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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제님진보회(進步會)와 일진회(一進會)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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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11.03 조회4,26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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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대순종교문화연구소 
 

  진보회와 일진회는 원래 성격이 전혀 다른 단체들이었다. 그런데 진보회가 1904년 여름에 설립되어 그해 겨울에 일진회에 흡수 합병되어 존속 기간이 짧았기 때문에, 진보회와 일진회는 서로 혼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 글에서는 두 단체를 구분하기 위하여 1904년 12월 이전 즉 두 단체가 합병하기 전을 ‘진보회’와 ‘원(原)일진회’라 부르고, 합병한 후는 모두 ‘일진회’로 표기하기로 한다.  


  1904[甲辰]년 여름이 되자 진보회(進步會)가 발족되었다. 진보회는 겉으로는 단발흑의(斷髮黑衣: 상투를 자르고 검은 옷을 입음)로 다니면서 민족 개화운동단체임을 표방했지만, 실은 동학을 재건하기 위해 손병희의 사주로 설립된 단체였다. 
  손병희(孫秉熙)는 10년 전 동학농민운동의 실패로 일본에 망명해 있던 차에, 1903[癸卯]년 12월 러일전쟁을 기회로01 동학 교단을 재건하기 위하여 민회(民會) 설립을 추진하기 시작했었다. 그는 1904년 1∼2월 경 대동회(大同會)를 설립하고자 하였으나 실패하였고, 6월에는 중립회(中立會)를 설립하였으나 동학 상층부의 의견 대립으로 실제 활동까지는 만들어내지 못하다가, 7∼8월이 되어서야 비로소 진보회(進步會)를 발족하였다.02 이로써 동학농민운동 이후 정부로부터의 지속적인 탄압을 피해 숨어있던 동학도들은 진보회로 모일 수 있게 되었다. 
  이때 김형렬은 진보회에 가입하기 위해 원평(院平)03에 모여 있는 동학도들을 보고, 상제님께 그 사실을 알려드렸다. 그러자 상제님께서는 “그네들로 하여금 앞으로 갑오(甲午: 1894년 동학농민운동)와 같은 약탈의 민폐를 없애고 저희들 각자가 자기의 재산을 쓰게 하리라. 내가 먼저 모범을 지어야 하리라.” 말씀하시고 본댁의 살림살이와 약간의 전답을 팔아 그 돈으로 전주부(全州府)04에 가셔서 지나가는 걸인에게 일일이 나누어 주셨다.  
  과거 동학농민운동 때는 동학군들이 부자들을 강제로 동학에 가입시키고 찬조금을 내게 하거나 혹은 아예 무력으로 재물을 강탈하는 사례가 많았다. 그러나 진보회의 경우는 달랐다. 진보회원들은 약탈하지 않고 자기 재산으로 행동하였으니, 각자 옷 꾸러미를 휴대하고 다니며 밥값도 스스로 지불했으며05 활동을 위해 한 사람당 월 10전(錢)씩 회비도 내었던 것이다.06 또 각지의 부자들이 당시 혼란한 시국에 자신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존할 방책으로 진보회에 가입하여 돈을 대었기 때문에 진보회는 재정적으로도 별 어려움이 없었다. 과거 10년 전의 약탈이 또 다시 일어나지 않을까 걱정하던 전주부의 사람들은 이 일로 인해 상제님께 감복하면서 상제님을 더욱 공경하게 되었다. 
  동학 단체라는 사실을 감추어야 했던 진보회는 민회(民會) 조직으로 뿌리를 내리고 사회적으로 강력한 힘을 갖추기 위해 스스로 문명개화 활동을 하는 단체임을 널리 표방했다. 이에 따라 진보회원들은 문명개화의 상징으로 검은 현대식 옷을 입고 다녔다. 진보회가 발족되었다는 소식을 들으신 상제님께서는 속옷을 검은 옷으로, 외의(外衣)를 흰 옷으로 지어 입으시고는 하늘을 가리키시며 “구름의 안이 검고 밖이 흰 것은 나를 모형한 것이니라.”고 말씀하시며, 관을 버리시고 대삿갓을 쓰고 다니셨다.

  1860[庚申]년에 상제님으로부터 제세대도(濟世大道)를 계시 받은 최제우(崔濟愚)는 동학을 폈으나 유교의 전헌(典憲: 법 또는 규범)을 넘지 못해 대도(大道)의 참 뜻을 밝히지 못했고, 상제님께서는 천명(天命)과 신교(神敎)를 거두시고 직접 인간의 몸으로 강세하시어 상생대도(相生大道)를 직접 펼치셨다. 그러나 동학도들은 그러한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한 채 여전히 최제우의 가르침만을 따르고 있었고, 그 가르침도 최시형(崔時亨, 1827~1898)과 손병희를 거치면서 변화되고 있었다. 그 와중에 동학농민운동 때는 수십 만 명의 인명 피해까지 보게 되었고 그 후로도 관으로부터 지속적인 탄압을 받았다. 상제님께서는 이런 동학도들을 안쓰럽게 여기고 계셨다. 특히 진보회는 얼마 지나지 않아 종교 단체가 아닌 정치 단체, 그것도 매국에 앞장서는 친일 단체로 전락할 운명이었으니 상제님께서 대삿갓을 쓰심은 이들의 불행한 미래를 암시하셨던 것은 아니셨을까?07 

  한편 손병희는 진보회를 설립하면서 진보회원들에게 “대의(大義)를 일으키기 위해서는 일반 도인의 결속이 필요하고, 이들의 결속을 공고히 하려면 단발로 맹세하는 것이 필요하다. (단발은) 세계 문명에 참여하는 표준이요 또한 (단발을 통하여) 단결을 굳게 하여 회원의 심지를 일치케 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상투를 자르고 단발을 할 것을 강조하였다.08 이 무렵 상제님께서는 원평(院平)에 있는 김성보(金聖甫)의 집에 머물고 계셨다. 그때 상제님의 처남 정남기(鄭南基)는 진보회원이 되어 손병희의 지시에 따라 단발을 하게 되었다. 정남기는 상제님께도 진보회 가입을 강권하면서 군중과 합세하여 상제님께 달려들어 상투를 가위로 깎으려 하는 불경한 짓을 저질렀다. 1년 전 강영학(姜永學)이 상제님께 도술을 부리는 부채를 받았을 때 정남기의 아들이 그 부채를 빼앗아 신력(神力)을 통하게 된 적이 있었다. 이를 본 정남기는 자신의 아들을 이용해 상제님의 도력을 뺏으려 했다가 실패하고 상제님께 크게 꾸짖음을 당한 일이 있었으니, 그는 상제님의 공사에 몇 번 시종한 적은 있었으나 실은 불의한 인물이었던 것이다.09 정남기는 상제님의 상투를 아무리 베어내려 하였어도 신이(神異)하게도 상제님의 상투는 꿈적도 하지 않았다. 이에 상제님께서는 친히 머리카락 한 줌을 베어 주시며 “이것으로써 여러 사람의 뜻을 풀어주노라.”고 말씀하셨다.

  당시 사회에서 상투를 자르는 단발은 ‘문명의 충돌’이라고 할 만큼 전통과 문명개화가 부딪히는 첨예한 문제였다. 단발령은 이미 6년 전인 1898[乙未]년부터 시행되어 온 조치였다. 원래 우리나라에서 수천 년 전부터 관습으로 내려온 상투는 성인(成人)·신분의 상징만이 아니라 부모에 대한 효의 실천을 의미하는 종교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다. 따라서 단발령이 시행되자 최익현 같은 유학의 거두(巨頭)는 내 목은 자를 수 있으나 내 머리칼은 자를 수 없다고 반발했고, 많은 관리들도 불효막심한 행위라 하여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으며, 전국의 많은 유생과 지방민들은 의병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단발령의 강제 시행 많은 국민의 등을 돌리게 만들었고 이후 정부는 민심을 잃어 각종 개혁 시책을 제대로 펼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단발령이 사회의 극심한 혼란과 갈등을 야기시켰지만, 이것은 원래 정부가 의도했던 것은 아니었다. 당시 김홍집 내각 체제였던 정부가 내세운 단발령의 명분은 ‘위생에 이롭고 일하기에 편리하다’는 것이었고, 정부 고시 방식도 강제가 아니라 고종이 솔선하고 일반 백성에게 권한다는 형식이었다. 원래 김홍집 등 관료들은 단발의 필요성은 인정했으나 보수적인 지방 유생들과 지방민들의 강력한 반발이 불 보듯 뻔한 일이었으므로, 이를 성급히 강행하지 말고 시간을 두고 서서히 시행하자는 쪽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김홍집 정부의 배후에 있던 일본은 군대를 동원하여 대궐을 포위하고 살벌한 분위기 속에 고종과 왕태자, 대원군의 머리를 강제로 깎아버리고는 단발령을 급진적·강제적으로 시행하도록 만들었다.

  일본은 단발령의 강제 시행이 전통과의 충돌로 인한 대혼란을 일으킬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일본은 정작 자국에서는 단발령을 강제 ·급진적으로 시행하지 않았다. 그들은 1871년 단발령을 반포하였으나 먼저 관리들이 솔선하여 단발을 한 후 서서히 국민들을 계몽하여 나갔다. 시간이 지나자 국민들은 자연스레 단발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었고, 나중에는 오히려 상투를 튼 사람들이 조롱거리가 되었다. 자국에서는 단발령의 부작용을 최소화하고자 했던 일본이 조선에서는 무리하게 단발령을 강제로 시행한 것은, 조선에 혼란을 야기시키고 이를 계기로 자국 거류민들의 보호를 구실삼아 일본군을 더 증파하여 조선을 확실히 장악하고자 하는 속셈 때문이었다. 실제로 일본은 단발령의 강제 시행으로 지방 의병 봉기가 늘어나자 이를 구실로 일본군을 증원하여 조선 내에서 거의 유일한 반일 저항집단인 의병을 초토화시키고, 조선 정부에 대해서 더 많은 압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10 

  이와 같은 사회 배경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 조선에서의 단발은 사회적 갈등을 심각하게 일으키는 사안이었고, 이런 상황에서 정남기는 진보회원이 되어 단발을 하고 또 강제로 상제님의 상투를 자르려는 패악을 저질렀다. 그러자 상제님께서는 여러 사람의 뜻을 풀어주신다고 하시며 스스로 머리카락을 잘라주셨으니, 이것은 전통과의 마찰에서 오는 불협화음을 직접 해소코자 하셨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상제님께서는 정남기를 돌아보시고 오히려 잘 타이르시며 지금 진보회에서 탈퇴하지 않으면 앞으로 큰 낭패를 겪게 되리라고 그의 앞날까지 걱정해 주셨다. 정남기는 상제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고 후에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하다가 결국 패가망신 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대순회보> 10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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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러일전쟁의 발발은 계묘년 12월 22일(양력 1904년 2월 8일)이다.
02 이용창, 『동학·천도교단의 민회설립운동과 정치세력화 운동』, 중앙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04, pp.80∼88 참고.
03 現 전북 김제시 금산면 원평리.
04 지금의 전주는 조선 초기인 1403년 이후부터 1914년 행정구역이 개편될 때까지 ‘전주부(全州府)’라고 불렸다.
05 이용창의 글, p.186 참고.
06 대한매일신보 1904년 11월 16일자 참고.

07 진보회와 일진회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상생의 길』 제2호, 「일진회에 대하여」(2004) 참고.

08 이용창의 글, pp.106∼109 참고.

09 「도술 배우기를 원한 강영학」, 『대순회보』 96호, pp.12∼15 참고 
10 상세한 내용은 이민원, 「상투와 단발령」, 『사학지』 Vol 31, 단국사학회, 1998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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