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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주님도주님의 봉천명(奉天命)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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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08.22 조회4,60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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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주께서 기유년(十五歲時) 四월 二十八일에 부친과 함께 고국을 떠나 이국땅인 만주에 가셨도다. (교운 2장 4절)

 

 

만주(滿洲)

 

기유년 도주님께서 망명하셨던 곳은 압록강 너머의 남만주 땅으로 당시 행정구역으로는 봉천성(奉天省)이었다. 만주(滿洲)는 찰 만(滿), 고을 주(洲)이니 곧 천하(天下)를 상징한다. 상제님의 평천하(平天下)를 이으셔서 천하를 다스리는, 즉 치천하(治天下) 50년 공부(工夫)의 시작인 도주님의 봉천명(奉天命)이 바로 천하를 상징하는 만주로 가시는 길에서 이루어짐은 천지도수가 차착(差錯)이 없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봉천명(奉天命)과 도강이서(渡江而西)

 

도주님의 유족들과 친지들의 증언에 따르면, 만주에서 도주님의 가족들이 정착한 곳은 압록강 너머의 현 길림성(吉林省)[지린성] 통화시(通化市)[퉁화시] 북쪽 유하현(柳河縣)[유허현] 지역으로 추정된다. 당시 이 지역은 봉천성에 포함되어 있었다.01 그때의 봉천성은 현 요녕성(遼寧省)[랴오닝성]과 그 경계가 비슷한데,02 도주님께서 망명하시는 압록강 너머의 남만주 지역이 봉천으로 불리게 된 시점은 도주님께서 망명하시기 두해 전인 1907년이다. 하지만 그 명칭의 기원은 1644년 청이 명을 정복하고 북경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청 왕조가 그 시조인 누르하치가 정한 수도인 성경(盛京)을 봉천(奉天)으로 명하면서부터라 할 것이다. 그러니까 자신들의 수도였던 현재의 심양(瀋陽), 즉 성경(盛京)에 봉천부(奉天府)를 설치하고, 이 봉천부를 중심으로 한 현재의 요녕성 일대를 성경성(盛京省)이라 하다가 1907년부터는 봉천성이라 한 것이다. 결국 성경을 봉천으로 개명한 것이 후에 현 요녕성 일대의 지역이 봉천으로 불리어진 기원이 된 것이다.

 

성경을 봉천으로 개명한 것은 이제 천명(天命)이 자신들, 청 왕조에 있음을 공표하고 청 왕조가 천자, 즉 황제임을 천명(闡明)하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당시 봉천이라는 용어는 천자, 즉 황제를 표현할 때 사용되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봉천이라는 말이 황제와 관련되어 상용되기 시작한 것은 명 태조 이후이다. 명 태조가 자신의 정전을 봉천전(奉天殿)으로 이름 짓고, 자신의 규(圭)03에 ‘봉천법조(奉天法祖)’ 네 글자를 새겨 넣으며 신하들에게 내리는 고명(誥命)이나 칙명(勅命)의 서두에 반드시 ‘봉천승운황제(奉天承運皇帝)’라는 여섯 글자를 써 넣기 시작하면서, 명청시대 천자의 칙명 서두에 봉천이라는 용어가 항상 사용되게 되었던 것이다.04 이러한 연고로 본다면 봉천(奉天)이라는 지명은 천자의 봉천명(奉天命)을 상징하며, 따라서 도주님의 봉천행은 진주(眞主)로서의 봉천명(奉天命)에 부합하는 여합부절의 도수인 것이다.

 

봉천명을 의미하는 도주님의 만주 봉천행 외에도 교운 2장 4절에는 숨겨진 일화와 의미가 있다. 바로 강을 건너 서쪽으로 간다는 뜻의 도강이서(渡江而西)이다. 당시에는 철도가 신의주까지만 연결되었었기에,05 도주님과 그 가족들은 신의주에 도착한 후 기차에서 내려 압록강을 배로 건너야만 만주로 갈 수 있었다. 이에 대해 도전님께서는 『태극도 통감』(1956)을 통해 다음과 같이 밝혀주셨다.   

 

十五歲時(15세 시)에 排日思想(배일사상)으로 渡江而西(도강이서)하사 僑寓滿洲(교우만주)하시다가 二十三歲丁巳春(이십삼세정사춘)에 甑山聖師(증산성사)의 太極眞理(태극진리)에 感悟(감오)하사 渡東回國(도동회국)하신 後 ….06  

 

여기서 ‘渡江而西(도강이서)하사 僑寓滿洲(교우만주)하시다가’는 ‘강을 건너 서쪽으로 가서 만주에 임시로 머무시다가’라는 뜻이다. 만주 봉천 지역은 서쪽으로 흐르는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한반도의 서북쪽에 있어 배로는 서쪽으로 건널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도강이서(渡江而西)인 것이다.

 

하지만 도강이서에는 종통과 관련된 더욱 심오한 뜻이 숨겨져 있으니 바로 초패왕과 관련된 포원(抱冤)의 고사이다. 이 고사는 『채지가』의 「뱃노래」에도 실려 있는데 다음과 같다.   

 

허무하고 허무하다 세상일이 허무하다

강동자제 팔천인은 도강이서 하올적에

침선파부 결심하고 삼일량을 가지고서

백의산하 충돌할제 팔년풍진 겪어가며

역발산 기개세는 초패왕의 위풍이라

대사성공 하잤더니 천지망아 할일없네

계명산 추야월에 옥소성이 요란터니

팔천제자 흩어지니 우혜우혜 내약하오

오강정장 배를대고 급도강동 하렸으나

전쟁사를 생각하면 억울하고 원통하다  

 

『채지가』는 도강이서와 관련된 초패왕의 포원 고사가 천지망아(天之亡我)에 의한 원(冤)임을 알려준다. 天之亡我(천지망아)는 하늘이 나를 망친다는 뜻으로, 아무 허물이 없음에도 저절로 망함을 탄식하여 이르는 말이다.07 결국 천지망아는 개인의 능력이 아무리 출중하고 잘못이 없더라도, 하늘이 망하게 하면 성공하지 못하는 모사재인(謀事在人) 성사재천(成事在天)이라는 선천의 도수에 의해 발생하는 원이다.08 따라서 초패왕의 해원은 천지의 도수를 모사재천(謀事在天) 성사재인(成事在人)으로 바꾸는 공사와 관련되어 있다. 천지 도수의 조화둔궤로 종통 계승의 징표였던 성궤 안에도 초패왕의 원과 관련된 오강록(烏江錄)의 글이 있다는 것은09 초패왕의 해원이 단주의 해원과 더불어 매우 중요한 공사임을 잘 보여준다. 이에 대해서는 도전님께서도 단주와 초패왕의 해원도수를 도주님이 맡으셨음을 언급하신 적이 있다.

 

천지망아(天之亡我), 즉 모사재인(謀事在人) 성사재천(成事在天)에 의한 초패왕의 포원을 가장 잘 보여주는 일화는 초패왕의 마지막 전투에 등장한다. 이와 관련된 『사기』 「항우본기」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항왕의 군대는 해하에 방벽을 구축하고 있었는데, 군사는 적고 군량은 다 떨어진 데다 한(漢)군과 제후의 군대에게 여러 겹으로 포위됐다. 밤에 한군이 사방에서 모두 초나라의 노래를 부르니10 항왕이 크게 놀라 말하기를 “한군이 이미 초나라 땅을 모두 빼앗았단 말인가? 어찌해 초인(楚人)이 이리도 많은가?”라 했다. 항왕은 한밤중에 일어나서 장중(帳中)에서 술을 마셨다. 항왕에게는 우(虞)라는 이름의 미인이 있었는데, 항상 총애를 받으며 시종(侍從)했다. 또 추(騅)라는 이름의 준마가 있었는데, 그는 항상 이 말을 타고 다녔다. 이에 항왕은 비분강개한 심정으로 비통함을 노래하며 스스로 시를 지어 읊었다.

“힘은 산을 뽑을 수 있고, 기개는 온 세상을 덮을 만하건만 시운(時運)이 불리해 추(騅) 또한 나아가지 않는구나. 추가 나가지 않으니 어찌해야 하는가? 우(虞)여, 우여, 그대를 어찌해야 좋을까?(力拔山兮氣蓋世, 時不利兮騅不逝. 騅不逝兮可柰何, 虞兮虞兮柰若何11)”

 

항왕이 여러 차례 노래 부르니 우미인도 따라서 불렀다. 항왕의 뺨에 몇 줄기 눈물이 흘러내리니 좌우가 모두 눈물을 흘리며 차마 쳐다보지 못했다. 이때 항왕이 바로 말에 올라타니, 휘하 장사 중 말을 타고 따르는 자가 8백여 명이 되었다. 그날 밤 그들은 포위를 뚫고 남쪽으로 나가 질주했다. 날이 밝자 한군은 비로소 이 사실을 알고 기장(騎將) 관영으로 하여금 5천의 기병을 이끌고 추격하게 했다. 항왕이 회수를 건너니 그를 따라오는 자는 이제 백여 기(騎)에 불과했다. 항왕이 음릉(陰陵)에 이르러 길을 잃어버리자 한 농부에게 물으니 농부가 속여 말하기를 “왼쪽이오.”라고 해 왼쪽으로 가다가 큰 늪에 빠지게 되었다. 이로 인해 한군이 바짝 쫓아오게 되었다. 항왕이 이에 다시 군사를 이끌고 동쪽으로 가서 동성(東城)에 이르니 겨우 28기만이 남았고, 추격하는 한군의 기병은 수천이었다.

그림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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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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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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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①, ②, ③

항우가 한나라 군대에게 포위당하고 마지막 진을 쳤던 해하(垓下)의 유적지 . 원래 그곳은 예전부터 내려오던 해하고성(垓下古城) 자리라고 한다. 현재는 성곽이나 항우가 진을 폈던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으며, 우미인이 마지막으로 머리를 감았다는 작은 연못 과 오추마 동상 만이 쓸쓸하게 서 있다. 중국 안휘성 영벽현 소재

 

항왕이 스스로 생각하니 도저히 벗어날 수 없었다. 이에 그 기병에게 말하기를 “내가 군사를 일으킨 지 지금 8년이 되었다.12 몸소 70여 차례의 전투를 벌였는데 내가 맞선 적은 격파시키고 내가 공격한 적은 굴복시켜 일찍이 패배를 몰랐으며, 마침내는 천하의 패권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지금 결국 이곳에서 곤궁한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는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하는 것이지[天之亡我], 결코 내가 싸움을 잘하지 못한 죄가 아니다. 오늘 정녕 결사의 각오로 통쾌히 싸워서 기필코 세 차례 승리해, 그대들을 위해 포위를 뚫고 적장(敵將)을 참살하고 적군의 깃발을 쓰러뜨려, 그대들로 하여금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하는 것이지[天亡我] 내가 싸움을 잘못한 죄가 아님을 알게 하리라.(吾起兵至今八歲矣, 身七十餘戰, 所當者破, 所擊者服, 未嘗敗北, 遂霸有天下. 然今卒困於此, 此天之亡我, 非戰之罪也. 今日固決死, 願爲諸君快戰, 必三勝之, 爲諸君潰圍, 斬將, 刈旗, 令諸君知天亡我, 非戰之罪也)” 하고는 기병을 넷으로 나누어 사방으로 향하게 했다. 한군이 겹겹이 포위하니, 항왕은 그 기병에게 말하기를 “내가 그대를 위해서 저 장수를 베리라.”라고 하고는 기병들에게 사방으로 말을 달려 내려가도록 하고 산의 동쪽 세 군데에서 나누어 만날 것을 약조했다. 그러고 난 뒤 항왕은 크게 소리치며 아래로 말을 달려가니, 한군은 바람에 초목이 쓰러지듯이 모두 전멸당했고, 항왕은 마침내 한나라 장수 한 명의 목을 베었다. 이때 기장(騎將)이었던 적천후(赤泉侯)가 항왕을 추격하자 항왕이 눈을 부릅뜨고 꾸짖으니 적천후는 사람과 말이 모두 놀라서 몇 리 밖으로 달아나버렸다. 이리하여 항왕은 산의 동쪽 세 군데에서 그의 기병들을 만났다. 한군은 항왕의 소재를 알 길이 없자 군사를 셋으로 나누어 초군을 다시 포위했다. 이에 항왕이 말을 달려서 한나라 도위(都尉) 한 명을 참살하고 1백여 명을 죽인 뒤 다시 그의 기병들을 모으니 기병 2명이 죽었을 뿐이었다. 이에 항왕이 기병들에게 “어떠냐?”라고 묻자, 기병들이 모두 엎드려서 말하기를 “대왕의 말씀과 같습니다.”라 했다.

  

 

그림 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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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④

초패왕 항우는 해하에서 한나라 군대에게 포위당하였다.[사면초가(四面楚歌)] 이곳에서 포위망을 뚫고 남쪽으로 약 180여 ㎞ 떨어진 오강(烏江)까지 내려왔으나, 천지망아(天地亡我)라 하여 강을 건너 강동으로 가지 않고 자결하였다.(이 지도는 서초패왕령사 내부에 진열되어 있다)

 

마지막 전투를 통해 천지망아를 확인한 초패왕이 죽음을 앞두고 오강(烏江)의 정장(亭長)에게 한 다음의 마지막 말에서도 천지망아로 인한 포원을 확인할 수 있다.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하려는데[天之亡我], 내가 강을 건넌들 무엇하랴! 또한 나는 강동의 자제 8천 명과 함께 강을 건너 서쪽으로 갔었는데[渡江而西], 지금 한 사람도 같이 돌아오지 못했다. 설사 강동의 부형(父兄)들이 나를 불쌍히 여겨 왕으로 받든다 한들 내가 무슨 면목으로 그들을 대하겠는가? 설사 그들이 아무 말 하지 않는다 해도 내 양심에 부끄럽지 않을 수 있겠는가.(天之亡我, 我何渡爲 且籍與江東子弟八千人渡江而西, 今無一人還, 縱江東父兄憐而王我, 我何面目見之 縱彼不言, 籍獨不愧於心乎)”13

      

천지망아(天之亡我), 즉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하려는데’라는 초패왕의 말은 역발산기개세의 출중한 능력을 지녔다 해도 하늘이 망하게 하면 어쩔 수가 없음을 한탄한 것이다. 천하의 주인이 되고자 강동의 팔천자제와 도강이서했던 초패왕은 이 말을 남기고 도동회국(渡東回國), 즉 동쪽으로 강을 건너 고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포기하고 자결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본다면 결국 초패왕의 해원은 그 해원을 맡은 이가 성사재천이 아닌 성사재인의 해원도수에 따라 초패왕이 이루지 못한 일을 동일한 궤적, 즉 도강이서(渡江而西)와 도동회국(渡東回國)을 거치며 성공함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초패왕은 천하의 주인이 되기 위해, 다시 말해 황제가 되어 봉천명 하고자14 강을 건너 서쪽으로 갔으나[도강이서(渡江而西)] 8년의 전쟁 끝에 결국 패하여 진주, 즉 천자가 되지 못하고 동쪽으로 강을 건너 자신의 나라로 돌아가지[도동회국(渡東回國)] 않고 자결하였다. 그렇다면 초패왕의 해원 도수를 맡으신 도주님께서는 천하를 상징하는 만주(滿洲)로 도강이서(渡江而西)하여 봉천명으로 진주(眞主)가 되고 9년 공부로 득도(得道)하여 동쪽으로 강을 건너 고국으로 돌아가[도동회국(渡東回國)] 천명을 완성[50년공부]하셔야 그 해원 도수를 이루시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도주님의 봉천행에는 강을 건너 서쪽으로 가는 행적이 필연적으로 있어야 했으며 이를 도전님께서는 도강이서(渡江而西)라는 글로 우리들에게 알려주신 것이다.

 

그림 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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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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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⑤, ⑥ 

항우가 끝내 강을 건너지 않고[渡東回國] 숨을 거둔 오강(烏江) 가에는 서초패왕령사(西楚覇王靈祠)가 세워져 있고 ⑤, 그곳에는 항우의 시신 대신 그가 마지막으로 입었던 옷을 수습하여 만든 무덤이 있다. ⑥ 중국 안휘성 소호 오강진 소재

 

  

천부(天賦)의 종통계승 계시

 

전(前) 호에서 소개한 기록을 살펴본다면, 기유(1909)년 4월 28일 상제님께서 15세 진주이신 도주님의 봉천행 여정을 확인하시기 위해 기차가 다니는 들판으로 가 기차를 향해 명을 내리시고 또한 공사를 보셨다.15 과연 이 공사는 무엇이었을까? 양위 상제님 외에 이에 대해 알 수 있는 분은 도전님 외에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도전님께서는 이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씀하시지도, 『전경』에 기록하시지도 않으셨다. 그럼에도 도전님께서는 『대순진리회요람』을 통해 1909년 만주 봉천에서 도주님께서 상제님으로부터 천부(天賦)의 종통계승(宗統繼承)의 계시(啓示)를 받으셨음을 알려주셨기에, 우리는 그 공사를 종통계승과 관련된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대순진리회(大巡眞理會)는 조정산(趙鼎山) 도주(道主)께서 만주(滿洲) 봉천(奉天)에서 강성상제(姜聖上帝)로부터 그 천부(天賦)의 종통계승(宗統繼承)의 계시(啓示)를 받으신 데서 비롯하여, 유명(遺命)으로 종통(宗統)을 이어받으신 도전(都典)께서 영도(領導)하시는 우금(于今)까지 반세기(半世紀)를 훨씬 넘은 六十여년간(餘年間)의 발전사(發展史)를 가진 종단(宗團)의 명칭(名稱)이다.

      

위의 글을 통해 본다면 『대순진리회요람』은 대순진리회 종단의 역사를 60여 년간으로 규정하고 도주님이 받으신 종통계승의 계시를 종단 역사의 시작점으로 잡고 있다. 결국 『대순진리회요람』이 1969년을 발간 기준으로 하고 있기에 이에 따른다면 종단 역사의 시작점이 되는 종통계승의 계시는 1909년에 있어야 하며 따라서 기유(1909)년 4월 28일 도주님의 만주 봉천행 도중이나 그 직후 천부의 종통계승의 계시가 있었음이 분명해진다. 우리 종단의 치성에 4월 28일의 봉천명 치성이 있음을 상기해 본다면 계시는 기유년 4월 28일에 있었을 가능성이 크며, 따라서 그날 상제님께서 행하신 공사는 이 천부의 종통계승의 계시와 관련되었다 할 것이다.

 

구전으로 전해지는 이날의 계시 내용 대부분은 사실 정확한 근거가 없기에 믿기 어렵다. 하지만 그 중 이치로 보아 신빙성이 높고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일화는 정산(鼎山)이라는 존호를 그날 도주님께서 계시로써 받았다는 것이다. 우당(牛堂)이라는 도전님의 존호를 도주님이 지어주셨음을 본다면 도주님의 존호는 상제님이 내려주셔야 옳고 또한 천부의 종통 계승의 계시라면 반드시 솥과 시루의 이치가 있어야 하기에 이 일화는 사실에 부합할 가능성이 높다.

 

정산이라는 존호를 주시는 계시 외에 다른 천명이 계시로 있었음은 상제님이 행하신 공사들을 도의 이치로 살펴본다면 추측할 수 있는데 바로 기유년부터 시작되는 도주님의 50년 공부, 도주님과 본령합리를 이루는 23자의 태을주와 관련되어 상제님이 행하신 공사 등이 해당된다. 기유(1909)년 3월 상제님은 다음의 두 공사를 행하신다.16 두 공사는 모두 화천하셨던 기유년에 행해지고 도주님 종통계승의 증거인 50년 공부 및 태을주와 관련되어 있다.

 

상제께서 어느 날 류 찬명(柳賛明)과 김 자현(金自賢) 두 종도를 앞에 세우고 각각 十만 인에게 포덕하라고 말씀하시니 찬명은 곧 응낙하였으나 자현은 대답하지 않고 있다가 상제의 재촉을 받고 비로소 응낙하느니라. 이때 상제께서 “내가 평천하 할 터이니 너희는 치천하 하라. 치천하는 五十년 공부이니라. 매인이 여섯 명씩 포덕하라”고 이르시고 또 “내가 태을주(太乙呪)와 운장주(雲長呪)를 벌써 시험해 보았으니 김 병욱의 액을 태을주로 풀고 장 효순의 난을 운장주로 풀었느니라”고 말씀하셨도다.17

 

종도들이 모인 곳에서 상제께서 三월 어느 날 가라사대 “지금은 신명 해원시대니라. 동일한 五十년 공부에 어떤 사람을 해원하리오. 최 제우는 경신(庚申)에 득도하여 시천주(侍天呪)를 얻었는바 기유(己酉)까지 五十년이 되니라. 충남(忠南) 비인(庇仁) 사람 김 경흔(金京訢)은 五十년 공부로 태을주(太乙呪)를 얻었으되 그 주문을 신명으로부터 얻을 때에 그 주문으로써 많은 사람을 살리라는 명을 받았느니라”고 말씀을 하시고 이어서 “이 두 사람 중의 누구를 해원하리오”라고 물으시니 시좌하고 있던 종도들 중에서 광찬이 “상제님의 처분을 기다리나이다”고 아뢰니 상제께서 다시 말씀하시기를 “시천주는 이미 행세되었고 태을주를 쓰리라” 하시고 읽어 가르치시니 그 주문은 이러하였도다. 「吽哆吽哆 太乙天上元君 吽哩哆耶都來 吽哩喊哩娑婆啊」18

 

첫 번째 공사는 치천하(治天下)가 50년 공부임을 밝히고 종도들에게 치천하의 50년 공부를 명하시는 것이다. 50년 공부는 진주인 종통계승자와 관련된 공사이기에 이 구절의 치천하 50년 공부 역시 도주님에게 주어진 천명이 분명하다. 무술(1958)년 3월 6일 도주님께서 화천하시며 “오십년 공부 종필(五十年工夫終畢)이며 지기 금지 사월래(至氣今至四月來)가 금년이다.”라고 하셨는데, 이것은 도주님께서 이미 그 이전부터 당신이 화천하시는 해인 무술(1958)년이 50년 공부종필에 해당함을 알고 계셨음을 의미한다. 이 사실은 결국 도주님께서 50년 공부의 시작점인 기유(1909)년에 상제님의 평천하(平天下) 공사를 이어 치천하 50년 공부를 종필하라는 천명을 받았음을 강력하게 시사하는 것이다. 성사재인이라는 해원법리에 따라 치천하 50년 공부라는 상제님의 천명은 상제님의 종도들과 도주님에게 모두 공평히 주어져야 옳기에, 1909년 도주님은 계시를 통해 치천하 50년 공부에 대한 천명을 받으셨고 1958년 화천하시면서 이를 완수하셨음을 밝히신 것이다. 분명 도주님이 받으신 종통 계승의 계시에 정산(鼎山), 즉 솥의 이치에 따른 진주(眞主)로서 치천하 50년 공부를 종필하라는 천명이 있었던 것이다.19

 

두 번째 공사는 신명해원의 공사인데, 50년 공부로 사람을 살리는 주문인 태을주를 얻은 김경흔의 해원을 결정하시고, 그 해원을 위해 기유(1909)년부터 태을주가 많은 사람을 살리는 데 쓰여지게 하는 공사이다. 다시 말해서 시천주가 행세한 1860년부터 1909년의 50년 기간 이상을 기유년부터 태을주가 행세하면서 김경흔이 태을주를 받았던 당시의 명대로 많은 사람을 살리는 주문으로 쓰여져야 하는 것이다. 태을주가 50년 이상 많은 사람을 살리는 데 쓰여지며 행세하려면 헛 도수나 난법과 관련되어 사용되어지기보다는 50년 공부로 완성되는 진법에 사용되어야만 여합부절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최수운이 경신(1860)년에 상제님으로부터 천명과 신교와 함께 시천주를 받은 것처럼 50년 공부로 진법을 짜시는 도주님이 기유년에 태을주를 상제님으로부터 받으셔야 김경흔의 해원은 이루어진다고 할 것이다. 이런 이치로 본다면, 도주님께서는 기유(1909)년에 태을주를 상제님으로부터 계시로 받으셨을 가능성에 대해서도 연구해볼 필요성이 있다.20

 

봉천명일에 이루어진 종통계승의 계시에 대해서 좀 더 많은 연구와 조사가 필요하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연구를 통해서 우리는 1909년 기유년 4월 28일 만주 봉천행 도중, 도주님께서는 시루와 솥의 이치에 따른 정산(鼎山)이라는 존호, “진주(眞主)로서 치천하(治天下) 50년 공부(工夫)를 종필(終畢)하라”는 천부의 종통계승의 계시를 상제님으로부터 받으셨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4월 28일 봉천명 치성의 뜻이 더욱 새롭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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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유하현은 1902년 설치되었는데, 당시에는 성경성 해룡부(海龍府)에 소속되어 있다가 1907년 봉천성 해룡부에, 1909년에는 봉천성 동변도(東邊道) 해룡부로 소속된다.(『柳河縣志』(1991), p.35)

02 1954년에 유하현을 포함한 통화시 지역은 길림성 소속이 된다. 따라서 봉천성의 동쪽은 현 요령성보다 컸다.(같은 책, p.36 참조)

03 규는 황제·왕후가 면복(冕服) 및 통천관(通天冠) 강사포(絳紗袍)나 원유관(遠遊冠) 강사포에 소지하여 부신(符信)으로서 상서로움을 징험(徵驗)하는 부서(符瑞)로 옥으로 만들었다. 종류를 보면 고대 중국에는 황제에게 대규(大圭)와 진규(鎭圭)가 있었고, 공작(公爵)에게는 환규(桓圭), 후작(侯爵)에게는 신규(信圭), 백작(伯爵)에게는 궁규(躬圭), 자작(子爵)에게는 곡벽(穀璧), 남작(男爵)에게는 포벽(蒲璧)이 있었다. 대규는 정(珽)이라고도 하여 직구(織具)의 하나인 북, 곧 저(杼)와 같은 모양에 위는 뾰족한 것으로 길이 3자였으며, 황제가 천지(天地)에 제사를 지낼 때 대구면(大裘冕)에 이를 꽂고 진규를 들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명대에 와서 면복으로 대구면을 대신하게 되면서 대규의 제는 없어졌다. 진규는 규라고도 하여 위가 삼각형으로 된 직사각형의 옥판에 사방을 편안하게 한다는 뜻에서 사진(四鎭)의 산(山)으로써 탁식하고, 길이 1자 2치로 밑을 황기(黃綺)로 맺고 황기낭(黃綺囊)에 도장(韜藏)하였다. 명대에 와서는 황제의 면복에서 규는 그대로였으나, 피변복(皮弁服)에서 규는 산형 아닌 쌍식문(雙植文)을 등마루에 하고 황기낭에는 금룡문(金龍文)이 있었다. 그리고 금(錦)으로 밑을 맺고는 금낭에 넣은 동형의 무문(無文) 규를 길이로써 구별하였다. 황태자의 것은 길이 9치 5푼, 친왕(親王)의 것은 길이 9치 2푼 5리, 세자·군왕(郡王)의 것은 길이 9치로 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규(圭) (두산백과).

04 『漢韓大辭典(3)』, (서울: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 2000), p.1044.

05 경의선을 만주로 연결하는 압록강 철교는 1911년 완공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압록강철교(鴨綠江鐵橋) (두산백과) 참조.

06 『태극도 통감』(1956), p.17.

07 [네이버 지식백과] 천지망아(天之亡我) (한자성어ㆍ고사명언구사전, 2011. 2. 15 이담북스) 참조. 초패왕의 고사에서 비롯되었다.

08 선천의 모사재인 성사재천 도수가 반대로 뒤바뀌는 일에 대해 상제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선천에는 모사(謀事)가 재인(在人)하고 성사(成事)는 재천(在天)이라’ 하였으되 이제는 모사는 재천하고 성사는 재인이니라.”(교법 3장 35절)

09 교운 2장 14절, 20절. 1984년 3월 25일(음)에 도전님께서 논산에서 둔궤를 찾아 중곡도장으로 가져오셨고 성궤라고 명명하셨다.

10 사면초가(四面楚歌)의 고사이다.

11 역발산 기개세(力拔山兮氣蓋世)와 우혜우혜 내약하(虞兮虞兮柰若何)는 앞에 인용한 채지가 뱃노래에 나오는 구절이다.

12 채지가의 ‘8년풍진’이라는 구절에 해당한다.

13 『사기』 「항우본기」.

14 중국의 역사를 통해 본다면 봉천명과 황제 등극은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초패왕이 황제가 되고자 했음은 『사기』 「항우본기」의 다음과 같은 고사를 통해서 알 수 있다. 秦始皇帝游會稽, 渡浙江, 梁與籍俱觀. 籍曰:彼可取而代也 梁掩其口, 曰:毋妄言, 族矣 梁以此奇籍. 籍長八尺餘, 力能扛鼎, 才氣過人, 雖吳中子弟皆已憚籍矣(진시황이 회계산(會稽山)을 유람하고 절강(浙江)을 건너는데, 항량과 항적이 함께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항적이 말하기를 “저 사람의 자리를 내가 대신할 수 있으리라”라고 하니, 항량이 그 입을 막으며 말하기를 “경망스러운 말을 하지 말라. 삼족(三族)이 멸하게 된다!”라 했다. 그러나 항량은 이 일로 해 항적을 범상치 않은 재목이라고 여겼다. 항적은 키가 8척이 넘고 힘은 커다란 정(鼎)을 들어 올릴 만했으며 재기(才氣)가 범상치 않아 오중의 자제들조차도 이미 모두 항적을 두려워했다.)

15 《대순회보》 173호 (2015), pp.24-25 참조.

16 다음의 두 공사가 1909년에 있었던 사실은 《대순회보》 143호, p.21 참조.

17 행록 3장 31절.

18 교운 1장 20절.

19 이는 전해지는 구전과도 어느 정도 일치한다.

20 영화 ‘화평의 길’ 때문에 도주님이 상제님께 계시로 처음 받으신 주문은 기도주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한 가지 간과하기 쉬운 점은 실제 영화에서도 묘사되어 있듯이 기도주를 계시로 받으시는 시점이 만주 봉천에서의 9년 공부 마지막 즈음이라는 것이다. 『전경』 교운 2장 또한 이러한 사실을 정확하게 뒷받침하는데, 교운 2장 6절에서 도주님이 정사(1917)년 상제님의 삼계대순의 진리를 감오하신 후, 7절에서 한 신인으로부터 구세 제민(救世濟民)의 주문으로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 지기금지 원위대강(侍天主造化定 永世不忘萬事知 至氣今至願爲大降)’의 기도주를 받으시고, 8절에서 정화수를 모시고 기도주를 송독하시면서 “왜 조선으로 돌아가지 않느냐. 태인에 가서 나를 찾으라.”는 상제님의 계시를 받는 것으로 되어있다. 다시 정리하자면 기도주는 대순진리를 감오득도하신 정사년 2월 10일 이후에 받으셨으며, 받은 이후부터는 4월의 귀국행 전까지 2~3개월간 청수를 모시고 송독하신 것으로 『전경』에는 기술되어 있는 것이다. 결국 감오득도를 위한 도주님의 봉천에서의 9년 공부는 기도주에 의한 것은 아닌 것이다. 실제로 도전님께서 “정사년(丁巳年, 1917년) 2월 10일 23세 되시던 해에 득도를 하셨다. 23수는 태을주의 수와 일치한다. 그 주문으로 도를 받으셨다.”(도전님 훈시(1989. 5. 8))고 훈시하신 기록이 있음을 본다면, 도주님께서 50년 공부를 시작하시는 기유년에 태을주를 받으셨다는 추측은 일리가 있는 것이다.   

<대순회보 17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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