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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주님9년만의 회국(回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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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10.24 조회5,39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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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대순종교문화연구소 


  그 후에 도주께서 공부실을 정결히 하고 정화수 한 그릇을 받들고 밤낮으로 그 주문을 송독하셨도다. 그러던 어느 날 “왜 조선으로 돌아가지 않느냐. 태인에 가서 나를 찾으라.”는 명을 받으시니 이때 도주께서 이국땅 만주 봉천에 계셨도다. (교운 2장 8절)


  그리하여 도주께서 정사년 四월에 친계 가족을 거느리고 만주를 떠나 뱃길로 태인으로 향하셨던바 도중에 폭풍을 맞아 배는 서산 태안에 닿으니라. 이곳을 두루 다니면서 살폈으되 상제께서 가르치신 곳이 아닌 듯하여 안면도(安眠島)에 옮기셨도다. 도주님을 반가이 맞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이곳 창기리(倉基里)의 이정률(李正律)이었도다. 도주께서 이 섬의 정당리(正當里) 느락골에 우일재(宇一齋)를 마련하고 이곳에서 공부를 하셨도다. 섬사람 三十여 명이 도주를 좇으니 그중에서 이정률이 지극히 따랐도다. (교운 2장 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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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운 2장 8절과 9절은 도주님께서 1909년 봉천명(奉天命) 하신 후 9년 공부 끝에 1917년 정사년 귀국하시어 안면도에 오시게 된 과정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초기 종단의 태동으로 이어지는 이 역사적인 귀국을 도전님께서는 도동회국(渡東回國)이라 하셨는데 이번 호에서는 ‘동쪽으로 강을 건너 고국으로 돌아옴’이라는 뜻을 지닌 도동회국으로부터 이야기를 풀어나가려 한다.

   

도동회국(渡東回國)

  구세제민(救世濟民)의 주문인 기도주를 받으신 도주님께서는 만주 봉천의 공부실에서 정화수를 모시고 밤낮으로 주문을 송독하셨다. 첫 새벽에 길은 깨끗한 우물물인 정화수를 상제님께 바치며 도주님께서는 구세제민의 일념으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기도를 하신 것이다. 그러시던 중, 상제님으로부터 조선의 태인으로 가서 당신을 찾으라는 명을 계시 받으시고, 1917[丁巳]년 4월에 친계 가족과 함께 귀국길에 오르시게 된다. 이를 도주님 재세 시에 도전님 명의로 발간된 『태극도통감』(1956)은 도동회국이라 기술하고 있다. 


  도주 조정산님은 단기 4228년(乙未) 12월 초4일에 원 고향인 함안군 회문리에서 탄생하시와 15세시에 배일사상(排日思想)으로 도강이서(渡江而西)하사 교우만주(僑寓滿州)하시다가 23세 정사춘(丁巳春)에 증산성사(甑山聖師)의 태극도리(太極道理)에 감오(感悟)하사 도동회국(渡東回國)하신 후 ….01

 

  도동회국은 문자적으로만 본다면 ‘동쪽으로 강을 건너 고국으로 돌아오다’라는 뜻이다. 하지만 도주님께서 맡으신 해원도수의 맥락에서 보면 보다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도강이서하여 9년 공부를 통해 득도한 후 도동회국하신 도주님의 행로는 혼란한 천하를 바로잡고자 군사를 일으켜 도강이서했다가 8년 만에 패하여 모든 것을 잃은 후 도동회국의 기회를 스스로 버리고 자결한 초패왕의 운명과 극명히 대비되는데 이는 도주님께서 초패왕의 해원도수를 맡으셨기 때문인 것이다. 결국 도동회국은 도주님께서 15세 시에 천하를 상징하는 만주(滿洲)를 향해 서쪽으로 강을 건너가시어[도강이서(渡江而西)] 봉천명의 도수를 밟아 진주(眞主)가 되시고, 그곳에서 9년만인 23세 시에 득도하신 후 동쪽으로 강을 건너 고국으로 돌아오심으로써[도동회국(渡東回國)] 초패왕의 해원도수를 이루시게 되는 것을 함축하는 말인 것이다.02 

  따라서 귀국하라는 상제님의 계시에 따른 도동회국은 극히 어렵지만 반드시 이루어야 하는 해원도수를 밟으라는 천명이었던 것이다. 독립운동으로 망명할 수밖에 없었던 도주님과 그 가족들이 다시 귀국하는 것은 엄청난 위험에 노출되는 것이었음에도 이를 결행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결국 도동회국이 천지인 삼계를 진멸지경에 이르게 한 천망아(天亡我)03라는 성사재천(成事在天)의 선천도수를 성사재인(成事在人)의 법으로 바꾸는 상제님의 해원공사에 따른 한 도수였음을 짐작하게 하는 것이다. 태인으로 향하시던 중 폭풍으로 서산 태안에 정박하실 수밖에 없을 정도였던 극히 위험했던 뱃길도 이것이 해원도수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도동회국 과정의 어려움에 대해서 도전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훈시해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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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주님은 봉천명(奉天命) 9년 수도 끝에 상제님의 계시를 받으시고 수로(水路)로 회국(回國)하실 제, 돌풍으로 안면도(安眠島)에 불시착하셨다가… (병인년 3월17일, 1986.4.25.)


  도주님께서는 나라를 구하고 창생을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입산수도하시다가 우리 도의 진리를 깨달으셨다. 정사년(丁巳年: 1917년) 2월 10일 23세 되시던 해에 득도를 하셨다. 23수는 태을주의 수와 일치한다. 그 주문으로 도를 받으셨다. 자신이 서시자 상제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으시고 조선으로 나오셨다. 이것만 알아도 나라를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셨지만 그때는 허령(虛靈)이었다. 배를 타고 나오시다 풍파를 만나 배가 뒤집힐 것 같았는데도 기분이 좋으셨다고 한다. 그래서 뚫고 나오셨다고 한다. 금방 통할 것 같으시니까 그러셨다. 내리신 곳이 태안(泰安)이었고 다른 사람의 도움으로 안면도(安眠島)에 가셨다. 안면도는 편안할 안(安), 졸 면(眠), 즉 잠시 쉬어가시는 곳이라는 뜻이다. 농사 지을 때도 잠시 쉬었다가 일하지 않는가. 잠깐 쉬고 전라도 태인(泰仁)으로 가야 되는 것이었다. 이것은 꼭 필요한 과정으로, 안면도는 반드시 경유를 하셔야 되는 곳이었다. 모든 일들은 때가 있고 거칠 것은 거쳐야 한다. (기사년 4월 4일, 1989.5.8 도전님 훈시) 

 

  여기서 우리가 또 한 가지 눈여겨보아야 할 사실은 도주님께서 도동회국하실 때, 수로(水路)를 이용하셨다는 사실이다. 혹자는 도주님께서 육로를 이용하여 서울로 오셨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도주님께서 배를 타고 수로를 통해 도동회국하시는 장면은 대순성적도(大巡聖蹟圖)에도 그려져 있거니와(<그림 1> 참조), 위의 도전님 훈시에서도 명확하다. “득도하시고 도를 펴시려고 물길을 통해 조선으로 나오셔서 태안을 거쳐 태인으로 가셨다.”(기사년 4월 4일, 1989.5.8 도전님 훈시)는 훈시 또한 이를 명확히 해 준다. 초패왕의 해원도수라는 맥락에서 본다면 뱃길을 통한 도주님의 귀국은 필연적인 것이며 또한 독립운동으로 망명한 도주님과 그 가족이 선택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안면도(安眠島)

  도주님께서 배로 귀국해서 처음 정착하신 곳은 안면도였다. 태풍으로 태안에 닿으셨지만 잠시 정박하시어 상제님께서 알려주신 곳인지를 확인하신 것이었고 최종 도착지는 안면도였던 것이다. 안면도에 도착하시기 전 태안에서 정박하신 곳은 천리포와 만리포로 판단되는데 이는 다음과 같은 훈시를 통해 알 수 있다.  


  안면도(安眠島)는 우리 도인들로서는 뜻이 깊은 곳이다. 도주님께서 봉천(奉天)에서 귀국하셔서 처음에 크게 편안하다는 뜻을 지닌 태안(泰安)에 닿으셨는데 천리포, 만리포를 거쳐 첫 발을 디디신 곳이 편안하게 쉰다는 뜻을 지닌 안면도이다. 나중에는 제민사업으로 간척공사와 염전을 이룩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생활의 안정(安定)을 주신 곳으로 안면도는 우리 도가 태동(胎動)한 곳이다. (무진년 8월 18일, 1988.9.28 도전님 훈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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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3> 천리포 모습. 충남 태안군 소원면 소재 

 

  사실 천리포나 만리포는 그 규모로 볼 때는 천리, 만리라는 이름이 어울리지 않는 항구이지만 도주님께서 멀고 먼 만주로부터 천리, 만리 상제님을 찾아 나선 길에 거치신 포구라는 점에서 본다면 이곳이 이러한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도주님 도동회국의 남조선 뱃길이 천리, 만리의 길고 힘든 여정이었음을 그 지명이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안면도는 편안할 안(安), 졸 면(眠) 즉 편안하게 자거나 존다는 뜻을 지닌 섬이다. 『강희자전(康熙字典)』에 따르면 안(安)은 편안하다·고요하다 등의 뜻이 있고, 면(眠)은 졸다·잔다 등의 뜻 외에 범조수지언식(凡鳥獸之偃息)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어 결국 안면(安眠)이란 곧 새와 짐승조차도 편히 쉴 수 있는 편안한 곳임을 나타낸 지명인 것이다.04 그 지명까지도 진주이신 도주님이 진법을 세우시는 대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시기 전 잠시 쉬는 곳으로 부족함이 없으니 상제님의 공사에 따른 물샐 틈 없는 천지도수의 신비함이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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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4> 만리포 모습. 충남 태안군 소원면 소재 

 

  도주님의 구세제민은 국권이 피탈되었던 조선이라는 작은 한 나라의 독립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고, 전 우주를 구제하시려는 상제님의 뜻을 받들고 성사시켜야 하는 일이었다. 이제 진인인 진주로서 진법을 세우고 대업(大業)을 세상에 펼치기 시작하는 역사적인 순간이 도래하기 전 잠시 숨을 고르기 위해 도주님께서는 천리 만리[천리포 만리포] 상제님을 찾아 크게[太] 편안하다[安]는 태안(太安)을 거쳐 새[조(鳥)]조차도 편안하게 쉴 수 있다는 안면도(安眠島)로 가신 것이다. 

  더욱 신비한 것은 도주님께서 처음부터 도동회국의 종착지를 섬으로 하신 것이 아님에도 결국 섬이 종착지가 됨으로써 조선 후기 세상을 구할 진인(眞人)이 해도(海島)에 있다는 ‘해도진인’의 비결이 실현되었다는 것이다. 안면도(安眠島)가 원래 육지와 붙어 있어 섬(島)이 아닌 안면곶(安眠串)으로 불려졌지만 조선 인조(1623~1649) 때 삼남지역 세곡선(稅穀船)의 왕래를 돕기 위해 인공적으로 좁은 목을 절단하여 이로 인해 섬이 되었다는 사실은05 그 신비함을 더해준다. 

  정사년의 안면도 도착과 관련해서는 도전님의 다음 훈시도 참고할 바 있다. 


  타 종교, 다른 종파에서 ‘진사성인출(辰巳聖人出)’이라 해서 무진(戊辰), 기사(己巳)에 꼭 때가 된다고 하는 곳이 있으나, 우리 도인들이 이 말을 하면 어리석은 것이다. 성인(聖人)이 나왔으면 벌써 나왔지 지금 나와서 어떻게 하겠느냐! 지나간 것이다. 그 말은 도주님의 봉천명(奉天命) 봉신교(奉神敎)를 의미하는 것으로, 도주님께서 기유년(己酉年)에 만주에 가셔서 구궁도수(九宮度數)로 9년 만에 득도하신 해가 정사년(丁巳年)임을 뜻하는 것이다. 비결에 ‘육대구월해운개(六大九月海運開)’06라 한 것은 그때를 말한 것이다. (기사년 3월 7일, 1989.4.12. 도전님 훈시)

 

  이 훈시에 따른다면 진사성인출(辰巳聖人出)의 비결은 정사년 도주님의 득도와 귀국을 의미하며 ‘육대구월해운개(六大九月海運開)’의 비결은 도주님께서 정사년(1917) 4월에 수로로 도동회국하셔서 6개월 만인 9월에 드디어 해운(海運)이 열려 안면도에 도착하심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07 

상제님의 명으로 태인을 찾아 가셔야 했지만 안면도에 머무시게 된 이유도 이것이 우연이 아닌 필연이었음을 시사해 주는데 이에 대해서 도전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해 주셨다.  


  상제님께서는 태인을 찾으라고 하셨는데 도주님께서는 태인을 태안으로 오인하시고 태안 안면도에 내내 계셨다. 식구들을 창기리(倉基里)에 두시고 공부도 하시고 난민구제사업과 간척사업도 하셨다. 하시다 보니 이것이 아니므로 전라도로 내려가셨고 결국 김제 원평 마동(馬洞) 김기부의 집에 있는 선돌부인을 만나시고 봉서를 받으셨다. (기사년 4월 4일, 1989. 5.8. 도전님 훈시)

 

  위의 훈시에 따른다면 도주님께서는 태안을 상제님께서 찾으라는 태인으로 잘못 아시고 정착하셨던 것이다. 하지만 이 역시 필연이었으니 신비하게도 안면도에서 도주님께서는 무극도 창도[1925년] 후 토지를 해원하고 제민하기 위해 펼치셔야 했던 간척사업의 장소를 미리 알게 되셨고 또한 그 기초를 시작하시게 된 것이다.08 결국 도주님의 안면도 정착은 초패왕의 해원도수를 무사히 마치신 도주님에게 다음의 도수를 밟기 위해 잠시 숨을 고르게 하시고, 동시에 앞으로 펼치셔야 했던 토지 해원공사, 즉 간척사업의 장소와 그 기반을 도주님에게 주시기 위한 상제님의 안배였던 것이다. 제민과 토지 해원공사였던 간척사업이 무극도 창도와 동시에 10년 이상 안면도에서 실행되었다는 것은 왜 도주님께서 안면도에 잠시 계셔야 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것은 꼭 필요한 과정으로, 안면도는 반드시 경유를 하셔야 되는 곳이었다. 모든 일들은 때가 있고 거칠 것은 거쳐야 한다.”09는 도전님의 말씀이 여기에서 충분히 이해가 되는 것이다. 

  “안면도는 우리 도가 태동(胎動)한 곳”이라는 도전님의 훈시를 통해 본다면 도동회국의 도수인 도주님의 안면도 도착은 초기 종단의 첫 출발을 의미하는 중요한 역사적인 일인 것이다. 그러므로 창기리의 이정률에서 시작되어 30여 명으로 불어난 종도들과 정당리 느락골에 마련된 공부실인 우일재는 우리 종단의 시작으로, 이미 이때 제민 사업으로 시작된 간척사업이 현재 우리 종단의 3대 중요사업의 효시라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본다면 도전님께서 ‘안면도(安眠島)는 우리 도인들로서는 뜻이 깊은 곳’이라 하신 것은 종단의 3대 중요사업인 구호자선, 사회복지, 교육사업이 바로 도주님의 진법임을 되새기라는 뜻일 것이다.  

<대순회보> 18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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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태극도통감』 (필사본, 1956), pp.8~9.

02 이에 대해서는 지난 호에서 어느 정도 구체적으로 다루었다. 「도주님의 봉천명(奉天命) Ⅱ」, 《대순회보》 174호 (2015), pp.23~32 참조.

03 초패왕은 선천의 성사재천의 도수를 천망아(天亡我), 즉 하늘이 나를 망쳤다는 탄식으로 나타냈다. 자기는 잘못이 없는데 저절로 망함을 탄식하여 이르는 말로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04 [네이버 지식백과] 안면도 [安眠島]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참조.

05 [네이버 지식백과] 안면도판목 [安眠島ㅡ] (두산백과)

06 “列邦之中高立鮮 列邦蝴蝶歌舞來 海中豊富貨歸來 六大九月海運開.” (『格菴遺錄』 「來貝豫言六十才」)  

07 1982. 윤4.26에 도전님께서는 도주님의 안면도 도착이 9월이고 六大九月海運開의 비결이 이것을 의미한다고 훈시하셨다. 

08 “이때부터 도주께서는 토지를 해원하고 제민(濟民)하고자 안면도와 원산도(元山島) 두 섬에 간사지(干潟地)를 개척하기 시작하셨도다. 신도들로 구성된 진업단(進業團)과 헌금 二만원과 구태인 일대의 개간지에서 얻어진 곡물 三百석이 동원 투입되었도다.”(교운 2장 35절) 

09 기사년 4월 4일, 1989. 5. 8 도전님 훈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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