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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제님도술 배우기를 원한 강영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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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11.03 조회3,78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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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대순종교문화연구소


  1903[癸卯]년 정월이 되자 상제님께서는 날마다 백지 두서너 장에 글을 쓰시거나 또는 그림[符]을 그려 손이나 무에 먹물을 묻혀 그것들에 찍고 불사르셨다. 종도들이 그 뜻을 여쭈어 물으니 상제님께서는 “그것은 천지공사에 신명을 부르는 부호이노라.”고 알려주셨다. 

  대개 상제님께서는 일정한 법에 따라 공사를 보시지 않으셨다. 다만 종이를 많이 쓰시곤 하셨는데,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리켜 종이만 보면 사지를 못 쓴다고 비방하자 상제님께서는 “내가 신미생(辛未生)이라. 옛적부터 미(未)를 양이라 하나니 양은 종이를 잘 먹느니라.”고 받아넘기실 뿐 결코 탓하지 않으셨다. 상제님께서 천지공사를 시행하시기 전에는 상제님의 신이(神異)한 능력에 감동한 많은 사람들이 상제님을 신인(神人)이라 하여 받들던 터였다. 그러나 그들은 상제님의 도술만 신기해 할 뿐 참혹해진 세상을 건지기 위해 하느님께서 펼치시는 미증유(未曾有)의 천지공사를 이해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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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날 상제님의 아우 강영학(姜永學)이 상제님께 도술을 가르쳐주시기를 애원한 적이 있었다. 상제님께서는 부채 한 개에 학을 그려주시고 “집에 가서 부치되 너는 「칠성경(七星經)」02의 무곡(武曲) 파군(破軍)까지 읽고 또 『대학(大學)』을 읽으라. 그러면 도에 통하리라.”고 일러 주셨다. 영학은 돌아가는 길에 상제님의 처남 정남기(鄭南基)의 집으로 갔다. 영학은 1897[丁酉]년 무렵 사돈인 남기의 집에서 김형렬의 아들 찬문 등과 함께 상제님께 글을 배운 적도 있었기에 인사차 들렀던 것이었다.  
  그런데 남기의 아들이 영학의 부채를 탐내어 빼앗아 버렸다. 영학이 그 부채에 얽힌 이야기를 말하자 남기의 아들은 더욱 호기심을 일으켜 주지 않으니 하는 수 없이 그는 부채를 빼앗긴 채 그냥 집으로 돌아갔다. 남기의 아들은 부채를 부치면서 대학 몇 편을 읽어보았더니 금새 신력(神力)이 통하여 비를 내리게 하는 등 신명을 부릴 수 있게 되었다. 남기는 기뻐하여 상제님의 도력을 빼앗고자 아들과 함께 상제님께서 지내시던 형렬의 집 하운동으로 갔다. 때마침 상제님께서는 우묵골(宇谷)03로부터 하운동으로 오고 계셨다. 남기의 아들이 상제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겁을 먹고 도망가니 남기가 붙들고 와서 상제님과 만나게 하였다. 상제님께서 남기의 속셈을 꿰뚫고 그의 무의함을 꾸짖으시며 그 아들의 신력도 다 거두신 후에 집으로 돌려 보내셨다. 이런 소동을 일으키고도 영학은 도의 진리를 익히는 것보다 계속 술수(術數)를 배우기를 갈망했다. 

  1904[甲辰]년 2월에 상제님께서는 영학에게 다시 『대학』을 읽도록 명하셨다. 상제님께서 항상 “『서전(書傳)』 「서문」을 많이 읽으면 도에 통하고 『대학』 「상장(上章)」을 되풀이 읽으면 활연관통(豁然貫通)04한다.”고 말씀을 하셨던 바로 그 『대학』이었다. 그러나 영학은 상제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황주죽루기(黃州竹樓記)」05와 「엄자릉묘기(嚴子陵廟記)」06를 읽었다. 이를 아신 상제님께서 “대(竹)는 죽을 때 바꾸어 가는 말이요, 묘기(廟記)는 제문이므로 멀지 않아 영학은 죽을 것이라.” 하시며 이도삼(李道三, 1865∼1943)을 불러 ‘骨暴沙場纏有草 魂返故國弔無人(뼈가 모래사장에 나 뒹굴고 풀에 얽혀 있도다. 혼은 고국에 돌아오건만 조문하는 사람이 없네.)’이라는 시 한 귀를 영학에게 전하게 하시어 그 잘못을 깨닫게 하셨다. 그러나 영학은 상제님의 말씀을 끝끝내 듣지 않고 계속 술서(術書)를 읽다가 결국 죽게 되었다. 상제님께서 영학에게 오셔서 그의 입에 엄지손가락을 대시고 “이 손가락을 떼면 곧 죽을 것이니 뜻에 있는 대로 유언하라.” 하셨다. 영학이 부모에게 할 말을 모두 마치자 상제님께서는 엄지손가락을 떼셨고 그는 곧 숨을 거두었다.   

  <대순회보> 9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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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거짓으로 행세한 지난날에 세상 사람이 나를 신인이라 하더니 참으로 행하는 오늘날에는 도리어 광인이라 이르노라.(행록 3장 34절)

02 북두칠성이 인간의 길흉화복을 맡았다 하여, 제사를 행하거나 개인적인 소원을 빌 때 읽은 경. 『도장(道藏)』에 실려 있는 칠성신앙 관련 경은 「태상현령북두본명연생진경(太上玄靈北斗本命延生眞經)」, 「태상북두이십팔장경(太上北斗二十八章經)」, 「북두치법무위경(北斗治法武威經)」, 「북두구황은휘경(北斗九皇隱諱經)」 등이나, 이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태상현령북두본명연생진경」이고 우리나라에 주로 유통된 것도 이 경이다. 이 경을 설한 주체는 태상노군(太上老君)으로 되어 있고 인간의 선악을 심판하여 복록과 재앙을 내리는 권능이 북두칠성에게 있음을 설하고 있는 것이 주 내용이다. 이 경을 독송하면 재앙을 면하고 복록을 누리며 결국 구제받을 수 있다고 한다. 「태상현령북두본명연생진경」에는 <북두주(北斗呪)>가 들어 있는데, 이 주문은 현재 대순진리회에서 사용하고 있는 칠성주와 거의 동일한 형태를 띠고 있다. 北斗九辰 中天大神 上朝金闕 下覆崑崙 調理綱紀 統制乾坤 大魁貪狼 巨文祿存 文曲廉貞 武曲破軍 高上玉皇 紫微帝君 大周天界 細入微塵 何災不滅 何福不臻 元皇正氣 來合我身 天所指 晝夜相輪 俗居小人 好道求靈 願見尊儀 永保長生 三台虛精 六旬曲生 生我養我 護我身形 魁尊帝急急如律令
03 現 전북 전주시 완산구 삼천동
04 환하게 통하여 도(道)를 깨달음.
05 중국 북송 때 왕우칭(王禹, 954~1001)이 호북성(湖北省)의 황주(黃州)로 좌천되어 그곳 태수로 있을 때, 황주의 죽루(竹樓: 대나무로 지붕을 덮은 누각)에 대해서 쓴 기문(記文). 전문(全文)은 『고문진보(古文眞寶)』에 실려 있음.

06 중국 송(宋)나라의 범중엄(范仲淹, 989~1052)이 절강(浙江)의 태수였을 때, 엄광(嚴光: 엄자능)의 사당을 짓고, 그 후손을 불러 제사를 지내도록 하면서 지은 글. 「엄자능묘기」는 『고문진보(古文眞寶)』에 「엄선생사당기(嚴先生祠堂記)」라는 이름으로 소개되어 있다. 엄광은 절강성 여항현(餘抗縣)의 사람으로 후한(後漢)의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와 동문수학한 사이이다. 유수는 제위에 올라 황제가 된 뒤, 수소문 끝에 제(齊) 지방에서 낚시질로 은거생활을 하던 엄광을 찾아 궁중에 머무르게 하고, 함께 자면서 벼슬을 받도록 간곡히 부탁하였으나 엄광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날 밤 엄광이 황제와 같이 잠을 자다가 황제의 배 위에 발을 올려놓았다. 그 다음날 천문을 관장하는 태사(太史)가 “간밤에 천상을 보았는데 객성이 북극성을 범하였습니다. 별일이 없었습니까?” 하고 황제에게 물었다. 황제는 웃으며 “나의 친구 엄자능과 함께 잤을 뿐이다.” 하고 말했다. 엄광은 끝내 황제의 권유를 거절하고 절강의 부춘산(富春山)으로 돌아가 밭 갈고 낚시질하며 살았다고 하는데, 지금도 그 낚싯대와 사당이 남아 있다. 엄광은 본래의 성이 장(莊)이었으나, 후한 명제의 이름인 ‘장’을 피하여 ‘엄’이라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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