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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주님함안 조씨 문중(門中)의 계보(系譜) 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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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07.23 조회6,11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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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천상제님으로부터 천부(天賦)의 종통계승 계시를 받으시고, 1909년부터 1958년까지 50년 공부 종필(工夫終畢)로써 도(道)의 법방(法方)을 물샐틈없이 짜 놓으신 분은 도주님이시다.

도주님께서는 구한말(舊韓末) 경상남도 함안군(咸安郡) 칠서면(漆西面) 회문리(會文里)에서 탄강하시었는데, 그때 잠시 인간의 몸[人身]을 의탁하신 곳은 함안(咸安) 조씨(趙氏)01 집안이었다.

 

 

 

 

조씨의 조상을 상고하면 전욱고양씨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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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씨의 조상을 멀리 상고(詳考)하여 보면 대략 4,600여 년 전의 오제(五帝) 중 한 분이었던 전욱고양씨( 頊高陽氏)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전욱은 황제헌원씨의 자손으로 약수(若水: 지금의 사천성 영경현 아롱강) 근처에서 태어났으며, 78년간 재위하다가 98세에 죽어서 돈구성(頓丘城) 밖 광양리(廣陽里: 지금의 하남성 복양현 서남)에 묻혔다고 알려져 있다. 전설에 따르면 그 시절에는 하늘과 땅이 가까웠고 그 사이에 통하는 길이 있어 신과 인간이 같이 지내고 있었는데, 전욱고양씨가 하늘과 땅의 간격을 크게 벌려 서로 왕래하는 길을 단절시켰다고 한다. 이로써 신은 이따금 인간세상으로 내려올 수 있다 하더라도 인간은 하늘로 오를 수 없게 되어, 드디어 신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는 분리되었다고 전해진다.

 

 

기원전 9세기 경, 주(周)나라 목왕(穆王) 때 조성(趙姓)을 가지게 됨

 

 

전욱의 후손 중에 여수(女修)라는 여인이 있었다. 어느 날 그녀는 베를 짜다 우연히 제비가 떨어뜨린 알을 먹고 잉태하여 한 사내아이를 낳았으니, 이분의 이름은 대업(大業)이다. 대업의 아들은 대비(大費)이고, 이분은 순(舜)을 도와 새와 짐승을 조련하였으며 우(禹)와 함께 물을 다스렸다고 한다. 그 후 수백 년이 지나서 주(周)나라 목왕(穆王: 기원전 976~922 재위) 때에 이르면 그 자손 중에 조보(造父)란 분이 나타난다.

 

 

조보는 여덟 필의 준마를 얻어 목왕에게 바치고 그의 마부가 되었다가 목왕의 서쪽지방 순수(巡狩: 임금이 나라 안을 두루 살피며 돌아다니던 일)에 참여하였다. 그때 서(徐)나라(지금의 강소성 사홍현 남쪽에 있었음)의 언왕(偃王)이 난을 일으키자 천리 길을 쉬지 않고 말을 몰아 목왕이 하루 만에 돌아오게 함으로써 난리 평정에 공을 세우게 되었다.02 목왕은 조보의 공을 높이 사서 그에게 조성(趙城)을 봉읍으로 하사하였다. 이때부터 조보의 가족들은 성(城)의 이름을 따서 모두 ‘조씨(趙氏)’로 불리게 되었으며, 조성(趙姓)은 이로부터 비롯되기 시작하였다.

 

 

기원전 403년 조적(趙籍)은 조(趙)나라를 세움

 

 

조보의 7대 후손은 조숙대(趙叔帶)이다. 이 분은 원래 천자국인 주나라의 유왕(幽王)을 섬겼으나, 유왕이 요녀(妖女) 포사에게 빠져 국정(國政)을 혼란에 빠뜨리자 주나라를 떠나 제후국 진(晉)나라로 가서 문후(文候)를 섬기기 시작하였다.

 

 

숙대로부터 5대 손은 조숙(趙夙)이며, 이 분은 진(晉)나라 헌공(獻公) 때 나라에 큰 공을 세워 경(耿)나라 땅(지금의 산서성 길현 남쪽)을 하사받았다. 이때부터 조씨 가문은 크게 일어나 융성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얼마 후 헌공의 애첩 여희(驪姬)가 자기의 아들 해제(奚齊)를 태자로 삼기 위해 음모를 꾸며 태자 신생(申生)을 자살하게 만든 뒤, 태자의 동생 중이(重耳)까지 죽이려고 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때 조숙의 손자인 조최(趙衰)는 중이를 모시고 도망가 열국(列國)을 돌며 망명 생활을 하게 되었다. 무려 19년의 세월 동안 조최는 중이를 모시고 다녔고 그 끝에 중이가 진(晉)나라의 문공(文公: 기원전 638~628 재위)으로 즉위할 수 있게 됨에 따라, 겨우 중이를 모시고 본국에 돌아올 수 있었다. 조최는 문공이 춘추오패(春秋五覇)03 중 한 명으로 우뚝 설 수 있도록 많은 공을 세웠고, 이에 따라 원(原: 지금의 하남성 제원현 서북쪽의 성(城))의 대부(大夫)가 되었다.

 

 

조최의 손자인 조삭(趙朔) 대에 이르면, 조씨 가문은 간신 도안고(屠岸賈)에 의하여 임금을 시해한 자의 자손이라는 누명을 쓰고04 멸족의 참화를 입게 된다. 당시 조삭의 부인이 임신한 채로 도망가 아들 조무(趙武)를 낳았기에 조씨 가문은 겨우 대를 이어갈 수 있었다. 조무는 장성하자마자 부친의 억울한 누명을 벗기고 도안고를 응징하였으며 조씨 가문을 다시 크게 일으켰다.

 

 

조무의 손자 조앙(趙 )은 진(晉)나라의 상경(上卿)이 되어 정권을 장악하였고, 조앙의 3대 손인 조적(趙籍)은 기원전 403년, 한(韓)·위(魏)씨들과 함께 진(晉)나라를 나누어 가진 뒤 조(趙)나라를 세우게 된다.

 

 

조나라는 산서성(山西城) 북동부와 중부, 하북성(河北城) 남서부 방면으로 영토를 확장하여 전국시대(기원전 475∼221) 칠웅(七雄)05의 하나로 성장하였다. 특히 무령왕(武靈王, 재위 기원전 326~299) 시대는 기마전법으로 주변 나라를 정복하여 많은 영토를 확장하던 조나라의 전성기였다. 그러나 그 아들 혜문왕(惠文王) 대에 이르면 강대한 진(秦)나라의 침공에 밀려 도읍을 진양(晉陽: 지금의 산서성 태원)에서 한단(邯鄲: 지금의 하북성 한단)으로 옮겨야만 하였다. 기원전 228년에는 진(秦)나라의 침략군에 의해 5만 명의 조나라 군사들이 전투에서 죽었고, 40만 명에 달하는 군사들은 진나라 군사들에게 포위되어 학살당하고 한단마저 함락되어 결국 조나라는 멸망의 비운을 맞이하게 된다. 이에 따라 조씨들은 전국 각지로 뿔뿔이 흩어져갔다.

 

 

함안 조씨의 시조는 후당 때 고려로 건너 온 충장공(忠壯公) 조정(趙鼎)

 

 

조나라가 망한 후 약 1,100년이 지나서 후당(後唐)06 때에, 중국 각지에 흩어져 있던 무령왕(武靈王)의 후손 중 조정(趙鼎)이라는 분이 있었다. 이분은 당시 혼란한 중국 정세를 피하여 두 동생 부(釜)와 당(當), 그리고 절강(浙江) 사람인 장길(張吉)과 함께 한반도로 건너왔다.

 

 

그 시절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의 왕건(王建)과 후백제의 견훤(甄萱)이 서로 자웅(雌雄)을 겨루고 있었다. 이때 조정(趙鼎)은 고려에 귀화하여 930년에 고창성(古昌城, 지금의 안동)에서 견훤을 대파하고 동경(東京: 지금의 경주)의 항복을 이끌어냄으로써 고려의 후삼국통일에 크게 공을 세우게 된다. 이에 왕건은 조정을 개국벽상공신(開國壁上功臣)으로 삼았고, 조정은 고려의 대장군 원윤(元尹)07을 지내며 충장공(忠壯公)의 시호(諡號)를 받았다. 그 후손들이 이 분을 시조로 하고 본관을 함안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나가니, 함안 조씨는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함안 조씨 10대 손 조열 선생은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에 은거함

 

 

함안 조씨 10대 손은 전서공(典書公) 조열(趙悅) 선생이다. 이 분이 공조전서(工曹典書)를 지내고 있을때인 고려 공양왕 3년, 이성계가 북방의 적을 토벌한다는 명목으로 원주에 진을 치는 일이 있었다. 조열 선생은 그가 반역을 일으킬 것을 미리 알고는 “이성계 부자(父子)가 원주에 진을 치고 말로는 적을 토벌한다고 하나 그 뜻은 혁명을 계획함이니 속히 그 병권을 회수하여 사직을 보존하소서.”라고 3일에 걸쳐 상소하였다. 그러나 왕은 이성계가 두려워 그 상소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오히려 조열 선생을 함안으로 쫓아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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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열 선생의 충절을 기린 신도비각(神道碑 閣). 경남 함안군 군북면 원북동 소재

 

 

불과 1년 뒤인 공양왕 4년(1392), 이성계가 공양왕을 폐하고 역성혁명으로 조선을 세웠다는 이야기가 전해지자 조열 선생은 길재(吉再, 1353~1419) 등과 더불어 두문동(杜門洞)08에 은거하여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였다. 조선 이씨 왕조는 선생에게 고려 시절 관직인 가선대부(嘉善大夫: 종2품) 공조전서의 벼슬을 내렸으나, 받지 않고 끝까지 충절(忠節)을 지켰다.

 

 

 

 

 

 

01『증보문헌비고』에 의하면 조씨(趙氏)는 210개의 본이 있다고 하였으나, 오늘날 계통이 자세히 전하는 본은 한양, 함안, 풍양, 배천, 옥천, 평양, 김제, 양주, 밀양, 순창 등 68개 정도이다. 이중 함안 조씨는 우리나라에서 한양 조씨 다음으로 번성한 조씨 가문이다.

02 이에 대한 다른 이설도 있다. 당시 천자였던 주나라의 목왕이 무력을 과시하기 위해, 섬서성(陝西城)과 산서성(山西城) 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부족인 견융(犬戎)을 토벌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견융은 제후가 지켜야 할 의무를 나름대로 다 하고 있던 중이었으므로 이 일은 견융으로서는 매우 억울한 것이었고, 이러한 목왕의 처사에 불만을 품은 많은 제후들은 주나라를 천자국으로 섬기지 않고 등을 돌리게 되었다. 그때 서 언왕이 인의(仁義)로써 나라를 다스리고 있었으므로, 인근의 제후 36개 나라가 서나라를 따르는 일이 생겼다. 주 목왕은 조보를 초(楚)나라에 사신으로 파견하여 서나라를 치도록 하였고, 서 언왕은 초나라의 공격에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서주(徐州) 팽성(彭城)으로 쫓겨 들어갔다는 것이다.

03 춘추전국시대에 제후(諸侯)들의 회맹(會盟)의 맹주(盟主)가 된 자를 패자라고 한다.『순자(荀子)』에 의하면 오패라 함은 제(齊)나라의 환공(桓公), 진(晉)나라의 문공(文公), 초(楚)나라의 장왕(莊王), 오(吳)나라의 왕 합려(闔閭), 월(越)나라의 왕 구천(勾踐)을 가리킨다.

04 조최의 아들이자 조삭의 아버지는 조순이었으며, 그때 진(晉)나라 제후는 영공(靈公)이었다. 영공은 덕이 없고 오만방자하였는데, 하루는 곰발바닥 요리가 잘 익지 않았다는 이유로 요리사를 죽이게 되었다. 영공은 조순이 이를 문제 삼을 것을 우려하여 그를 죽이려고 하였으므로, 조순은 급히 도망쳤다. 영공이 조순의 사촌인 조천(趙穿)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성공(成公)이 즉위하자, 조순은 다시 돌아와 국정을 이끌었다. 그러나 조순은 임금을 시해한 조천을 벌하지 않았기에 이에 대해 많은 비난을 들어야 했으며, 급기야는 군주를 시해한 주범으로까지 오해를 받기도 하였다. 조순이 죽은 후 간신 도안고는 진(晉)나라의 유력한 집안인 조씨를 없애기 위하여, 당시 임금인 경공에게 보고도 하지 않고 조순이 대역 죄인이라 누명 씌우고는 그의 아들 조삭 등 조씨 일가를 모두 처형했던 것이다.

05 전국시대 중국의 패권을 놓고 대립한 7대 강국. 동방의 제(齊), 남방의 초(楚), 서방의 진(秦), 북방의 연(燕), 그리고 중앙의 위(魏)·한(韓)·조(趙)나라를 가리키는 말이다. 춘추시대에는 독립된 소도시 국가가 100여 개나 산재하고 있었으나 중기 이후 농업생산력의 향상과 상업경제의 발달에 따라 강대한 영역국가가 형성되었다.‘칠웅’이란 이러한 강대국가를 일컫는 말로 각국은 더욱 부강한 국가로 발전하려고 내정의 충실과 군비의 확장에 진력하였다. 이중 진(秦)나라는 상앙(商 )의 변법(變法) 이후 국력이 신장하여 기원전 221년 천하를 통일하는 데 성공하였다.

06 923년~936년 중국에 존속한 왕조. 돌궐 사타부 출신의 이극용(李克用)이 당(唐)나라에 봉사(奉事)하며 황소(黃巢)의 난 진압에 공을 세워 895년 진왕(晉王)으로 훈봉(勳封)을 받았는데, 아들 이존욱(李存勖)은 923년 후량(後梁: 907~923)의 뒤를 이어 국호를 당(唐)이라 칭하고 낙양(洛陽)에 도읍하였다. 말제(末帝)에 이르러 거란과 결탁한 부장인 하동(河東) 절도사 석경당(石敬 ), 즉 후진(後晉)의 고조(高祖)에 의하여 4대 13년 만에 멸망하였다.

07 고려 초기에 십육 관계 가운데 십위에 해당하는 것으로, 왕건이 고려를 창건한 직후에 태봉의 관계를 본떠서 919년에 두었다.

08 이성계의 조선 건국에 반대한 고려의 유신(遺臣) 72인은 두문동(지금의 경기도 개풍군 광덕면(光德面) 광덕산(光德山) 서쪽)에 들어가 나오지 않고 끝까지 신왕조(新王朝)에 출사(出仕)하지 않았다. 후일 정조(正祖)는 그 자리에 표절사(表節祠)를 세워 이들의 충절(忠節)을 기렸다.

 

 

 

 

<대순소식 3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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