕문의 역할을 대신하는 것이었다. 천 년의 세월 동안 많은 전쟁과 화재가 있었으나 이 나무만은 화를 면했다고 한다. 그래서 용문사의 사천왕전(四天王殿)이 불탄 뒤부터는 이 나무를 천왕목(天王木)으로 삼고 있었다. 이 은행나무는 조선 세종 때 정삼품(正三品)보다 더 높은 당상직첩(堂上職牒)을 하사받은 나무였다. 그런데 지금은 사천왕전이 사찰 입구에 새롭게 들어서 있다.
양평 용문사 경내에 서 있는 천연기념물 제30호인 은행나무는 수령이 약 1,100여 년으로 추정되며 높이 41m, 둘레가 11m를 넘는다. 이 은행나무는 암나무이며 줄기 아랫부분에 큰 혹이 나 있는 것이 특징이다. 동양에서 가장 큰 은행나무이고 한국의 나무 중 가장 키가 크며 우람하고 당당한 위엄을 풍기는 대표적인 명목이라 할 수 있다.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敬順王, ?-978)의 세자 마의태자(麻衣太子)가 나라를 잃은 설움을 안고 금강산으로 가던 도중에 심은 것이라고도 하며, 신라의 고승 의상(義湘, 625-702) 대사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아 놓은 것이 뿌리가 내려 자란 것이라고도 한다.
마의태자의 한이 서려 있어서인가! 옛날 이 나무를 베고자 톱을 대었을 때 그 자리에서 피가 나오고 맑던 하늘이 흐려지면서 천둥이 쳤기 때문에 중지하였다는 이야기와 정미의병(丁未義兵, 1907)이 일어났을 때 일본군이 절을 불살라버렸으나 나무만은 타지 않았다는 이야기, 그리고 나라에 큰 이변이 생길 때마다 큰 소리를 낸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고종(高宗, 1852-1919)이 승하했을 때 커다란 가지 한 개가 부러졌고, 8·15광복, 6·25전쟁, 4·19의거, 5·16혁명 때도 이상한 소리가 났다고 전해진다.
도전님께서 공부하셨던 공부처는 정확하지 않지만, 바로 이 은행나무 뒤편에 있었다고 한다. 당시 김○○ 선감은 도전님을 모시기 위해 은행나무 뒤쪽에 방 2칸인 집을 지었다. 현재 은행나무 뒤 대웅전 마당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그 공부처로 추정된다. 그러나 현재는 은행나무 뒤로 높은 축대를 쌓고 흙을 메워서 건물을 새로 지었기 때문에 당시의 그 건물은 남아있지 않다. 당시 도전님을 모셨던 조 선감은 도전님께서 용문사에서 열흘 동안 공부를 하셨지만, 그 공부 내용은 알 수가 없었다고 한다. 후에 다른 임원과 용문사를 찾아 도전님의 공부처를 기록에 남기려 했지만, 그 자리는 모두 헐리고 사찰 건물만이 들어서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현재의 용문사에서는 도전님께서 공부하셨던 당시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고 단지, 용문사의 대표적 상징인 1,100년이 넘은 은행나무만이 그날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현재 도전님의 흔적은 남아있지 않지만, 우리는 당시 도전님께서 어떠한 심정을 가지고 용문사로 향하셨는지 생각해보았다.
1969년 수리사에서 49일 동안 공부를 마치신 도전님께서는 그해 4월 서울 중곡동에 도장 터를 마련하셨다. 1970년 1월 11일(음력 1969년 12월 4일)에는 본전을 지으시고 도주님 탄강치성을 모셨다. 아직 진영(眞影)을 모시지는 않았지만 중곡도장에 건물을 짓고 모시는 첫 치성이었다. 본전 건물은 3층 영대, 2층 봉강전, 1층 대순성전의 구조를 갖추었다. 공사가 계속 진행되어 1971년 5월, 드디어 도전님께서는 상제님, 도주님과 서가여래 진영을 모시고 중곡도장 영대 봉안치성을 모셨다. 그리고 나서 용문사로 출발하신 것으로 추정된다.
용문사는 신라 진덕여왕(眞德女王, ?-654) 때 원효대사(元曉大師, 617-686)가 창건하였고 진성여왕(眞聖女王, ?-897) 때 도선국사(道詵國師, 827-898)가 중창했다고 하나, 신라 선덕왕(宣德王, ?-785) 때 대경화상이 창건하였다는 설도 있다. 조선 초까지 왕실의 보호를 받던 용문사는 절집이 304칸이나 되고 300명이 넘는 승려들이 모일 만큼 번성했으나, 1907년 일제가 의병의 근거지라며 사찰을 불태워버렸다. 1909년 취운(翠雲) 스님이 작은 절집을 짓고 유지하다가 1938년 태욱 스님이 대웅전, 칠성각, 요사 등을 중건했지만, 6·25전쟁 때 다시 소실되고 일부 절집만 남은 것을 1982년부터 대웅전, 삼성각, 범종각, 지장전, 관음전, 요사채, 일주문, 다원 등을 새로 중건했다. 현재 불교 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인 봉선사(奉先寺)의 말사로 있다.
도전님께서 용문사에 오실 당시에는 사찰 규모가 그다지 크지 않았었다. 도전님께서는 김 선감이 지어놓은 2칸의 집에 나무로 처마를 달아 방 한 칸을 더 짓는다 하시면서 일꾼으로 조 선감만을 데리고 가셨다. 이튿날, 조 선감이 방 한 칸을 만들기 위하여 산에서 나무를 베어 내려오니 도전님께서 부르시면서 “그만해라. 집을 더 지어 뭐하겠니? 이 집은 임시이니까 놔둬라. 손볼 게 없다”라고 하셨다.
조 선감은 도전님께서 용문사에서 10일간 공부하신 내용은 모르나, 공부 중에 잠시 나오시는 모습을 보았다고 한다. 조 선감의 증언에 의하면, “도전님께서는 저녁 드시고 8시에 공부에 들어가시면, 4~5시간이 지난 새벽 1시까지 쉬시지도 않고 주문을 하셨어요. 그리고 한 번 앉으시면 화장실도 가지 않고 계속 공부를 하셨어요. 내가 바깥에 있으면 1시에 나오실 때도 있고 12시에도 나오셨지요.”라고 당시의 상황을 기억하였다.
또한, 조 선감은 용문사 총무에게 곤욕을 겪었던 일을 잊지 못한다. 여섯째 날, 도전님께서는 조선감을 부르셔서 “너 무슨 일이 있더라도 참아야 한다.”라고 다짐을 받으셨다. 그날따라 주지가 출타하고 없었기 때문에 그동안 불만을 품고 있던 절의 총무가 조 선감을 벼르고 있었다. 조 선감이 밤에 잠을 자려는데 절 총무가 별소리를 다해가며 싸우려고 했다. 도전님의 말씀을 따라 싸우지는 않았지만, 잠자리 없어서 받은 서러움으로 밤을 새웠다고 하였다. 아침에 그 사실을 들으신 도전님께서는 “나 걱정하지 말고 아침 먹고 나가라! 서울 도장으로 가라.”고 분부하셔서 조 선감은 도전님의 10일 공부를 마지막까지 모시지 못하고 나오게 되었다.
용문사 공부를 마치신 도전님께서는 그해 그 밖의 모든 것을 완비하시고 다음 해인 1972년 2월 15일(정월 초하루) 자시(子時)에 대순진리회 본부 현판식을 거행하시는 한편, 도의 체계를 정비하셨다. 이날 태극도의 임명체계에서 대순진리회 임명체계로 전환하는 대대적인 임원개편이 이루어진다. 또한, 내·외수 도인들과 임원들을 합석시키시고 대순진리회 창설 취지서와 회칙을 낭독하게 하시고 1972년을 포덕의 해로 공포(公布)하셨다. 3월에는 대순진리회의 포덕·교화·수도를 종단 기본사업으로, 구호자선사업·사회복지사업·교육사업을 종단의 3대 중요사업으로 삼으셨다.
도전님께서 행하신 용문사 열흘 공부의 의미는 알 수 없지만, 양평의 용문사는 나름대로 도전님께서 남기신 발자취로서 중요한 역사적 장소임은 분명하다. 단지 아쉬움이 남는다면 지금은 도전님께서 공부하셨던 공부 터를 추정만 할 수 있을 뿐, 당시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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