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물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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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손재숙 작성일2018.02.19 조회4,735회 댓글0건본문
장안 방면 선사 손재숙
“어머니 집안 대물림이라는 것이 참 무서운 것 같습니다.”
몇 년 전에 시어머니께 드린 말씀이었다. 이 말에 시어머니께서는 “아이고, 야야. 공자 앞에 문자 쓰냐.”라고 하시면서 “1956년 그때 내가 시집와서 보니 네 시할아버지가 육 형제였는데, 전부 원수가 되어 한동네에 살면서 보지도 않고 살고 있더라. 그래서 서로 안 본다고 멕시코로 이민까지 가버리더라. 우리 집안이 이렇다. 너희 시아버지랑 시백부도 서로 왕래하지 않고 살았다”라고 한탄조로 말씀하셨다. 지금의 내 남편도 안 보고 살아가는 형제들이 있다. 장손도 15년 전 부모님의 이혼으로 김씨 집안과 왕래가 없게 되면서 이러한 집안의 대물림이 시작된 것이다.
18년 전 아주버님과 형님이 이혼하시고 얼마 되지 않아 아주버님이 뇌출혈로 쓰러지게 되면서 병원생활이 시작되었다. 아주버님 자식들은 엄마를 따라가 15년 넘게 왕래가 없었다. 어느 날 내 큰아들이 궁금한 듯 물었다.
“엄마, 우리 집안은 왜 이래요? 다들 이혼하고 남들처럼 평범하지 않고 명절 때도 잘 만나지도 않네요. 저 어릴 때가 가끔 생각나는데 모든 가족이 다 모여서 재미있었는데 지금은 명절에 할머니 집에 가도 마음이 편하지 않아요.”
나는 아들에게 우리 집안의 대물림에 관해 이야기해주었고, 그것이 우리 부부가 대순진리회에서 수도하는 또 다른 이유라고 대답해주었다. 그러면서 아들에게 멀리 경기도에 있어서 자주 올 수는 없지만, 월성을 모셔보라고 여러 번 이야기해주었다. 그럴 때마다 아들은 대순진리회가 무엇을 하는 곳인지도 모르겠고, 이렇다 할 관심이 없으니 그냥 엄마 아빠만 하시라고 하면서 대화가 끝나곤 했다.
우리 부부는 요양병원에 입원해 계시는 아주버님을 한 달에 서너 번씩 들여다 보곤 했다. 6개월 전부터 아주버님 병원에 방문해 드시고 싶은 것 조금씩 드시게 하다 보니 전적으로 병구완을 우리가 맡게 된 것이다. 병원도 3년 전에 회관 옆으로 옮겨 오게 되었다. 방면 선감께서는 도 사업을 하는데 챙겨야 하는 수반도 늘었고 일도 많아진 시점에서 시숙까지 맡게 된 연고가 있을 것이니 잘 생각해보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지금처럼 긴 세월을 지속하다 보면 수도생활도 쉽지 않을 테니 잘 풀릴 수 있게 늘 심고를 드리라고 당부하셨다. 이번 일을 잘 풀어 김씨 집안에 맺혀 있는 일들이 풀릴 수 있는 계기로 삼아 극진히 병간호해 보라고 말씀하셨다.
하루는 요양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환자 상태가 좋지 않으니 큰 병원에서 검사하고 치료를 하고 오라는 내용이었다. 우리는 주례보훈병원에 2주일 동안 입원절차를 밟아 여러 가지 검사를 하고 다시 양정요양병원으로 올 수 있었다.
보훈병원에서는 대소변을 다 받아내야 하는 편마비 환자를 24시간 병간호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했다. 간병협회에 알아보았지만 보훈병원에 나갈 사람이 부족해서 안 되겠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어쩔 수 없이 어머니께서 24시간 병간호를 하시게 되었다. 나는 회관에서 아침회의에 참가하고 선감 교화를 듣고 점심식사 후 보훈병원으로 갈 수 있었다. 아주버님께서 식사를 잘하시게 도와드리고 아주버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분 이야기를 많이 들어 드렸다. 대화 중에 나는 아주버님께 “여주에 있는 영대로 가보세요. 참 좋습니다.”라고 넌지시 말씀드려보았다(마음속으로는 ‘아주버님께서 김씨 집안의 모든 것을 풀어주고 가 주세요’라고 부탁드렸다).
영대가 무엇인지 아는지 모르는지 아주버님이 나만 찾는 것을 어머니께서 보시고 흐뭇해 하셨다. 어머니는 “애미가 큰 욕 본다. 나는 뭔 말을 하면 쥐어박는 소리만 하니까, 내가 싫은지 말을 안 해. 정말 고맙다.”하시면서 눈시울을 적셨다. 기저귀 갈아드릴 때 좀 어색해서 생각을 정리해보았다. ‘아주버님은 환자이시고 나는 간병하는 사람이다.’ 이렇게 생각 정리를 하고 나니 대소변을 다 받아내는 것도 괜찮아졌다.
간병을 하다 보니 병실에 함께 있는 사람들은 내가 간병인인 줄 알았다. 내가 우리 어머니 며느리이고 환자분의 제수씨라는 것을 말씀드리자 모두 놀라면서 요즘 사람들이 누가 저렇게 해주냐고 칭찬을 하면서 “천사다”, ‘세상에 이런 일이’에 나와야 한다고 아우성이었다. 그곳에서 어머니와 아주버님을 비롯해 남편 모두가 나에게 고맙다고 표현하였고, 남편은 집에 와서도 “당신 참 고맙다”는 말을 아끼지 않았다. 남편의 말에 나는 “수도하는 사람으로 뜻을 가지고 하니까 괜찮습니다.”라고 말하니 남편도 “그래 맞다. 우리는 도를 행하는 사람이지 참 고맙소.”라고 맞장구를 쳐주었다.
저녁에는 수반들 챙기고 기도 모시고 집에 오면 새벽 2시! 그래도 생각과 뜻을 세워서 하는 일이다 보니 많이 피곤하지는 않았다. 회관에서 아침 9시에 입도 치성을 모시고 다음 날 아침에 기상해서 나 자신에게 물어보았다. ‘야! 손재숙 너 하는 일이 뭐지? 도를 닦는 사람이면 지금 아주버님 아이들을 찾아서 만나게 해야 하는 것 아니야?’ 그래 맞다. 신랑하고 의논해서 이 일을 해내고 싶었다.
한편, 아주버님께서는 돌아가시기 3일 전부터 의식이 없었다. 아침 10시에 병원에서 연락이 왔다. 아주버님이 곧 돌아가실 것 같다고. 우리 부부는 병원에 들렀다. 산소포화도 숫자가 전혀 없었다. 우리는 급하게 차를 몰고 20년 만에 수정동 집을 찾아가기로 했다. 어머님은 “그 인간들 절대로 찾지 마라. 인간도 아닌 것들이다.”라고 말씀하셨지만, 속마음은 꼭 와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렇지만 길이 많이 변해 수정동 동네를 2시간 가량 돌아다니면서 집을 찾았다. 간절한 마음으로 심고 드렸다. ‘김 씨 조상님! 이 사람들 꼭 만나야 합니다. 꼭 만나게 해주십시오.’ 그때부터 나의 심장은 뛰고 있었다. 순간 남편이 도로가 나서 헷갈렸다고 하면서 아무리 봐도 앞에 있는 저 집인 것 같다면서 손으로 가리켰다. 그 집은 벨도 없는 아날로그 대문이었다. 얼마나 큰 소리로 문을 두드렸는지 이웃집에서 한 분이 불쑥 나오셨다. 그분 말씀은 그 집에 지금 사람이 없고 아이들은 다 결혼해서 나갔으며 엄마만 산다고 말했다. 나는 그분께 그간의 사정을 설명해 드리고 꼭 연락해줄 것을 간곡히 부탁드렸다. 전화번호를 받아왔는데 자기가 동네 반장이라는 말씀에 일이 잘될 것만 같았다.
돌아와서 회관에서 낮 1시 기도를 모시고 내려오니 아주버님이 돌아가셨다고 했다. 그 순간 너무 가슴이 아프고 눈물이 났다. 이 일을 어찌해야 하나 생각하다가 다시 그 반장분께 연락을 드렸다. 아주버님이 돌아가셨으니 꼭 연락을 해주시라고 부탁을 드렸다. 저녁 8시에 어떤 전화를 받게 되었다. 20년 만에 듣는 목소리, 큰조카에게 전화가 온 것이었다.
나는 조심스레 아버지 빈소에 꼭 와 달라고 부탁했다. 부자간에 너무 맺혀 있는 부분이 많아서 선뜻 오겠다는 말은 하지 않고 빈소만 물어보고 전화는 끊어졌다.
조카가 아버지의 마지막 가시는 길을 꼭 보고 영정 앞에서나마 꼭 풀어질 수 있게 온 마음을 다해 심고 드렸다. 자정에 문상 손님이 있어서 식당에 올라가고 내 큰아들이 빈소를 지키고 있었다. 새벽 1시가 넘은 시간에 아주버님 큰딸과 장남이 빈소를 찾은 것이었다. 서로 보지 못한 세월이 20년이다 보니 사촌이지만 서로 알아보지 못했다. 조카가 먼저 내 아들에게 누구냐고 물었고 아들은 돌아가신 저분이 내 큰아버지라고 전했다. 누가 문상 왔다고 해서 내려왔는데 처음에는 조카를 알아보지 못했다. 큰아들이 나에게 “아마도 윤동이 형님 같아요.”라는 말에 나는 “너 윤동이니?” “네! 숙모.”하는 순간 장조카를 부둥켜안고 얼마나 통곡을 했는지 모른다. 아들은 내가 왜 저리 많이 우는지 의아해할 정도였다.
나도 모르게 통곡한 것은 아주버님이 그리 보고 싶어 했고 또 김씨 집안의 대를 이어 내려오던 부모와 자식 간, 형제간에 이어졌던 대물림이 풀어졌다는 기쁨 때문이었다. 나는 울면서 속으로 ‘아주버님 그렇게 보고 싶어 하시던 아이들이 왔습니다.’라고 되뇌었다. 이 글을 적으면서 그 순간을 생각하니 지금도 눈시울이 적셔진다.
다음 날 어머니께서 집에서 주무시고 빈소에 오셨는데 손자 손녀를 안으시고는 많이 우셨다. 20년 만의 재회였으니 말이다. 서로 간 마음의 상처 때문인지 긴말을 이어가지는 못했다. 어머니는 장손 장녀가 빈소를 지키고 있으니 흐뭇해하셨다. 와야 할 사람들이 와있으니 빈소가 훈훈하다고 하시며 어머니는 나에게 “고맙다. 고생 많았다. 애미가 큰일을 했네.”라고 말씀해주셨다.
큰아들도 “엄마, 마산 큰아버지가 말씀하시던데요. 이번에 엄마가 큰아버지 보훈병원 계실 때 정말 고생 많이 하셨다고 하셨대요. 엄마는 누구도 할 수 없는 큰아버지 대소변까지 다 받아내셨어요. 엄마도 힘드셨을 텐데, 할머니께서 병원에서 계실 때 힘드시다고 과일과 전복까지 손수 삶아서 가져다 드렸잖아요. 우리 엄마이지만 정말 대단한 것 같아요.”
그때 나는 예전에도 아들에게 자주 집안 대물림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큰아들이 그 말을 해주자 그날은 나도 자신감이 생겼다. “아들아! 엄마 아빠가 대순진리회에서 도를 닦는 것은 상생적인 삶을 살아 모두가 소통하며 잘되게 하기 위해서야. 하물며 가족 간에 척을 지어 안 보고 산다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잖아. 이런 사소한 앙금부터 풀어서 행복하게 사는 것도 수도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어. 그래서 엄마가 큰아버지 간병을 짧게나마 했지만 마음을 담아서 진심으로 한 거야. 큰아버지께서 살아계셨을 때 만났더라면 더 좋았겠지만 큰아버지께서 다 풀고 가셨단다. 큰아버지 환송 많이 받고 가셨지. 이번 일을 계기로 할머니와 큰누나가 서로 통화도 간간이 한단다. 이것을 소통이라고 하지. 엄마 아빠가 하는 일이 이런 것이야. 아들도 매달 급여 받으면 제일 먼저 월성부터 모셔주면 좋겠구나.”
아들은 “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엄마처럼 회관은 못 나가는데 괜찮습니까?” 나는 “그래 부산 내려와서 시간 될 때 함께 가도 된다.”고 대답해주었다. 어제 아들이 첫 월성을 모셨다. 말로만 했던 교화는 아들 마음을 움직일 수 없었다. 몸으로 행했을 때 상대도 같이 느낀다는 것. 도라는 게 그런 것인가 보다.
아주버님 일이 풀리면서 김씨 집안 형제들은 우애가 좋아졌고, 형, 동생 하면서 통화도 자주 하게 되었다. 어제는 시어머니댁에 다녀왔다. 어머니의 다음 달 성도 미리 모셔오고, 시동생이 형수 주라고 선물을 가져다 놓았다고 한다. 순간 아주버님께서 형제들의 우애를 만들어 주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멀리 영대가 있는 쪽을 바라보면서 아주버님 생각에 흐뭇한 미소가 절로 나왔다. 아주버님 감사합니다.
<대순회보 19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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