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제님『전경』 속 두 순검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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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20.09.10 조회5,292회 댓글0건본문
▲ 구한말 순검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전경』에는 일진회원, 동학 농민, 상인, 아전 등 여러 부류의 사람 중에 경찰 업무를 담당했던 순검(巡檢)도 있다. 상제님의 행적 속 등장하는 순검의 활동을 보면 화적을 잡거나 일진회원을 색출하고 의병 혐의자를 체포 및 압송하며 자신들의 지위를 앞세워 횡포를 부리는 모습 등을 볼 수 있다. 그중에 운명이 상반된 두 순검이 있는데, 한 순검은 상제님으로부터 재생의 은혜를 입어 목숨을 구하였고,01 다른 순검은 도적에게 봉변을 당해 죽게 되었다.02 두 순검의 일화는 각기 다른 시기의 사건으로 당시 급변하는 역사적 변화와도 밀접한 관련 있다. 따라서 이글에서는 두 순검의 일화와 당시 일어났던 역사적 상황을 비교하여 이해해 보고, 두 순검에 대한 상제님의 행적과 말씀을 통해 수도적인 교훈을 알아보고자 한다.
변복하여 야순(夜巡)했던 순검
화적이 대낮에도 횡행하였던 1904(갑진)년 2월 어느 날, 상제님께서 부안을 거처 고부 거문바위 주막에 이르셨다. 주막에는 화적을 잡기 위해 변복하고 야밤에 순찰했던 순검이 쉬고 있었다. 이때 상제님께서는 주모에게 “저 사람은 곧 죽을 사람이니 주식을 주지 말라. 주식을 주었다가 죽으면 대금을 받지 못하니 손해가 아니냐”라고 일러주셨다. 순검은 상제님의 말씀을 엿듣고 분개하여 상제님께 불손한 행위를 하였으나, 상제님께서는 웃으시며 “죽을 사람으로부터 맞았다 하여 무엇이 아프리오.”라는 말씀을 남기시고 주막을 떠나셨다.
이때 순검은 주모로부터 “저분은 신인이시니 사과하고 그 연고를 여쭈어보라.”는 말을 듣고, 상제님의 뒤를 쫓아가 용서를 빌며 그 연유를 여쭈었다. 상제님께서는 순검에게 “오늘 밤에 순시를 피하고 다른 곳으로 빨리 가라”고 일러 주셨다. 그는 상제님의 말씀에 따라 다른 곳으로 피신하였다. 얼마 후 화적이 그 순검을 죽이려 작정하고 거문바위 주막에 몰려와 주모에게 “순검의 거처를 말하라.”고 하며 행패를 부렸다. 이 일이 있고 이튿날 순검은 상제님을 찾아뵙고 재생의 은혜에 흐느껴 울었다.
▲ 전북 익산 함열 (출처: 카카오 맵)
위 순검의 이야기에서 보듯 당시에는 화적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스스럼없이 횡포를 자행(咨行)한 듯하다. 같은 시기에 비슷한 상황으로 『전경』에 전북 익산시 함라면 함라산 아래에 있는 함열에서도 도적이 속출하여 주민들이 공포에 떨었다고 한다. 함열 회선동에 살던 종도 김보경도 자기 집이 부자라는 헛소문 때문에 도적에게 피해를 볼까 봐 걱정하였다. 보경은 이 시기에 상제님께서 자신의 집에 오셨을 때 근심 걱정을 말씀드렸는데, 상제님께서 떠나신 이후 도적이 들지 않았다고 한다. 03 김보경 종도의 일화를 통해 당시 도적들 때문에 함열 주민들이 겪어야 할 고충이 심각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 전북 정읍 거문바위 마을과 주막터 (출처: 카카오 맵)
상제님께서 잠시 들렀던 거문바위 주막은 두승산 아래에 있는데, 그 주변으로 도적들이 자주 출몰하였다. 주막 앞에는 고부와 부안을 잇는 도로가 있어 오가는 사람들이 그 주막에 머물렀다. 이곳은 교통의 요지여서 사람들의 왕래가 많았고 부유한 동네로 알려져 있었다. 마을 주변의 지형과 환경 때문에 도적의 무리가 속출하여 이 지역 순검들은 도적들을 잡기 위해 밤낮으로 변복하여 순찰해야 했다. 전북 함열과 거문바위 마을에서 도적들이 속출했던 것은 전북지역 대부분이 평야인 데 반해 두 곳에는 그들이 웅거지(雄據地)를 마련할 수 있는 산이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 시기에 도적을 검거하며 민생 치안을 유지했던 순검들은 갑오개혁(甲午改革: 1894년 7월 ~1896년 2월) 때 출범한 경무청(警務廳)의 말단직이었다. 이때 경무청은 고종의 개혁정책으로 이전의 좌·우 포도청체제의 관제(官制)를 개편한 근대적 체제의 틀을 갖춘 경찰기관이었다.04 치안 업무를 담당했던 순검은 대한제국에 녹을 받으며, 도적 검거 이외에도 소방, 순찰 및 야간 방범, 미아와 유기아 보호, 우마 유실, 풍속 교정 등 다양한 업무를 맡아 진행하였다.
이 일화에 나오는 순검도 거문바위 마을 주변에서 화적을 잡기 위해 변복하여 야간 순찰하며 치안 유지에 주력하였다. 하지만 그곳 화적은 그를 눈엣가시로 여겼을 것으로 보인다. 야순(夜巡)하고 거문바위 주막에 쉬고 있는 순검을 보신 상제님께서는 화적에게 죽게 될 운명을 아시고 순찰하지 말고 피신하도록 일러주셨다. 이로 인해 순검은 상제님의 도움으로 자신의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이처럼 상제님께서 그에게 재생의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것은 본연의 직무인 민생 치안에 충실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금품을 탈취했던 순검
1908년 4월 어느 날, 상제님께서는 정괴산의 주막에 머물고 계셨다. 4년 전 동곡마을 앞 금구 수류면 평목점에서 주막의 술장사로 겨우 먹고살았던 정괴산에게 때마다 정성 어린 공양을 받으셨다.05 그날도 상제님께는 그의 주막에서 차린 상을 받고 계셨다. 마침 고부(古阜) 화란 때 알게 된 정(鄭) 순검이 나타나 상제님께 돈 열 냥을 요구하였으나, 상제님께서 거절하시자 상제님의 옷에 손을 넣어 돈 열 냥을 가져가는 무례를 범하였다. 이에 상제님께서는 방약무인(傍若無人)한 그의 행동에 한탄하셨다.
그의 무례함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다시 전주에서 서신을 보내어 상제님께 돈을 요구하였다. 서신을 받은 상제님께서는 형렬에게 돈 열 냥을 구하게 하여 정 순검에게 보내셨다. 이 일이 있고 며칠 뒤, 그는 전주에서 고부로 돌아가던 중 정읍의 어느 다리에서 도적들에게 봉변을 당해 죽었다. 이 소식을 들으신 상제님께서는 “순검이란 도적을 다스리는 자이거늘 도리어 도적질을 하여 도적에게 맞아 죽었으니 이것이 어찌 범상한 일이리오”라고 한탄하셨다.
정 순검의 일화는 그 시대 상황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일본은 이듬해인 2월에 통감부(統監府)06를 서울에 설치하면서 반일 의병세력의 진압을 목적으로 대한제국 경찰기구를 개편하여 각 군 단위로 경무분서를 두고, 그 후 분서 아래 각지 분파소를 부설(附設)하였다.07 1907년 7월에 접어들며 ‘고종황제 강제퇴위’, ‘한일신협약’ 그리고 ‘대한제국 군대 강제해산’ 등을 강행하였다. 이때 해산된 군인들은 의병에 가담하여 무력으로 일본에 대항하였다. 정미의병(1907~1910년)이 일어나면서 일본은 반일의병을 진압하기 위해 대한제국 경무청(警務廳)과 한국주차군(韓國駐箚軍: 한반도 주둔 일본군) 소속의 수비대를 동원하였다.08 당시 일본군은 한반도의 현지 사정에 밝지 못했기 때문에 통역, 밀정(密偵)을 활용한 의병정찰 및 토벌과 체포, 회유, 고문, 심지어는 불법적인 살해 등에 조선의 순검을 이용하였다.09 이처럼 조선 순검의 역할이 두드러지면서 사실상 대한제국 경찰은 일본 경찰기구로 흡수되었다.10 일본은 의병을 검거하는 과정에서 현상금을 내거는 일도 있었는데,11 순검들은 현상금을 차지하려고 의병 혐의를 씌워 불법적으로 체포·조사하는 일도 있었다. 《대한매일신보》에 보면 경기도 양주군에서 근무하던 어느 순검이 일부 면장과 이장에게 의병 혐의를 씌워 포박·신문(訊問)하여 민원을 일으켰다고 한다.12 그리고 의병을 검거하는 과정에서 체포된 인사들을 참살(慘殺)하는 불법적인 일도 적지 않았다.13 이러한 실정 때문에 상제님께서 종도들과 함께 고부 화란을 겪고 계실 때, 의병 혐의로 문초를 받던 종도들은 죽임을 당할까 봐 두려워하였다.14
상제님께서 정 순검을 고부(古阜) 화란 때 알게 되셨다는 것으로 보아, 정 순검도 다른 순검들처럼 일본에 관리·감독을 받으며 의병을 검거하는 데 활동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당시에는 의병검거와 더불어 민생 치안 업무를 이행해야 할 순검이 생민을 대상으로 그 지위를 부당하게 이용하여 부패를 일삼는 부류도 있었는데, 상제님께 금품을 요구한 정 순검도 이들과 다를 바 없었다. 도적을 잡아야 할 본분을 망각하고 도적질을 한 정 순검은 도적에게 봉변을 당하여 목숨을 잃은 것이다.
두 순검의 일화는 급변하는 역사 속에서 한 순검은 대한제국의 통치하에 생민의 안녕과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본연의 직무에 충실하여 상제님으로부터 재생의 은혜를 입었다. 다른 순검은 일본의 지휘 하에 의병을 검거하는 데 주력하면서 자신의 지위를 앞세워 금품을 갈취하였다. 죽음에 이른 이순검에 대하여 상제님께서는 ‘순검이란 도적을 다스리는 자인데 되려 도적질하다가 도적에게 죽은 일이 범상치 않은 일이다’라고 평하셨다. 두 순검의 운명은 본분을 지켜 직무에 충실했는지 아니면 그렇지 못했는지에 따라 갈렸다.
상제님의 행적 속 두 순검의 이야기를 비교해 보면서 오늘날 직장에서의 직업윤리에 관해 생각해 보게 된다. 직업윤리에 관해 『대순진리회요람』에 보면 “생활(生活)과 녹작(祿爵)은 직업(職業)의 은혜(恩惠)이니 충실(忠實)과 근면(勤勉)으로써 직분(職分)을 다하라.”15고 명시되어 있다. 직업의 은혜라는 것은 직장에서 자신이 맡은 바 직무에 진실로 최선을 다하면, 원하거나 필요한 사람에게 서비스가 제공되고, 그 대가로 윤택한 사회생활과 안정된 직장 생활을 누릴 수 있다는 원리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민생의 안전과 구호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순검의 모습을 보면 직업의 은혜를 저버리지 않는 모델이라 할 만하다.
01 행록 3장 10절 참조.
02 행록 4장 16절 참조.
03 행록 3장 24절 참조.
04 차인배, 「광무년간 한성부호적을 통해 본 순검의 거주와 생활 양상」, 『역사민속학』 51 (2016), p.51 참조.
05 행록 3장 19절 참조.
06 통감부(統監府)는 1906년 2월 1일 서울에 설치되어 1910년 8월 주권의 상실과 더불어 총독부가 설치될 때까지 4년 6개월 동안 한국의 국정 전반을 사실상 모두 장악했던 식민 통치 준비기구이다. 「통감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07 홍순권, 「한말 일본군의 의병 진압과 친일세력의 역할」, 『역사교육논집』 58 (2016), p.240 참조.
08 김주우, 「정순검의 방약무인」, 《대순회보》 215호 (2019), p.28 참조.
09 조재곤, 「러일전쟁 이후 의병탄압과 협력자들」, 『한국학논총』 37 (2012) p.434.
10 홍순권, 앞의 글, p.241.
11 조재곤, 앞의 글, p.438.
12 《대한매일신보》, 〈양주민원〉, 1909. 4. 2.
13 조재곤, 앞의 글, p.440 참조.
14 행록 3장 58절.
15 『대순진리회요람』, P.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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