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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제님동학농민운동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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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08.27 조회5,44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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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침략과 청일전쟁

 

전봉준이 집강소 통치에 매달려 폐정 개혁에 힘쓰고 있는 동안, 국내의 정세는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일본군의 갑작스런 침입에 놀란 조정이 즉시 철병을 요청하였지만, 일본은 자신들의 안전을 위해서는 조선이 개혁되어 변란이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고 우기면서 이를 거부하였던 것이다. 명백한 주권 침입의 상황 속에서 조정은 일단 일본군의 철병이 선행된 후 개혁을 실시하겠다고 버텼지만, 무력을 앞세운 일본의 요구에 굴복하여 개혁을 우선 시행하기로 하였고, 결국 6월 2일 김홍집을 수반으로 하는 친일정권이 수립되기에 이른다.

 

일본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6월 21일 밤에 총과 대포를 앞세우고 경복궁을 점령한 뒤, 고종(高宗)01을 강제로 연금하고 협박하여 조선 관군의 무장을 해제하게 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런 일본의 침략 행위에 놀란 백성들의 민심은 물 끓듯 요동쳤고, 폐정 개혁에 힘쓰던 전봉준도 서서히 대일항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6월 23일 일본은 선전포고도 없이 아산만에서 청나라 군함 2척을 공격 · 침몰시킴으로써 청일전쟁도 일으켰다. 일본군은 6월 26일 충남 성환(成歡)에서 벌어진 첫 육상전투에서 이겼고, 8월의 평양전투와 황해도의 해양도 부근 해상에서 벌인 황해해전까지 모두 승리하여 청군을 한반도에서 완전히 몰아내었다.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 이하응(1820~1898)은 청나라마저 쫓겨난 상황에서, 일본을 몰아내고 나라를 구하는 길은 동학군들을 서울로 불러들이는 길밖에 없다고 판단하고, 전봉준에게 은밀히 사람을 보내 다시 봉기할 것을 촉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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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남 성환에서 청군을 공격하기 위해 도열한 일본군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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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양에서 청군을 공격하는 일본군을 그린 그림

 

 

제2차 동학농민운동과 우금치 대혈투

 

국가의 위난(危難)을 더 이상 지켜볼 수 없었던 전봉준은 백성들의 생활을 생각하여 일단 추수기가 될 때까지 참고 기다렸다가, 9월 4일 전북 삼례에서 4천 명의 동학군을 모아 다시 봉기를 일으켰다. 전봉준은 1차 봉기 때 가담하지 않았던 북접에도 봉기를 요청하였으나 북접의 최시형은 “남접을 토벌하라.”는 극언까지 불사하며 이에 반대하였다. 그러나 최시형의 지시에 따르지 않고 곳곳에서 봉기에 가담하는 동학도들의 숫자가 크게 늘어나자, 9월 18일 최시형도 전봉준과 협력하여 봉기할 것을 결심하기에 이른다. 드디어 9월 말에는 남접 전봉준의 10만 동학과 북접 손병희의 10만 동학이 편성되었다.

 

남북접 연합군은 10월 9일 논산에서 합류하여 서울로 가는 길목인 공주를 점령하기 위해 진격하였고, 그중 손화중과 최경선의 부대는 일본군이 배후를 치고 들어올 것을 대비하여 북상하지 않고 나주로 내려가 진을 쳤다. 한편 동학군의 또 다른 중요한 축을 담당하고 있던 김개남의 부대는 전봉준의 합류 요청을 거절하고 남원에 그냥 머물러 있었는데, 이는 김개남이 “남원을 점령하고 난 뒤 49일을 머물러야 한다.”는 비결서를 믿은 탓이었다. 어쨌든 제2차 동학농민운동에서 김개남은 전봉준이 자신의 뜻과 다르다고 하여 연합하지 않고 계속 독자적인 길을 걸었는데, 이는 전봉준에게 두고두고 아쉬움을 주는 일이었다.

 

10월 중순, 일본군은 조정을 압박하여 자신들에게 동학군을 진압해 달라는 공문을 보내도록 하였다. 이 공문은 즉시 일본 본국에 보내졌고, 조선에 파병된 일본군에게 돌아온 답신은 ‘모조리 살육하라!’였다. 일본군은 조정을 강요하여 동학군들을 진압하기 위해 관군도 참여하도록 만들었고, 동학군이 북상하자 일본군과 관군은 서울에서 내려와 공주 우금치 일대를 중심으로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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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금치 전투는 서울의 진격 여부를 결정지을 수 있기 때문에 동학군들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중요한 싸움이었다. 동학군의 공주 공격은 10월 23일부터 25일까지 이인, 대교 등지의 전투를 시작으로, 11월 8일부터 9일에 있었던 우금치 대혈투까지 이어졌다.

 

특히 우금치 대혈투는 11월 9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2시 사이에 절정에 달했는데, 사실 이것은 전투가 아니라 마치 호랑이와 토끼의 싸움과 같이 일본군과 관군이 일방적으로 동학군들을 학살하는 형태로 진행되다시피 하였다.

 

동학군들은 숫자는 많았으나 군율이 없고 훈련도 되어있지 않은 오합지졸이었으므로, 처음부터 조직적으로 훈련받은 일본군과 관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더구나 양쪽 진영이 보유하고 있는 무기의 성능에도 큰 차이가 났는데, 동학군은 관군으로부터 노획한 근대식 화기도 부분 소유하였지만 극소수였을 뿐이고 대부분은 조총, 창, 죽창을 가지고 있었다. 동학군들이 가진 조총의 사거리는 100보 정도에 불과하고 재장전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그러나 일본군들이 가진 총의 사거리는 400~500보를 넘었으며 불을 붙이는 번거로움이 없이 연속 사격이 가능했다. 그러다 보니 뛰어난 성능의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 · 관군과는 이미 그 격차를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었는데, 전투가 개시되기 전부터 일본군 1명이 동학군 수천 명을 감당할 수 있고, 관군 1명은 수십 명을 상대할 수 있다는 극단적인 전력 평가도 나오고 있었던 터였다.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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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전력 열세 상황은 우금치 전투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동학군들은 사거리가 현저하게 떨어지는 조총을 사용하기 위해 일단 상대와의 간격을 좁혀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목숨을 걸고 돌격을 감행해야 했다. 동학군들의 1차 돌격대가 일본군과 관군들의 총탄 세례에 쓰러지면, 다시 2차 돌격대가 밀려갔고, 이들도 쓰러지면 다시 3차 돌격대가 밀려갔다. 그러나 그들은 일본군의 우세한 화력에 밀려 끝내 조총의 사거리를 확보하지 못한 채 중간에서 차례차례 죽어갔다. 이때 돌격해 들어갔던 동학군들이 얼마나 저돌적이었는지를, 당시 전투에 참여한 관군의 선봉장이었던 이규태는 이렇게 증언하였다.

 

끊임없는 돌격에 동쪽에서 소리치면 서쪽에서 호응하고, 왼쪽에서 번쩍하다가 금세 오른쪽으로 튀어나와 깃발을 흔들고 북을 울리면서 죽음을 무릅쓰고 앞을 다투어 올라왔다. 도대체 저들은 무슨 의뢰와 무슨 담략을 지녔기에 저리할 수 있었단 말인가. 지금 그때 그들의 행동을 말하려 하니 생각만 해도 뼈가 떨리고 마음이 서늘해진다.03

 

훗날 전봉준은 사로잡힌 뒤 심문 과정에서 우금치 전투에 대해, 1차 접전 후 자신이 직접 지휘한 1만여 명 동학군을 점고해보니 3천 명만 남아 있었고, 다시 2차 접전 후 점고해 보니 5백 명에 불과했다고 회고하였다.

 

어쨌든 전력 차이를 극복하지 못한 채 어쩔 수 없이 전봉준은 논산으로 물러나야 했는데, 이로써 제2차 동학농민운동은 급격히 내리막길을 걷게 된다.

 

 

동학군들의 패퇴와 전봉준의 죽음

 

전봉준은 남은 병력을 이끌고 계속해서 전주, 원평으로 후퇴했다. 원평 싸움은 11월 25일 아침 9시경부터 오후 4시까지 이어졌는데 동학군들은 원평 조무산의 구미란 마을 뒤 능선에 진을 치고 있다가 다시 패하였고 태인에서 벌인 전투를 끝으로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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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준은 수행원 몇 명과 함께 입암산성, 백양사로 피신하였다가 12월 1일에 순창군 쌍치면 피노리로 숨어 들어갔다. 그곳에서 옛 친구 김경천을 만났는데, 김경천은 전봉준에게 걸린 많은 현상금을 탐내어 이웃에 살던 한신현에게 전봉준을 밀고하였고, 한신현은 마을 사람들을 동원하여 전봉준을 포위했다. 전봉준은 담을 뛰어넘어 도피하려다가 다리를 얻어맞고 붙잡히고 말았으니 때는 1894년 12월 2일이었다.

 

훗날 상제님께서는 전봉준이 잡힌 피노리에 가셔서 “이 곳에서 전명숙이 잡혔도다. 그는 사명기(司命旗)가 없어서 포한(抱恨)하였나니 이제 그 기를 세워주고 해원케 하노라.”고 하시며,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잡힌 전봉준의 한을 풀어주셨다.04

 

한편 손화중도 11월 전봉준의 우금치 전투 패전 후, 나주성을 포위하고 공격하였다가 패하고 12월 1일 농민군을 해산한 채 도피하였다. 그는 고창 안현리(鞍峴里)에 숨어 있다가 전봉준이 잡혔다는 소식을 듣고는 대세가 기울었음을 알고, 12월 11일에 자신을 숨겨주었던 이봉우에게 은혜를 보답코자 자신을 고발하도록 한 뒤 스스로 붙잡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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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준의 합류 요청을 거절하고 남원에 머물고 있던 김개남도 10월 10일경 오천여 명의 동학군들을 이끌고 북상하였다가 11월 13일 청주 전투에서 패하여 태인으로 숨어 들어갔다. 12월 1일, 김개남은 임병찬의 고발로 관군에 사로잡혀 이송되었으나, 서울까지 가지 못하고 중간에서 처형당했다. 전봉준, 손화중 등은 서울로 압송되어 재판을 받은 뒤 1895년 3월 30일 새벽에 최후를 맞이했으니, 이것으로 1, 2차에 걸친 동학농민운동은 완전히 막을 내리게 되었다.

 

 

무자비한 소탕 작전과 희생되는 양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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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군 지도자들은 체포되었으며 동학군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이제 남은 것은 일본군과 관군 그리고 보수 유생들이 중심이 된 민보군이 벌이는 동학군 색출·소탕 작전이었다. 동학군에 가담했던 자는 말할 것도 없고, 동학의 경전이나 그와 관련된 작은 쪽지 하나를 가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체포되었으며 그 현장에서 즉시 학살당하였다. 동학군들의 재산은 관리의 것이 되었고 집은 불태워졌으며, 그 와중에 일반 백성들도 동학군으로 오인 받아 죽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1년간에 걸친 동학농민운동으로 희생된 사람들의 숫자는 지금까지도 정확하게 파악되지 않고 있다. 다만 30~40만 명 사이로 추정될 뿐이다. 당시의 참혹했던 상황의 일각(一角)이 『전경』에는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다.

 

오월이 되어 상제께서 본댁을 떠나셨으나 가신 곳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도다. 그리하여 매우 염려하는 상제의 부친을 보고 유덕안(兪德安)은 대신하여 상제를 찾으려고 의관을 갖추고 객망리를 떠났도다. 그가 태인(泰仁) 강심리에 이르렀을 때 관군은 의병 두 사람을 잡고 덕안을 동학군으로 몰고 포박하여 전주 용머리 고개 임시 형장으로 끌고 가니라. 두 사람이 먼저 참형되고 덕안의 차례가 되었을 찰나에 하늘이 캄캄하여지고 천둥치고 번개가 번쩍이며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지라. 관군들은 지레 겁을 먹고 도망하였으나 비바람은 그치지 않고 밤은 깊어 사방이 보이지 않아 덕안이 정신을 차리니 두 사람의 시체만이 짙은 어둠 속에 뒹굴어 있었도다. 무서움에 쫓겨 그는 먼 곳에서 비치는 등불을 향하여 지친 몸을 이끌어가니 날이 새기 시작하니라. 등불은 간데 온데 없는 산중이었도다. 그제서야 그는 정신을 차리고 포박을 풀고 재생의 기쁨을 안고 집에 돌아왔느니라. 그는 이 재생의 인도를 호랑이가 불빛을 비쳐 준 것으로 믿었도다. 얼마 후 상제께서 객망리에 홀연히 돌아오셨도다. 상제께서 덕안을 보시고 “험한 시국에 위급한 환경을 당하여 고통이 많았도다.” 말씀하며 위로 하시니 그는 더욱 자신의 재생을 상제의 덕화라고 굳게 믿으며 재생의 감격을 되새기니라. 당시는 가릴 사이 없이 마구 죽이는 판국이었도다.(행록 1장 26절)

 

불과 몇 달 전 세상은 동학군들의 것이었고, 불나방이 불에 뛰어들 듯 수많은 사람들이 앞 다투어 동학에 뛰어들었었다. 그러나 세상이 이렇게 급변할 줄 누가 알았으랴! 오직 상제님께서는 눈이 내리는 시기에 동학이 패망할 것을 알려주시며 동학에 가담하는 것을 적극 말리셨으니, 상제님의 예지를 믿은 불과 몇몇 사람들만이 이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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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조선 제26대 왕, 재위 1863~1907

02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39권, 1999, pp.481~482

03 박맹수, 「동학농민혁명과 북접일기」, 『북접일기』, 2006, 태안군, pp.206~207

04 공사 3장 2절.

 

 

<대순회보 5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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