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전님서울 부암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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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11.12 조회5,714회 댓글0건본문
종단역사연구팀
1968년 6월 24일(양: 7월 19일) 구천상제님 화천치성 후 도전님께서는 종통계승자로서 태극도에서 10년 간 옥황상제님의 유업(遺業)을 마치시고 도수에 따라 감천도장을 이궁(離宮)하신다. 그리고 아미동 고개를 넘어 해운대, 경주, 대구를 거쳐 서울 부암동으로 올라오신다.
부암동은 도전님께서 감천도장에서 서울에 올라오셔서 처음 거주하신 곳이다. 따라서 이번 답사에서는 부암동과 도전님께서 거처하셨던 집과 그 주위를 살펴보면서 도전님의 발자취를 느껴보고자 한다.
우리 일행은 여주에서 출발하여 영동, 경부고속도로를 거쳐 남산터널을 지나 광화문 앞에 들어섰다. 광화문은 창건 당시 특별한 이름이 없이 궁제(宮制)에 따라 ‘오문(午門)’으로 부르다가, 태조 3년(1395) 정도전에 의해 ‘정문(正門)’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그러다 세종 8년(1426)에 경복궁을 수리하면서 집현전에서 ‘광화문(光化門)’으로 이름을 지어 올리면서 지금의 이름을 얻게 되었다.
현재의 광화문은 2010년에 복원된 건물이다. 1950년대 광화문은 1910년 조선총독부 건물을 지으면서 궁성의 동문인 건춘문 북쪽으로 옮겨졌으나 한국전쟁 때 폭격을 맞아 문루가 부서지고 석축은 탄흔투성이가 되었다. 1968년 12월에는 전통적인 광화문의 모습을 상실한 채 철근콘크리트 구조로 복원되었다. 그러다가 잃어버린 광화문의 원형을 복원하고자 2006년부터 광화문 철거작업을 시작해 3년 8개월의 복원 공사를 마치고 2010년 8월 15일 완료되었다.
도전님께서 1968년 10월 중순쯤 광화문 앞에 이르섰을 때는 아마도 공사가 한참 마무리 중이었을 것이다. 당시 광화문에서 부암동으로 가는 길은 자하문길 하나였다. 그 길은 현재의 자하문로 중간쯤의 청운효자동 주민센터 앞에서 현재의 창의문로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그런데 1986년에 청운동에서 부암동을 잇는 자하문터널이 뚫려서 이 길을 자하문로라 하였고 창의문을 통과하는 옛길은 창의문로라 하였다.
도전님께서 부암동으로 가실 때는 옛 자하문길을 통해서 가셨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옛 자하문길로 가기 위하여 자하문터널을 지나지 않고 창의문로를 이용하기로 하였다.
자하문[창의문]고개 입구에 이르자 왼쪽에 윤동주 문학관과 오른쪽에 최규식 경무관 동상이 눈에 들어왔다. 왼쪽의 윤동주 문학관은 2012년 개관했는데, 이곳에서는 윤동주 시인의 사진 자료와 친필원고, 시집, 당시에 발간된 문학잡지 등을 전시하고 있다. 오른쪽의 최규식 경무관 동상은 종로경찰서 재직 중이던 1968년 1·21 사태 시 무장 공비들이 청와대 바로 옆(현재 청운실버센터 앞)까지 이르렀을 때 그들을 막고 검문하다가 순직한 그를 추모하기 위해 세워졌다. 그리고 바로 위에 창의문(彰義門)이 있다.
창의문은 인왕산과 북악산이 만나는 곳에 있는 자하문고개에 있는 문이다. 서울 성곽은 동서남북에 사대문(四大門) 그리고 그 사이에 사소문(四小門)이 있다. 현재 창의문은 한양 도성 사소문 가운데 유일하게 조선시대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문이다. 창의문은 서대문과 북대문 사이의 북소문(北小門)으로 ‘올바른 것을 드러나게 하다’는 뜻이 있다. 또 창의문을 자하문(紫霞門)이라 한 것은 이 문 부근의 경치가 개경의 명승지인 자하동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창의문은 자하문이라는 별칭으로 더 많이 불린다. 이 자하문고개를 넘으면 도성 밖인 부암동이 나온다.
자하문고개를 넘으니 한양 도성 안과 밖의 풍경 차이를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인왕산과 북악산을 잇는 창의문 성곽 위에서 광화문 쪽을 바라보면 밀집된 도심의 빌딩 숲이 보이지만, 반대로 부암동 쪽을 바라보면 정면에는 북한산이 마주하고 좌측은 인왕산, 그리고 우측은 북악산이 감싸고 있어서 도심과는 사뭇 다른 풍경을 간직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부암동에는 왕족과 사대부들이 별장, 정자 등을 짓고 풍류를 즐긴 장소가 즐비했다. 격조 높은 별서(別墅)01 유적지인 백석동천(白石洞天), 흥선대원군의 석파정(石坡亭), 안평대군의 무계원(武溪園), 현진건 집터, 반계(磻溪) 윤웅렬(尹雄烈) 별서 등이 부암동에 운집해 있다.
부암동의 동명은 부암동 주민센터에서 세검정삼거리 쪽으로 내려가는 길가에 높이 2m의 부침바위로부터 유래되었다. 그런데 그 부침바위는 1970년경 ‘자하문길’을 넓히는 공사로 사라져 버렸다. 그래서 부암경로당 앞 길가에는 ‘부침바위 터’라는 안내 표지판만 남아 있었다. 그러다가 2007년 종로구에서는 세검정삼거리에서 부암동으로 들어가는 입구 분수대에 부암동의 유래와 관계된 부침바위를 형상화시켜 놓았다. 여기에는 재미있는 ‘부침바위’의 전설이 전해진다.
고려 중엽 몽고의 침입을 받아 많은 고려 장정이 몽고로 끌려갔는데 그중에는 신혼 초야를 지낸 신랑도 섞여있었다. 결혼한 지 하루 만에 생이별을 한 신부는 매일 소복 차림으로 부침바위에 와서 빌었다. 이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된 고려의 왕이 원나라 조정에 그 사실을 전하여 마침내 신랑이 돌아와 부부가 상봉하게 되었다. 소복을 입고 매일같이 기도할 때는 바위에 붙인 돌이 떨어졌는데, 신랑이 돌아온 뒤에는 붙인 돌이 그대로 있다 하여 사람들이 부침바위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 뒤부터 아들을 원하거나 잃어버린 자식을 찾으려는 부모들이 소원을 빌면서 부침바위에 돌을 붙였다고 한다.02
1968년 가을 중순쯤, 도전님께서는 옛 자하문길을 넘어서 부암동 김원섭의 집에 이르셨다. 김원섭의 집은 당시 도전님을 따르던 김영진 선감의 주선으로 마련되었다.
김원섭은 연천 방면 김영진 선감의 수반으로 서울에서 개인병원을 운영하다가 도문에 들어왔다. 입도 후에 그는 부암동 집을 팔지 않고 부산으로 내려와 감천도장에서 운영하는 감천의료원의 전문 양의사로 활동하고 있었다. 1968년 3월 당시 감천의료원은 개설 이래 전문 의사가 없어 매우 어렵게 운영하던 중 김원섭이 감천동으로 내려오게 됨으로써 그제야 병원다운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집의 위치는 부암동 주민센터 옆 골목에서 오르막길로 50~60m 올라가서 바로 우측에 있는 306-14번지이다. 지금은 재건축이 되어 다른 사람이 살고 있다. 도전님께서는 처음 집터를 보시고 “인왕산 밑 명당인데, 산 위에 군대만 없으면 참 좋은 곳인데”라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이곳은 뒤에 암산(巖山)인 인왕산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고, 앞쪽으로는 청와대 뒷산인 북악산이 바라다 보이며 오른쪽은 성벽, 왼쪽은 북한산이 자리한 명당이다. 또한, 김원섭 씨 집의 좌우에는 안평대군 및 흥선대원군과 관련된 문화재가 있다.
안평대군(安平大君, 1418~1453)의 무계원(武溪院)과 흥선대원군(1820~1898)의 석파정(石坡亭)은 이곳이 명당임을 다시 한번 말해주고 있다. 부암동 주민센터 앞 삼거리에서 왼쪽 골목으로 50m쯤 가면 바로 무계원이 나온다. 현재 무계원의 건물은 과거 종로구 익선동에 있었던 서울시 등록음식점 1호 업소로 1970~1980년대 요정 정치의 근거지였던 오진암(梧珍庵)의 건물 자재를 사용하여 지어졌다.
무계원이 위치한 ‘무계정사지’는 원래 조선 시대 세종의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이 세운 정자였다. 이곳은 안평대군이 꿈속에서 박팽년(朴彭年, 1417~1456) 등과 함께 노닐던 도원(桃園)을 당대 최고의 화가인 안견(安堅, ?~?)에게 그리게 하여 3일 만에 완성한 작품, 바로 ‘몽유도원도(夢遊桃園圖)’의 배경이 된 장소라 한다. 이 그림은 왼쪽의 현실 공간과 오른쪽의 도원 세계가 극적인 대비를 이루면서도 전체적으로는 통일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우리는 그 유명한 ‘몽유도원도’의 장소가 부암동이라는 사실에 새삼 놀랐다.
무계원 바로 위에는 근대문학 초기 단편소설의 양식을 개척한 소설가 현진건(玄鎭健, 1900~1943)의 집터가 있고, 그 안쪽에는 안평대군의 필적으로 알려진 ‘무계동(武溪洞)’ 이란 글씨가 큰 현판 모양으로 옆에 음각되어 있었다. 이 글씨는 현재의 무계원과 그 주변이 안평대군이 있던 무계정사의 터임을 알려주고 있다.
흥선대원군의 석파정 또한 명당에 위치한 정자로 유명하다. 부암동 주민센터 삼거리에서 우측 도로로 200m쯤 내려가다 보면 부암동 서울미술관 뒤에 석파정이 있다. 흥선대원군의 석파정은 서울에 있던 수많은 정자 중 아직도 그 모습이 크게 변하지 않은 몇몇 중 하나이다.
석파정은 원래 철종 때 영의정까지 지낸 김흥근(金興根, 1796~1870)의 별서였다. 그때는 집 뒤에 ‘삼계동(三溪洞)’이라고 새긴 커다란 바위가 있어서 ‘삼계동정사(三溪洞精舍)’로 불렸다 한다. 그러다가 대원군이 집권하면서 그의 소유가 되었으며 이름마저 석파정으로 바뀌었다. 그렇게 이름 붙인 까닭은 앞산이 모두 바위[石] 언덕[坡]이기 때문이며, ‘석파(石坡)’라는 대원군의 아호도 여기서 유래한 것이라 한다. 일설에는 석파정의 소유가 바뀔 때 대원군이 빼앗았다는 말이 전해지는데, 황현(黃玹, 1855~1910)의 『매천야록(梅泉野錄)』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전한다.
“김흥근은 북문 밖 삼계동에 별장이 있었는데, 장안의 으뜸가는 명원(名園)이었다. 대원군이 그 별장을 팔라고 하였으나 흥근은 거절했다. 대원군은 다시 청하길 ‘하루만 놀이에 빌려달라’고 했다. 그 무렵 별장이나 정자를 가진 사람은 남들이 놀이에 빌려달라고 하면 부득불 허락하는 것이 한양의 풍습이어서 흥근은 마지못해 허락했다. 대원군은 마침내 고종 임금께 한번 행차하기를 권해 모시고 갔다. 흥근은 임금께서 임했던 곳을 신하의 의리로는 감히 다시 쓸 수 없다 하여 다시는 삼계동에 가지 않았으므로 삼계동정사는 마침내 대원군의 소유가 되었다.”
대원군 이후 석파정은 왕실 후예들에게 차례로 대물림되다가 한국전쟁 이후로 가톨릭에서 운영하던 콜롬바고아원으로 사용되었고 지금은 개인 소유가 되었다. 현재는 입장료를 내야 하는 서울미술관을 통해서 들어갈 수 있다. 이런 문화재가 사유화되어 개방되지 않는 것이 약간의 아쉬움으로 남는다.
도전님께서 머무셨던 집 주위는 인왕산과 북악산, 그리고 북한산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고, 여러 고풍스러운 문화재가 즐비한 명당자리임이 틀림없는 것 같다. 도전님께서는 이곳에 오시자마자 바로 집수리를 하셨다. 그때 성남에서 사업하고 있던 김영진 선감의 수반이었던 조○○ 선감과 임○○ 선감이 함께 도전님을 모셨다. 부암동 집은 2층 양옥이었고 연탄을 난방으로 사용하였다. 당시 그들은 흙을 져다가 방바닥을 메워서 연탄가스가 새지 않도록 수리했다. 그리고 이곳에서 세 차례의 성을 모셨고 치성을 한 번 모셨다고 한다.
도전님께서는 부암동 김원섭의 집을 중심으로 자리를 잡으려 하셨다. 집터가 인왕산 밑의 명당이었기 때문에 도전님께서는 집을 개축해서 쓰시려고 한 달 동안 윤목수를 불러서 2층을 설계하셨다. 그리고 2층에 상제님 진영을 모시고 12월 4일 도주님 탄강치성을 모셨다. 이때 감천에서 의원 생활을 하던 집주인 김원섭 씨도 참석하였다. 그런데 그가 불경한 죄를 저지르자, 도전님께서는 “이 집이 아닌 것 같다” 하고 나오셨다. 그리고 잠시 부암동 여관에 머무시다가 경기도 군포시에 소재한 수리사(修理寺)로 들어가셨다.
도주님께서는 “태인에 가서 나를 찾으라”는 상제님의 계시를 받고 가시다가 태안반도에 내리시어 안면도에서 잠시 쉬어가셨다. 도전님께서는 “모든 것이 하느님의 계획 아래서 하느님의 계시와 지시로 인도됨을 알면 되는 것이다.”03라고 말씀하셨다. 이처럼 도전님께서도 감천도장에서 이궁하시어 서울 중곡동에 대순진리회를 창설하기까지 잠시 머무셨다 가신 곳이 부암동이었다.
부암동은 천장길방(天藏吉方)자리는 아니였지만, 서울 도심과 다른 자연스러운 멋과 많은 고풍스러운 문화재를 가지고 있는 명당자리임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당시 도전님의 발자취는 남아 있지 않지만 도전님께서 감천도장 이궁 이후 많은 어려움 속에 계실 때 부암동은 도전님께서 잠깐 머물다 가실 수 있는 충분한 공간적 역할을 담당했으리라 생각해 본다.
< 대순회보> 19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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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별장과 비슷하나 농사를 짓기 위해 지은 집.
02 네이버 지식백과, “부암동길과 부침바위”
03 「도전님 훈시」 (1989. 06.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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