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도를 닦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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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은실 작성일2019.12.24 조회5,621회 댓글0건본문
금정2 방면 선무 이은실
나는 음식을 조금 떼어 “고수레”하며 들에 먼저 던져주고 새참을 먹던 아버지와 매일 장독대에 정수(淨水)를 떠 놓고 정성스레 기도하던 어머니의 품에서 7남매 중 다섯째 딸로 태어나 자랐다. 농부의 딸로 들에 나가 밭매고 소에 멍에를 씌운 쟁기로 밭 갈고 논일하며 열심히 생활하였다. 들로 산으로 소를 끌고 다니며 풀 먹여놓은 후 학교에 가고, 학교 다녀와서도 소를 먹이는 일이 나의 일과였다. 중학교 다닐 때까지 소를 먹이러 다녔고 겨울에는 볏짚을 썰어서 등겨(쌀의 현미 부분을 벗긴 가루)와 섞어 소죽을 끓여 아침저녁으로 소에게 먹였다. 주로 동생과 소 먹이러 다녔는데, 잠시만 방심하면 소가 벼나 콩 등의 곡식을 먹는 수가 있어서 항상 고삐를 꽉 잡고 다녔다. 간혹 고삐를 놓고 소먹이는 친구들이 있었는데 순식간에 소가 곡식을 뜯어 먹어서 주인들에게 혼나기 일쑤였다. 어떨 땐 우리가 하지 않은 일의 누명을 쓸 때도 있었다. 나와 내 동생은 이웃 어르신들이 우리가 하지 않은 일까지 보태서 혼낸다고 아버지 어머니께 억울함을 토로하곤 했다.
오랫동안 소먹이는 일을 해와서인지 아직도 소를 보면 친근하고 정말 가족 같은 마음이 든다. ‘도즉아 아즉도(道卽我 我卽道)’, ‘우야 축야 축야 도야(牛也丑也 丑也道也)’라고 도에서 말하듯이 나는 소가 바로 나이며 내가 곧 소인 것처럼 어릴 때부터 항상 소를 가까이하고 살았다. 그래서 도를 더욱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 같다. 내 삶이 곧 도 그 자체 였다는 생각에 도를 만난 것이 참으로 신기하기만 할 뿐이다.
매해 정월 대보름에는 오곡밥과 나물 등에 부럼을 깨며 대보름을 맞이하였고 남산에 올라 월출봉에서 제일 먼저 달을 보고 기도했다. 마을에서는 밝은 달 아래 풍물놀이와 달집태우기, 쥐불놀이 등이 이루어졌고 아이들은 잔치 분위기에 신나게 뛰어놀았다. 이렇게 사계절 내내 절기에 맞춰 명절을 맞이하며 하늘에, 신명께, 조상들께 소원을 빌었다. 그리고 동짓날에 팥죽을 해 먹으며 한 해를 마무리했다. 이렇게 웃어른들과 조상들이 해오던 방식을 고스란히 받아들이고 그저 주어진 삶에 만족하며 하루하루를 살아왔다. 그렇게 시골에서 초, 중, 고등학교를 걸어서 통학했고 대학은 시골에 없어서 어쩔 수 없이 통학 가능한 진주로 갔다. 우물 안 개구리처럼 세상 넓은 줄 모르고 그저 순수하고 어질게 살아오다가 드디어 조금 넓은 세상으로 발을 디디게 되었다.
‘간호사는 밤새도록 잠도 안 자고 환자 돌보는 일을 하는구나!’
간호대학을 다니면서 처음으로 밤에 잠 안 자고 움직이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았고 그야말로 순진하다 못해 순수함 그대로인 나는 세상이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도 깨달았다. 그래도 항상 긍정적인 마음으로 부모님이 건강하고 행복하게 잘 살기를, 언니 동생들이 모두 건강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살아왔다. 조용히 생각할 여유가 있으면 항상 가족들의 무탈함과 건강함을 마음속으로 기도하고 바라왔다.
졸업 후에 부산에서 취업하게 되었다. 남 돌보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고 업무의 스트레스는 운동, 여행, 취미 등 색다른 배움으로 즐겁게 풀었다. 운동이나 취미 관련 공부를 끊임없이 배우며 하루하루의 스트레스를 즐거움으로 승화시켰다. 그리고 매월 한 번은 1,000m가 넘는 높은 명산을 찾아 등산하였는데 우리나라 전국의 명산은 다 오른 듯하다. 나 자신을 스스로 돌본다는 생각으로 강인한 체력과 정신력을 키워가는 중이었다.
1996년 9월 직장 근처에 있는 회관에서 교화를 듣고 입도식을 했다. 나 하나로 일가친척이 다 잘된다는 말에 ‘그러면 얼마나 좋겠나.’ 하는 좋은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정성을 들여 입도 치성을 모셨다. 정말로 나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의 풀리지 않은 숙제가 풀리는 듯 시원하고 개운한 느낌이 들었다. ‘잘했다!’ 하고 기분 좋게 돌아와서는 열심히 직장 생활을 했다.
입도하기 전 직장 후배랑 속리산 법주사로 등산 갔을 때 일이다. 속리산 입구에서 전주대학교 서예 전공 대학원생이 가훈을 적어 준다며 행사를 하고 있었는데 그때 내가 떠올린 가훈이 바로 ‘정도(正道)’였다. 후배도 여러 가지를 가훈으로 생각하고 바꾸며 하더니 결국은 내가 말한 ‘정도’를 선택했다. 둘이 기분 좋게 ‘정도’를 가훈으로 적어서 돌돌 말아 가지고 왔는데 후배는 어떻게 했는지 잊어버렸다고 했지만 나는 기회가 되면 표구해서 걸어둬야지 하며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지인이 삼촌이 표구사를 하는데 표구할 것이 있으면 멋지게 해준다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해서 나의 기숙사 방에 떡하니 ‘正道’를 표구해서 걸어 놓게 되었다. 그 이후 얼마 되지 않아 대순진리회에 입도하게 되었는데 하늘이 준 선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나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대순진리를 나는 너무도 쉽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것이다. 입도하자마자 너무도 좋은 기분이었고 연수, 수강, 공부 등을 체험하며 도를 닦는 것이 재미있었다.
무엇보다 직장 생활에 충실했는데 열심히 치성 모시고 기도 모시며 시학·시법 공부, 수강, 연수까지 열심히 도를 깨치려고 노력하며 정성을 들였다. 그런데 더 이상의 믿음을 계속할 수 없는 어려움이 왔다. ‘화복’이라고 복에 앞서 화가 먼저 온다고 하는데, 나는 사람을 통해서 힘듦이 왔다. 포덕을 하면서 주위에 분란이 하나, 둘 일어나기 시작했다. 입도식을 하러 온 후배는 회관 입구에서 돌아가고 자기가 좋아서 입도했던 후배도 갑자기 만나기 싫다고 하는 것이었다. 큰언니도 입도하고 나서 반응이 안 좋았다. 하나같이 나 같은 마음으로 순순히 받아들이는 사람이 없었다. 부모님, 동생, 언니를 입도 시키면서 분란은 더 거세게 일어났다. 그렇게 분란을 겪으며 자신을 돌아보는 눈이 생겼다. 크게 힘든 일을 겪지 않고도 깨달음이 생기니 나 스스로가 대단하게 생각되었다. 나는 ‘도가 뭔가?’, ‘도 닦는 마음은 어떠해야 하는가?’를 평소에도 늘 생각해 왔다. 나는 계속 의문을 갖고 스스로 질문하면서 『전경』과 『대순 지침』을 읽고 또 깨우침을 반복하며 스스로 해답을 찾아 헤매었다. 여전히 힘들지만 내가 아직도 도를 닦는 이유는 세상천지의 옳은 도를, 바로 정도를 좌우명으로 삼고 살아왔기 때문이다. 바르고 정직하게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열심히 사는 사람은 하늘도 땅도 신명도 조상도 당연히 도와주리라는 믿음이다. 그렇게 믿고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며 즐겁게 살아왔다. 그리고 대순진리회의 도를 깨쳐 갈수록 모든 것을 편안하게 받아들이고 순리대로 따르게 되니 저절로 안심·안신(安心安身)이 되어 경천·수도(敬天修道)가 되는 것 같았다.
사실상 그때 주위에는 친구나 직장동료들이 사기도 당하고 돈 문제도 생기고 원망과 자책, 부부 갈등 등 하루하루 온갖 괴로움을 겪는 이들이 많았다. 모든 것이 돈 때문에 겪는 고통이었다. 욕심을 조금만 버리면 평화롭게 즐기며 살 수 있을 텐데 항상 돈이 화근이 되는 것이었다.
나는 상제님, 천지신명, 조상님을 믿고 정성을 들였고 항상 이것이 바른 ‘도’인가를 생각했다. 나는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즐겁고 행복하게 나 자신을 올바르게 이끌며 재밌게 살아야겠다고 다짐하였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내가 결혼하길 원했고 나도 부모님의 바람을 알았기에 늦은 나이지만 사람을 만나기 시작했다. 내가 도를 같이 닦자고 하면 잘 받아들이는 사람이 내 인연이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많은 사람을 만났지만, 입도를 시키면 나를 떠나 버렸다. 정말 안타깝게도 많은 좋은 사람들이 떠나갔지만 그렇다고 내가 도를 저버리고 따라갈 수도 없었다. 하늘이 맺어준 인연은 있는지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을 만났다. 여전히 내가 벌어서 시댁까지 신경을 쓰면서 살지만 나는 오직 주어진 일들에 최선을 다하며 일도 양육도 취미도 한 치의 어긋남이 없이 행복한 가정을 이루며 잘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연히 도를 닦으면 원하는 대로 되리라고 믿었다. 그래서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더 많은 일을 만들고 즐겁고 행복하게 헤쳐나갔다. 건강을 위해서 운동 관련 지도자 자격증을 취득하면서 강의도 하고 본 업무인 병원 응급실 간호사 생활도 충실히 해나갔다.
조상 신명의 도움으로 내가 올바른 길을 잘 가고 있다고 믿기에 오늘도 나는 하늘이 나에게 주신 기회를 놓치지 않고 도를 닦는다. 어느덧 입도한 지 2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친정에도 시댁에도 힘든 일이 있었다. 주변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남편도 여기저기 건강이 나빠지고 26년 동안 다니던 직장에서 벗어나 이제 새로운 곳에서 정착하고 싶어 했다. 그동안 바쁘게 지내온 날들, 안타까움, 아쉬움, 즐거움들 모두 다 접고 많은 지인을 뒤로 한 채 2016년 9월 강원도 고성으로 이사를 결정했다. 말리는 주변 사람도 있었지만, 우리 4인 가족은 부산에서의 생활을 마무리하고 새로운 보금자리에서 즐겁고 행복하게 새 출발 했다.
2016년 10월 2일 이사 오자마자 백일 동안 기도를 모시며 정성을 들였다. 1년 동안 실업급여 받으며 상담과 지도 관련 자격증을 취득하고, 부모를 위한 다양한 교육도 받았다. 그 외에도 놀이지원단에서 각종 놀이 지도사 자격증까지 따고 마을 학교 선생님으로 위촉되면서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2017년 10월 나의 본업인 보건소로 복직하여 간호사로서 방문건강 관리직을 충실히 하고, 독거노인, 노부부, 장애인, 취약계층의 이웃들을 찾아 경로당, 자활센터, 가정방문을 하며 건강과 행복을 나누고 있다. 가끔 시간 내어 학교나 교육청으로 놀이지원단, 학부모 기자 활동도 열심히 하고 학부모 연수도 받는 와중에 취미로 오카리나도 배우고 시도 쓰고 있다. 2018년 9월 기간제에서 정규직으로 전환되어 하루하루를 더욱 신나고 즐겁게 보내며 열심히 업무에 임하고 있다.
본분을 잊지 않고 다시 나의 길을 찾아서 따뜻한 가정, 즐겁고 화목한 가정을 위해 오늘도 최선을 다하고 있다. 내가 도를 닦는 이유는 즐겁기 때문이다. 부모가 행복해야 아이도 행복하다고 내가 정말 행복하니 내 아이도 행복해한다. 게다가 부모님도 행복해하시니 이것이 안심·안신의 길이며 나뿐만 아니라 남도 잘되는 올바른 길이라는 생각이 든다. 상제님의 살피심이 아닌가! 생활 속의 실천수도로 너와 나, 우리 모두 행복하게 잘 사는 길은 바로 정도를 가는 것이다. 오늘도 나는 열심히 도를 닦는다. 그래서 사는 것이 즐겁다. 그게 바로 해원 상생이요 도통으로 가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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