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봄날의 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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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정만호 작성일2018.01.28 조회4,970회 댓글0건본문
잠실14 방면 선무 정만호
제 지갑 속엔 빛바랜 입석 기차표 한 장이 있습니다. 2004년 3월 5일 19:00 대전발(大田發) 수원행(水原行) 입석표입니다. 지금부터 이 기차표에 얽힌 일화를 소개할까 합니다.
겨울도 거의 지난 2004년 3월 시학공부를 마치고 3일 후에 초강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광주에서 동생과 함께 마트를 운영하던 저는 가게 사정상 그 3일의 시간을 동생이 혼자 가게를 본다는 게 어려운 일이기에 다시 광주에 내려왔다가 강식마다 올라가곤 했습니다. 여느 때처럼 공부마치고 짐을 싸고 있는 저에게 수호 서던 친한 선무가 초강 때까지 있지 그러냐고 그러더군요. 전 웃으며 가게 때문에 번거로워도 갔다 와야 한다며 길을 나섰습니다.
그 초강식날 아침에는 꽃샘추위처럼 쌀쌀한 기운이 느껴졌습니다. 길을 나서는데 아버지께서 “뉴스 보니 윗 지방은 춥다더라. 따뜻하게 입어라.”고 하십니다. 저는 “예, 염려마세요. 든든하게 입고 갑니다.”고 했습니다.
전라도 광주에서 여주본부도장으로 가는 최단코스는 고속버스 편으로 광주에서 이천, 이천에서 여주의 순서를 거치는 것입니다. 공부나 강식 때는 보통 광주에서 아침 9시 차를 탔습니다. 같은 시간에 이 차를 타면 넉넉잡아 4시간 조금 더 걸려서 도착하곤 합니다. 이 날은 10시 10분차를 타고 난 후 회관에 출발보고 하고, 연락소에도 보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날따라 승객이 저뿐이었습니다.
출발해서 얼마 있자니 기사분이 적적했는지 “어이 젊은 양반 거기 샌님처럼 있지 말고 앞으로 오쇼잉, 나랑 이야기나 하면서 갑시다.” 하십니다. 저는 운전석 옆자리로 자리를 옮겨 세상 돌아가는 얘기, 기사님의 과거 무용담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한 시간 남짓을 달렸던 것 같습니다. 전남을 지나 전북에 들어서는가 싶더니 주변이 어두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곧 눈발이 날리기 시작하더군요. ‘음. 꽃샘추위에 마지막 봄눈이라도 오시는가 보다.’라고 생각하기가 무섭게 앞은 정말 하얗게, 아니 하얗다 못해 시커멓게 아기 주먹 크기의 눈발이 몰아치기 시작했습니다. 한치 앞이 안 보인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의 눈발이었습니다.
전북 어느 고갯길에서 차가 멈춰 섰습니다. 앞에서 승용차 몇 대가 연신 헛바퀴 질을 하며 미끄러져 길을 막고 있었습니다. 2, 30분 동안 기사들이 모여서 차를 밀고 하는 노력 끝에 승용차들을 갓길로 밀어내고 버스는 다시 출발할 수 있었습니다. 기사분이 이런 눈길에는 버스가 안전하다며 은근히 뿌듯해 하는 눈치입니다. 저 또한 그 모습에 잠시나마 긴장을 풀 수 있었지요. 이렇게 해서 계룡휴게소에 도착했습니다.
잠시의 휴식을 뒤로하고 출발을 했는데 50미터도 못가서 출퇴근 시간 때나 볼 수 있는 일렬로 늘어선 차량행렬이 눈앞에 펼쳐졌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차량을 놔둔 채 휴게소로 먹을 걸 사러 가거나, 볼일 보러 갔다 오곤 했습니다.
기사분이 분주하게 어디론가 전화통화를 하더니 제가 탄 버스는 휴게소로 재진입 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운행은 못하겄네. 대전에 사상최대의 폭설이 내렸는디, 죽암까지 완전 마비다 안허요.”
제 귀를 의심할 만한 폭탄발언이었습니다.
“아저씨 이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승객을 태웠으면 종착지까지 데려다 주셔야죠. 못 간다니요? 전 꼭 가야합니다.”
“차가 막혀서 꼼짝을 않는디. 어떻게 가? 자네도 휴게소에서 상황을 지켜보는 게 나을 거여.”
다급해진 저는 일단 연락소에 전화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회관에서도 전화가 왔는데 상황을 들어보니 기차는 운행될 수도 있을 거라는 애길 들었습니다. 계룡에서 서대전 톨게이트까지의 거리는 약 6km. 서대전에서 대전역까지 가서 기차를 타고 움직이는 수밖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때 시간이 오후 1시를 조금 넘긴 상황이었습니다. 차에서 내린 저는 양복바지 끝을 접고, 가방을 가로매고, 수호자 줄 간식거리 담긴 쇼핑백 들고서 눈이 내리는 고속도로를 걷기 시작했습니다.
차량은 최대한 좁혀진 상태에서 일렬로 늘어서 있었고, 휴게소로 향하는 행렬, 차안에서 기다리거나 밖의 풍경을 감상하며 사진을 찍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걸어서 대전방향으로 향하는 이들이 간혹 눈에 띄었습니다.
한참을 걷는데 어떤 아저씨가 말을 건네려 합니다. 자기도 사업상 꼭 대전을 가야 하는데 길이 막혀서 차를 갓길에 둔 채 간다고 했습니다. 얼마를 걸었을까요? 양복은 땀에 젖고, 눈발에 젖은 머리는 방금 감은 머리처럼 물기 가득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마침내 서대전 이정표가 나오더군요. 어디로 나가야 되나 잠시 머뭇거리는데 어느 틈에 쫓아왔는지 사업차 대전에 가신다던 그 아저씨가 저를 따라잡더니 이쪽으로 가면 된다면서 따라오라고 하는 겁니다. 능숙한 솜씨로 지름길로 앞장 선 아저씨는 버스가 다니는 길까지 안내를 하고는 씩 웃으면서 사라졌습니다.
그렇게 접어든 대전의 상황은 심각했습니다. 길가의 차량들은 눈에 파묻혀 정차되어 있었고 버스나 택시는 보기가 힘들었고, 개인 차량들만 거북이 속도로 뜸하게 다닐 뿐이었습니다. 정류장에서 한참을 기다려 봐도 버스는 오질 않았습니다. 다급한 마음에 난생 처음 엄지손가락을 들고 차를 세웠습니다. 그런데 거의 무시하고 가버리더군요. 몇몇 운전자만이 멈춰 서서 제 말을 받아주었지만, 대전역까지 너무 멀고, 자신의 방향과 맞지 않다며 가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데 버스 한대가 오는 게 보였습니다. 운행을 중지하다가 몇 시간 만에 운행을 재개한 차량이었습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재빨리 뛰어가서 대전역이라고 쓰여 있는 걸 확인하고 올라탔는데, 그동안 발길이 묶였던 시민들이 타서인지 차는 몇 정거장 못가서 만차 상태가 되었습니다. 거의 3, 40분 정도를 간 것 같은데 마음이 놓이질 않아서 옆에 있는 아주머니에게 물었더니 이 차는 돌고 돌아서 거의 마지막에 대전역으로 간다는 겁니다. 아직 대전역은 멀었다면서 내려서 다른 차로 갈아타라고 하시더군요. 부리나케 내려서 물어물어 다른 정류장으로 옮겨서 시계를 보니 벌써 5시가 다 되어 가더군요.
회관에서 걸려온 보정의 전화와 연락소의 임원전화를 받고, 대전에서 수원으로 가면 수원역으로 방면 수호책임자인 임원께서 승합차로 데리러 와 주실 거라는 얘길 전달 받았습니다. 계산상으로 수원에서 도장까지 1시간 이상 소요된다고 보고, 9시 전까지는 수원역에 도착해야만 하고 그렇게 되려면 대전에서 7시 정도에 출발하는 기차를 타야 한다는 계산이 나왔습니다.
조금의 오차도 허용되지 않는 여정이었습니다. 한참을 기다려도 버스가 오질 않았는데 마침 택시가 있어서 합승을 하였습니다. 빠른 코스로 가 달라고 신신당부를 하면서. 겨우 대전역에 도착할 무렵 이미 어둠은 깔리기 시작했고, 시계는 6시를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대전역으로 향하는 많은 사람들의 행렬에 묻혀 처음 들어선 대전역 내의 상황은 다시 한번 입을 벌어지게 만들었습니다. 기차를 이용하기 위해 물려든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각 창구마다 정확히 세 줄씩, 사람이 지나가기 힘들 정도로 대합실이 꽉 차 있었습니다. 다급했지만 수원행 매표구 앞에 줄을 서서 기다리는데 창구당 세 줄인지라 정말 더디게 줄이 줄어드는 겁니다.
몇 십 분을 기다려서 제 차례를 앞두고 있는데 바로 앞사람이 “수원행이요.” 주문하는 순간 역무원의 한마디, “수원행은 입석까지 매진입니다. 8시 반 이후부터 입석이 가능합니다.”
오로지 도장 가까이 가다가 쓰러지더라도 최선을 다하자는 일념으로, 안 되리라는 생각을 품지 말라는 『전경』 말씀처럼 ‘태을주’를 쉼 없이 외우며, 상제님 전에 ‘꼭 참석하게 도와 주십시오.’라고 간절히 빌고 빌며 여기까지 왔는데, 잠시나마 맥이 풀리는 순간이었습니다.
그 순간 핸드폰이 울렸습니다. 회관의 임원께서 “지금 뭐 하냐.”며 호통을 치시는 겁니다. 상황을 설명 드렸더니 “그게 말이 되냐? 무조건 끊어달라고 사정해 안 그러면 죽는다고.” 하시는 겁니다.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그래 다시 해보자. 일단 줄에서 이탈해서 직원 사무실로 무조건 들어갔습니다. 바쁘게 일하는 직원들 중에서 제일 나이 들고 지위가 높아 보이는 사람을 향해 다가갔고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저 수원행 7시 기차를 꼭 타야 합니다. 못 가면 큰일 납니다. 저 죽습니다. 입석 한 장만 끊어주세요.”
진심이 통한 걸까요? 그분이 잠시 머뭇거리시더니 기다리라며 아까 형식적 답변을 내놓던 그 매표구 뒤편으로 가시더니 직원에게서 입석표 한 장을 끊어서 갖다 주시는 겁니다. 너무 고맙고 감사해서 손에 들고 있던, 수호자 주려던 간식 중에서 티백 차 한 통을 꺼내 감사의 표시로 드렸더니 한사코 거절하시더군요. 너무 고마워서 그런다며 책상에 놓고 거듭 절을 하고 그 입석표 한 장을 양손에 꼭 쥐고 7시 열차에 탑승하였습니다.
다시 상황을 연락소와 통화하였고, 창밖의 광경은 눈이 쌓여 그림 같은 광경이었지만 한순간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습니다. 거의 8시 반을 넘긴 시각쯤에 수원역 도착을 알리는 안내방송을 들었고, 또한 그즈음에 수호책임자 교감의 전화와 수원에 있던 방면연락소의 교감께서 주신 전화를 연이어 받았습니다. 수원에 거주하고 계신 임원께선 상황을 전해 들으시고, 수원 지리에 익숙지 않은 차량이 수원역에서 톨게이트까지 지체 없이 빠져나갈 수 있도록, 길안내를 해주기 위해서 나와 주신 것이었습니다. 두 분을 뵙고 인사 하자마자 차량에 탑승하여 바로 출발하였습니다.
도장으로 오는 차 안에서 임원께서 건네주신 박카스를 마셨습니다. 12시경에 먹은 샌드위치를 마지막으로 물 한 모금 마실 여유가 없었습니다. 달리는 승합차 내에서도 계속 무사히 도착할 수 있기를 심고 드리고, ‘태을주’를 외웠습니다. 정확히 10시를 5분 정도 남겨놓은 시각에 일각문 앞에 도착했고, 종무원 사무실에 들어섰습니다.
수도부 임원께 강식자임을 보고 드렸습니다. 교감께서는 어떻게 이런 상황에 올 수 있었냐고 웃으며 물어 주셨고, 옷 갈아입고 준비하라는 말씀을 들은 후 숙소로 들어섰습니다. 수호자 및 강식자들은 제 상황을 전해 듣고 같이 마음을 조려 주었던 탓인지 환호성으로 저를 반겨 주었고, 흠뻑 젖었던 몸이었지만 시간이 없어서 샤워 대신 대충 닦고 대기시간보다 10분 먼저 종무원 사무실 앞에 섰습니다. 놀란 가슴은 좀처럼 진정 되질 않았고, 도장에 무사히 와 있다는 사실이, 강식에 참석할 수 있다는 게 꿈만 같았습니다.
믿기 힘든 지난 12시간의 여정, 그러나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은 그 12시간의 과정이 너무도 생생해서 저는 저를 도와주신 임원분들, 이름 모를 대전역 매표구 직원, 길안내를 해줬던 아저씨까지 모든 분들에게 감사하고 감사했습니다.
불과 하루의 상황이었지만, 목숨보다 중요하다는 공부를 임함에 있어서 자칫 사고자로 남을 수도 있었던 상황을 모면하고 보니 모든 분들에게 너무 감사한 마음뿐입니다.
그래서 전 지금도 그 대전행 입석 기차표를 지갑에 고이 간직한 채 한번씩 꺼내보곤 합니다. 그 후로는 도장에 갈 일이 있을 때는 반드시 일기예보를 확인하고, 몇 일 전부터 만반의 준비를 합니다. 항상 공부나 강식이 끝나면 수도부 임원께서 해주시는 말씀, “강식은 한번이라도 불참하면 다시는 시학공부를 들어올 수 없습니다. 미리 기억하셨다가 늦지 않게 5시까지 신고해 주십시오.”라는 말씀이 귓전에 생생합니다. 명절 연휴에 강식이 있을 때는 항상 차가 막힐 걸 대비해 미리 전날에 올 것도 권유해 주시곤 합니다. 그 평범한 말씀이 얼마나 소중한 말씀인지를 절감한 하루였습니다. 천재지변도 도의 일에는 전혀 이유가 될 수 없었기에 말입니다.
그리고 어려운 상황에서 헌신적으로 도와주셨던 선각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그 난관을 헤쳐 나갈 수 없었을 겁니다. 짧지만 많은 것을 느끼게 되었던 그 봄날의 강식을 전 아마도 평생 잊을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오늘따라 세상의 그 어떤 값진 음식보다도 맛있고 정성 가득한 자양당의 음식이 너무도 그립습니다.
<대순회보 8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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