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심이면 가족도 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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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동진 작성일2019.12.11 조회5,139회 댓글0건본문
금릉7-2 방면 선사 김동진
7남매의 장남인 아버지와 7남매의 장녀인 어머니 사이에서 큰아들로 산다는 것은 말로 이루 다 표현할 수 없는 무게감이 따르는 삶입니다. 비록 누나와 여동생이 있긴 하지만 저희 세대는 아들이 감당해야 하는 책임이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가족들에게 사회적으로 안정적인 버팀목이 되어줄 거란 기대와 달리 수도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가족들은 저를 한심하다며 답답하게 생각했는데, 그럴수록 저는 우리 가족도 도를 알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렇듯 서로 생각이 다르다 보니 깊이 있는 대화가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제가 도에 관한 얘기를 꺼내면 가족들은 듣기 싫다며 말을 돌렸습니다. 말 없는 부산 사나이로 자수성가한 아버지와 큰 인물 낳을 거라며 진통 때 ‘악’ 소리 한번 안낼 정도의 강한 어머니가 과연 도를 받아들일지 기약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언젠가는 도를 전할 것이라 마음먹고 회관에서 작업하거나 치성을 모시는 등의 정성을 들일 때면 늘 가족들을 포덕할 수 있게 해달라고 간절히 심고 드렸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회관에 쓸 서까래 만드는 작업을 마무리 짓고 방면에 복귀해서 수반을 챙기며 교화하는 중이었습니다. 평소에 연락도 없던 여동생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그 당시 네 살이던 조카가 갑자기 심하게 아팠는데 병원에서 주사 맞히고 약을 먹여도 그때뿐이고 차도가 없다는 겁니다. 여동생 시댁에서도 손자 상태가 그렇다고 하니까 그 지역 관습대로 ‘용왕 먹이라’고 했다는데 저는 굿을 하라는 말로 알아듣고 그 순간 머리가 쭈뼛 서는 듯했습니다. 상제님의 해원상생을 실천하는 도인으로서 내 가족에게 진리를 전하지 못한 것이 이런 사태에까지 이르게 했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해졌습니다. 여동생한테 그러지 말고 다른 방법이 있으니 만나서 얘기하자며 집에서 보자고 했습니다. 시운 치성부터 모셔야겠다는 마음에 부산의 부모님 집으로 갔습니다. 여동생은 포항에 사는데 집 근처 여러 병원에 다녀도 소용이 없으니 큰 병원을 가야겠다며 부산으로 오는 길이었습니다.
집에 도착해서 함께 밥을 먹은 후 아버지와 어머니, 누나와 여동생에 매제까지 거실에 모여 과일을 먹으며 TV를 보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얘기를 꺼낼지 고민하다가 용기를 내서 “할 얘기가 있어서 내려왔습니다.” 하니까 아버지가 “그래, 네가 할 얘기가 있어서 왔겠지. 얘기해봐라.” 하면서 TV를 끄셨습니다. 가족들의 시선이 저에게 집중되자 저는 “애가 아픈 건 척신이 작용해서 그렇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한마디에 집안 분위기가 완전 서늘해졌습니다. 매제는 안 그래도 마음이 힘든 사람한테 그런 얼토당토않은 얘기를 하느냐며 열을 올리면서 방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아버지도 그런 얘기나 하려고 서울서 왔냐 하셨고 어머니도 대학까지 보내 놨더니만 하는 얘기가 이게 뭐냐 하면서 방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여동생도 남편이 제일 싫어하는 게 앞뒤 맥락 없이 내뱉는 얘기라며 들어가고 누나도 분위기가 이러니 못 있겠다며 자기 집으로 가버렸습니다.
마치 폭탄을 터트린 것처럼 한방에 모두를 방으로 들여보내고 나니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평소에 믿음직한 모습을 보이며 수도를 잘해야 했는데’라며 한참을 반성하고 있으니 여동생이 거실로 나왔습니다. 여동생은 오빠가 하고자 하는 얘기가 뭐냐고 물어왔습니다. 저는 척이 없어야 잘 살며, 척이 생기는 원인과 풀리는 이치 그리고 상제님께서 창생을 구제하시고자 내놓으신 상생의 법리 등에 대해 진지하게 교화했습니다. 어느새 어머니도 거실로 나오셔서 같이 얘기를 들었습니다. 어머니는 화내며 방으로 들어갔던 저녁때와는 달리 한결 부드러운 말투로 뭐든 한번 해보자고 했습니다.
다음날 치성을 모시기로 했는데 아버지를 어떻게 설득할지 고민되었습니다. 어릴 적부터 아버지와는 터놓고 편하게 대화한 적이 없었습니다. 아버지도 장남이었고 저도 장남인지라 집안의 무게를 두 입술에 얹고 살아왔습니다. 아버지가 반대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인데 그렇다 해서 아버지를 속이고 치성을 모실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며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했습니다. 상제님께 간절히 심고 드렸습니다. 별다른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고 그저 가족들이 치성을 꼭 모셨으면 하는 마음만 간절했습니다.
결국, 저는 장황하게 얘기하기보다는 진심을 실어서 결론만 말하기로 정하고 “아버지, 동생이 어머니하고 집에서 정성 한번 드려 보기로 했습니다. 아버지도 가족끼리 같이 정성 한번 드리면 좋겠습니다.” 하고 말씀드렸습니다. 아버지는 가만히 벽을 보시더니 몇 초 후에 “알겠다.”라며 단답형으로 승낙했습니다. 그렇게 부모님과 여동생이 치성을 모셨습니다. 사실 조카 문제가 아니었으면 절대 치성을 모실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동안 상제님께 들인 심고(心告)와 조상님의 살피심 등에 힘입어 치성을 모실 수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도가 아니면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겠습니까. 치성 모신 다음 날 조카는 밥도 잘 먹고 곧 몸이 괜찮아졌습니다. 상제님의 덕화에 감사드렸습니다. 입 무거운 저는 한 마디 한 마디에 진심을 실어 도의 진리를 전하고자 노력했습니다. 병이 치유된 것을 본 가족과 저 사이에 조금씩 대화의 물꼬가 트이기 시작했습니다. 가족들은 점점 제 말에 귀를 기울였고, 여동생은 태을주를 외우며 심고를 드렸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집안 제사에 식구들이 모였을 때입니다. 여동생이 아들이 아팠던 당시를 떠올리며 얘기했습니다. 그때 아들이 아프다며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축 늘어져서 약으로 겨우 버티고 있었는데 속으로 애가 더 살지 못하겠다는 생각을 했답니다. 그런데 치성 모신 다음 날부터 아들이 쾌차해서 참 신기했었답니다. 다 지난 일이라며 편하게 얘기하는데, 저는 그 정도로 심각한지 몰랐기에 다시 한번 상제님 덕화에 감사했습니다. 또한, 이처럼 도에 대해 편하게 대화할 수 있는 상황이 온 것이 정말 고마웠습니다. 지금은 누나 가족과 여동생의 아들도 치성을 모셨습니다. 여동생 아들은 학교에서 반장을 하며 건강하게 잘 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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