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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수로 가족을 지키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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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성귀순 작성일2018.04.10 조회5,58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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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 동해1 방면 차선감 성귀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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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가 을미년이다. 을미적 을미적 한가하게 수도하면 운수 못 받는다고, 정신 똑바로 차리고 수도 잘해야 한다.” 우리 선감께서 하신 말씀이 귓가에 아직도 쟁쟁한데, 벌써 한 해가 지나고 병신년 8월이 되었습니다. 도문(道門)에 들어온 지는 삼십 년하고도 삼 년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작은딸이 5살 때의 일입니다. 작은딸은 밤 12시만 되면 이유 없이 일어나서 울기 시작했습니다. “하늘에서 누군가가 부른다.”라는 것입니다. 밤마다 울부짖으며 뛰어나가는 아이를 안고 저는 혼자 울었습니다. 병원에 가면 몽유병으로 진단을 받았고, 다른 병명은 없었습니다. 치료를 받고 약을 먹어도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남편도 없이 밤마다 딸아이를 안고 씨름을 하니, 너무 힘들어 죽을 것 같았습니다. 멀리 외국 땅에 가족을 위해 고생하고 있는 남편에게 말을 할 수도 없었습니다.

 

매일 밤 씨름을 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을 때, 막내 여동생이 우리 집에 왔습니다.

“은진이 때문에 밤마다 할 짓이 아니다. 밤 12시만 되면 울면서 일어나 밖으로 뛰어나간다. 어째 방법이 없나? 내가 밤잠도 못 자고, 요즘 사는 게 사는 건지, 너무 힘들다.”

“언니, 그렇게 힘들면서 왜 이제 말해요? 형부도 없이 혼자서 얼마나 힘들었어요? 입도치성을 모시고 기도를 한번 해보세요.”

“대순진리회 믿으라고?”

“언니, 조상님께 정성 드리면 빨리 해결할 수 있어요. 날 믿고 한번 해봐요.”

“정말로 괜찮아지나?”

“네. 언니, 내가 언제 거짓말한 적 있어요? 내 말 믿고 해보세요.”

 

동생이 나를 정말 생각하는 것 같기도 하고, 낮도 아니고 밤마다 잠도 못 자니 너무 힘들어 죽을 것 같아서 입도치성을 모셨습니다. 그런데 주문도 어렵고 한밤중에 일어나서 청수를 준비해서 기도하는 것이 너무 힘이 들었습니다. 그래도 안간힘을 다했습니다. 깜박 졸기도 하고 실수도 하고 침을 흘리면서도 기도를 모시려고 몸부림을 쳤습니다. 밤잠이 많아 진짜 힘이 들었지만, 모성본능의 힘으로 견뎌내며 정성 들인 법수를 딸에게 먹이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하루, 이틀이 지나고 일주일이 되었을 때 딸은 더 이상 잠을 자다가 울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누워서 잠깐 찡찡거리다가 다시 잠을 자는 것이었습니다. 너무너무 신기했습니다. 그 뒤로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어려운 주문을 밤낮으로 들고 다니면서 외우기 시작했습니다. 더욱더 정성 드려 기도를 모셨습니다.

 

그 후 작은딸은 너무나 예쁘게 자라 주었습니다. 딸을 보는 사람마다 안아주었고, 예쁘다고 한마디씩 하였습니다. 나는 밤마다 시달리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사했습니다. 더구나 딸이 예쁘게 잘 자라주니 더욱 신이 났습니다. ‘이런 것이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이구나.’ 생각하면서 자신감에 차서 주문도 다 외우고, 상제님 말씀을 가슴에 새기면서 『전경』도 열심히 보았습니다.

 

 

 

어느 날, 『전경』을 보는데 이 구절이 확대되어 눈에 들어오는 것이 아닙니까!

 

“상제께서 김낙범의 아들 영조가 눈에 핏발이 생겨 눈을 덮어 앞을 보지 못하는 것을 보시고 그 안질을 자신의 눈에 옮겨 놓으시고 그의 아들의 안질을 고치셨도다.”(제생 34절)

 

순간 상제님께 고개를 못 들었습니다. 너무나 죄송했습니다. 내가 정성을 드렸기 때문에 딸이 좋아졌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 상제님의 덕화로 나았던 것입니다. 축시기도를 모실 때 ‘죄송합니다.’라고 사죄를 드리고 난 후부터는 더욱 열심히 기도를 모시면서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외국에 나간 남편이 돌아왔습니다.

“여보 어떻게 소식도 없이 빨리 돌아오셨어요?”

“딸들이 보고 싶어서 돌아왔지. 일도 생각보다 잘 마무리되었어.”

그런데 돌아온 남편은 기도 모시는 것을 싫어했고, 그것이 가정불화로 이어졌습니다.

“열심히 성실하게 살면 되지. 기도는 안 해도 된다.”

“당신이 없을 때 은진이랑 밤마다 얼마나 힘이 들었는데, 당신 그걸 알아요?”

“이제 내가 있으니까 괜찮다.”

 

남편은 내 마음을 알아주지 않았고, 말도 통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남편 마음을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내 주장만 내세울 수는 없었습니다. 시간을 두고 남편을 이해시키는 것이 더 현명한 선택이라고 생각하고, 하는 수 없이 기도 시간에는 마음속으로 기도를 모셨습니다. 축시기도 시간에는 자다가 몰래 나와서 심고를 드렸습니다.

 

그 후 우리 가족은 아무 문제없이 동네 사람들이 부러워할 만큼 잘 살았습니다. 딸만 둘이었는데 늦둥이 아들까지 낳아서 행복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영원히 잊지 못할 1999년 12월 26일 오전 10시.

친구 딸 결혼을 축하해 주려고 외출준비를 하는 중이었습니다. 전화 한 통이 걸려왔습니다. 사무실 아가씨였습니다.

“사모님, 사장님한테 사고가 났습니다. 조금 다치셨으니까 놀라지 마시고 중앙병원으로 가 보십시오.”

현장에는 종종 작은 사고들이 있으니까, 조금 다쳤나 보다 생각하고 택시를 타고 병원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큰일이 생긴 것 같았습니다. 세상에 이런 일이! 사람들이 울부짖고, 웅성웅성하고, 저 앞에 보이는 침대에는 흰 천이 덮여 있었습니다. 나는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때 마침 누군가 다가와서 인사를 하며 내 손을 잡고는 말했습니다.

“사모님, 정신 차리십시오. 절 따라오십시오.”

나는 아무런 생각 없이 그 사람 손에 이끌려 병실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사람은 한 침대를 가리켰습니다.

 

“사장님은 저기 계십니다.”

‘흰 천 덮은 사람은 누구지? 우리 신랑은 아니구나.’ 정신이 하나도 없는데도 그 생각은 떠올랐습니다. 나는 “여보.” 하고 부르며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아무런 반응이 없었습니다. 여보, 여보, 여보… 수없이 부르며, 볼을 만지고, 팔을 흔들고, 머리를 잡고 당기며 울부짖어도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몸부림을 치면서 소리를 쳤습니다.

“병주 아빠! 정신 차려 보세요!”

그때 의사 선생님이 다가왔습니다.

“사모님 되십니까? 빨리 큰 병원으로 옮기십시오. 급합니다.”

다른 생각을 할 틈도 없이 우리는 119를 타고 울산대학병원으로 갔습니다. 응급실에 도착해서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의사 선생님께서 말했습니다.

“오늘 밤 넘기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가족들 모두 연락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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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더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맥이 풀리면서 온몸의 힘이 쭉 빠져 버렸습니다. 휴대폰을 들고 연락을 해야 하는데 손가락으로 휴대폰의 숫자가 눌러지지 않는 것입니다. 아무 번호나 눌렀는데 친구였습니다. 그 후 난 정신을 잃고 말았습니다.

 

남편은 회사에 1년 마무리를 잘했다고 좋아하면서 일요일인데도 회사에 나갔습니다. 직원 몇 명과 같이 회사 현장 둘러보고 온다고 나갔는데 이런 사고를 당한 것입니다. 너무나 기가 막히는 사고였습니다. 남편은 침착하고 세심하고 안전을 최고로 생각하는 사람인데 사고라니,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고가 난 이유는 남편 친구의 아들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 아들이 대학생인데 거기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대학생은 아빠 친구인 내 남편에게 칭찬받고 싶었다고 합니다. 일요일인데 회사에 출근해서 사전 지식도 없이 마음대로 유독 가스통 안에 청소한다고 들어갔습니다. 들어가자마자 가스에 질식해 버렸습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남편은 순간 이성을 잃고 안전 장비 없이 친구 아들을 구하러 유독가스통 안에 들어간 것입니다. 침착한 사람인데 실수가 없는 사람인데, 왜 그랬을까? 너무나 억울해서 땅을 치며 통곡했습니다. ‘둘도 없는 친구 아들인데, 자신의 안전을 생각할 시간도 없었겠지?’ 그래도 왜 그랬는지 너무도 기가 막혀 울음도 안 나왔습니다.

 

급하게 통보를 받고 달려온 시댁, 친정 식구들은 응급실에서 산소호흡기에 의지하면서 겨우 숨만 쉬고 있는 남편을 보고 초상 울음이 났습니다. 난 내 남편 살려달라고 소리치고, 쓰러졌다가 또 소리쳤습니다.

 

“서울에 있는 큰 병원에 가야 해. 서울 큰 병원에 가면 살릴 수 있다고.” 계속 실성한 사람처럼 말을 했습니다. 병원에서는 이송하다가 죽을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의사 선생님은 진정하고 이틀만 기다려 보자고 말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죽을 때까지 기다리자고요?”

그 와중에 죽은 대학생의 부모가 찾아와서 우리 남편을 원망하며 소리를 질렀습니다.

“아들 살려내라고!”

 

나는 당신 아들 살리려다 내 남편도 죽게 되었다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죄인처럼 아무 말도 못하고 바보처럼 앉아 있었습니다. 도저히 이대로 내 남편을 보내고 싶지 않았습니다. 병원에서는 사고 난 후 3일째 되는 날 죽든지, 깨어나든지 결정이 난다고 했습니다. 나는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무조건 서울 간다. 죽어도 좋다. 나는 모시고 가겠다.’고 마음을 다져 먹었습니다.

 

사고 3일째 되는 날, 기적처럼 남편의 의식이 돌아왔습니다. 우리는 남편이 이제 살았다는 생각에 너무나 기뻤습니다. 그런데 남편은 나를 부르며 말했습니다.

 

“여보, 앞이 하나도 보이지 않아.”

 

어찌 이런 일이! 유독가스로 실명이 되어 버린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깨어났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남편은 정신이 들자 급히 친구 아들을 찾았습니다. 차마 죽었다는 말을 못하고 살았다고 다른 병실에 있다고 말을 했습니다. 조금 안심을 하는 것 같았습니다. 남편은 앞이 안 보이니까 나를 가까이 오라고 했습니다. 나를 옆에 앉히더니 안고 또 꼭 안았습니다.

 

“여보, 사랑해요. 사랑해요. 많이 사랑해요.”

 

사랑한다고 세 번을 반복하면서 미안하다고 했습니다. 나는 간호사, 병원 사람들이 보고 있었기에, 창피하다고 뿌리치며 남편 옆에서 떨어졌습니다. 그때 사랑한다는 말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들었습니다. 충청도 사람이라서 그런지 남편은 사랑한다는 말을 할 줄 몰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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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마침 아르바이트생 장례식을 치르고 온 회사직원이 남편에게 다가와 보고했습니다.

“사장님, 아르바이트생 장례식을 마치고 왔습니다.”

남편은 이 말을 듣는 순간 강한 경련이 일어나더니 다시 무의식상태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말 한마디도 못하고 그대로 쓰러진 것입니다. 비상이 걸려 의사 간호사들이 달려와 이런저런 방법을 취해 봐도 남편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사랑한다는 말이 마지막 말이 될 줄이야. 난 회사직원을 원망하며 울부짖었습니다. 내 남편 살려내라고, 왜 말을 했냐고, 악을 쓰면서 소리 지르고 또 지르고 쓰러지기를 반복했습니다. 그 후 남편의 의식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안정을 취하기도 전에 충격을 주어서 그랬는지 이유는 알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 가족들은 내 곁에서 떨어지지 않고 내가 쓰러질까 봐 따라 다녔습니다. 막내 동생과 제부는 내 남편이 살 수 있다고, 곧 일어날 테니까 너무 상심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동생은 용기를 주면서 계속 상제님께 살려달라고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주문을 외우며, 심고 드리면서 빌고 또 빌었습니다.

 

‘상제님 살려주세요. 우리 남편 좀 살려주세요. 이대로 가면 안 됩니다. 남편을 용서해 주세요. 대순진리회 못하게 반대해서 죄송합니다.’

 

‘은경이, 은진이, 병주는 어떻게 해요. 상제님 우리 남편 좀 살려주세요.’

그 당시 큰딸의 나이가 24살, 작은딸은 21살, 막내아들은 15살이었습니다.

‘처음부터 서울을 가려고 했는데, 위험하다고 못 가게 하더니, 결국 이렇게 되었잖아요.’

병원이 원망스러웠습니다.

‘남편이 고생해서 벌어 놓은 돈으로 서울에 있는 큰 병원에 가서 내 남편을 살릴 것이다.’

나는 서울에 있는 병원으로 갈 준비를 했습니다. 의사 한 명, 간호사 한 명, 운전기사 그리고 시숙과 나 다섯 명은 남편을 구급차에 태우고 산소통 2개를 싣고 서울로 향했습니다. 울산대학병원에서는 가도 소용없다는 말을 했습니다. 고생하지 말고 그냥 여기 병원에 있다가 상(喪)을 치르라는 말도 했습니다. 그러나 내게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6시간이면 서울병원에 도착한다. 병실을 예약해 두었으니 남편을 살려서 내려온다.’ 이렇게 다짐을 하면서 출발했습니다. (다음 호에서 계속)

   

 

<대순회보 18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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