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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소영 작성일2018.11.20 조회4,95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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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릉 1-6방면 선무 김소영  

 

  2005, 2006, 2007…2014년 내 나이 33살. 대순진리회에 입도하여 수도생활을 한 지 어느덧 9년이라는 세월이 흘러가고 있다. 입도하기 전 나는 대진대학교 음악학부에서 피아노를 전공하는 학생이었다. 어릴 때부터 다니던 교회 영향 때문인지 처음부터 그다지 끌리지 않던 학교였다. 엄마는 재수하겠다는 나를 말리며 공부할 여건이 좋은 학교이니까 우선 입학해 다니면서 편입하면 된다고 권유하며 나를 안심시켰다. 하지만 편입 자리는 나오지 않고 오히려 학교생활에 익숙해져만 갔다. 기독교 재단에서 운영하는 학교와는 다르게 지루한 예배를 드리거나 설교를 들을 일도 없고 장학금 잘 나오고 공기도 좋은 데다 연습실까지 넓고 수업 분위기도 좋아서 마음만큼은 편했다. 그런데 어디서 들었는지 과 친구들은 학교에 안 좋은 소문들을 퍼뜨렸다.
  학교를 짓다가 죽은 사람들이 많아서 귀신이 많다는 둥 그 귀신들이 밤 1시가 되면 하얀 소복을 입고 나타난다는 둥. 짐작하건대 아마도 이는 기숙사 창문 너머로 보이는 포천도장에 한복 입고 기도 모시러 가는 외수 도인들을 보고 그렇게 얘기한 듯싶다. 특별히 그쪽에 관심 없던 난 “그래?” 하고 웃어넘기며 여러 불평을 늘어놓으며 학교 다니기 싫어하는 친구들과는 달리 점점 학교에 정을 붙여갔다.
  대학에 입학하기 전 나는 특별히 말썽을 피우거나 행실이 나쁘지 않은 학생이었다. 사소한 것도 늘 부모님과 상의하여 대화하며 비교적 말 잘 듣는 착한 첫째 딸이었다. 그러나 대학 생활을 하면서부터는 친구들과 보내는 시간이 많아져 늦게 귀가하는 일도 잦았고 외모와 겉치레에 많은 관심을 가지며 채워지지 않는 또 다른 욕구를 표출하기도 했다. 미래를 꿈꾸고 채워가기도 바쁜 시간에 나는 내 마음이 만족할 수 있는 일만을 찾아 매달리는 못된 딸로 변해갔다. 고생하시는 부모님을 뒤로 하고 내 즐거움만 쫓아서 그럴까? 즐거움 뒤로 찾아드는 공허함은 그 어떤 것으로도 해결되지 않은 채 나를 더 힘들게 만들어갔다.
  그런가 하면 어릴 적부터 부모님은 치킨 장사로 살림을 꾸려왔었다. 업종이 술을 파는 가게여서 늘 자정이 되어서야 집에 들어오시곤 했다. 부모님이 일 나가시고 안 계시는 반 지하방에 혼자 남아 잠이 들다가도 늦은 시각 눈을 떠 부모님이 안 보이면 ‘엄마 아빠 왜 안와?’ 불길한 마음에 그 어린것이 대뜸 대문 밖으로 나가 헤매며 울고 다녔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새벽이 되어서야 피곤한 몸을 이끌고 들어오시면 집안은 부모님의 코 고는 소리로 가득했다. 쉬는 날 한번 없이 일에 매달리며 정신력 하나로 살림을 꾸려 오셨던 부모님. 그 분들도 꾸고 싶은 꿈이 있으셨다.
  특히 엄마는 음악을 좋아했다. 당시 엄마는 가정형편이 가난해서 음악을 배울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지만 배우고 싶다는 열정 하나로 뭐든 열심히 하셨다. 학교도 졸업 못 한 두 명의 여동생을 위해 일찍부터 생활 전선에 뛰어들어 동생들 뒷바라지를 해 검정고시까지 챙기는 마음 따뜻한 언니였다. 엄마의 이 열정은 내가 음악을 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고 넉넉지 않은 형편에도 한 시간에 10만 원, 20만 원하는 고액의 교육비를 감당하시며 나를 공부시키셨다. 그 열정에 비해 쉽게 지치고 노력하는 걸 힘들어했던 나는 부모님 기대를 충족시켜주지 못했다. 오로지 자식 잘되는 것만을 바라보시며 앞만 보고 살아오셨던 부모님에게 효도하고 싶은 마음은 그저 마음뿐이었고 실제 내 모습은 달라지지 못했다. 개미와 베짱이의 동화 속 베짱이처럼 난 늘 후회되는 선택을 반복했고 욕심과 달리 게으르고 나태한 의지는 나를 변화시키기에 역부족이었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았기에 하늘이 나에게 기회를 주신 것일까?
  우연찮은 기회에 지금의 선각을 만났다. 쌍꺼풀 없는 눈, 동그란 얼굴형에 화장기 없이 꾸밈없는 외모와 수수한 옷차림…. 나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가지고 계신 분이었다. 모든 고민을 털어놔도 허허 웃어주며 다 해결해줄 수 있을 것만 같았던 인상에 나는 교화를 듣자마자 포덕소로 향했다. 오랜 시간 함께 지내왔던 친구에게도 느껴보지 못했던 따뜻함. 그 따뜻함이 나를 도로 이끌어 주었는지도 모른다.
  처음 들어보는 치성이란 단어도 나는 크게 낯설거나 의심이 되지는 않았다. ‘하늘에 드리는 정성? 평생 한번 드린다는데 좋아질 수만 있다면 한번 해볼까?’ 지극한 정성에 직선조 외선조 또한 그 운을 받아 모실 수 있는 법이라는 것이 나의 마음을 움직였다. 얽혀있는 감정에서부터 복잡한 내 마음과 늘 고생만 하시는 부모님에 이르기까지  뭐든 모든 일이 잘 풀릴 수만 있다면 처음 해보는 도전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내 마음이 이렇게 움직여질 수 있었던 것이 선각분의 말처럼 조상의 공덕일까? 
  우리 아빠는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나셨다. 지금은 돌아가셔서 안계시지만 생전에 친할아버지는 풍수지리에 남다른 재주가 있었다고 한다. 궁금한 게 있어 봐달라고 찾아오는 손님이 있으면 돈 한 푼 받지 않고 많은 도움을 주셨다. 아빠는 가끔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직전에 아빠에게 남긴 말을 떠올리곤 하셨다. 할아버지가 아마도 그리우셨던 모양이다.
  아버지의 말씀에 따르면 할아버지는 “앞으로의 사회가 여자중심이 되고 세상이 무질서하게 돌아갈 거라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어떻게 알고 할아버지는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 신기해…. 어린 시절 손녀 손자를 보고도 눈웃음만 살짝 지어 주시는 거 외에는 전혀 말씀을 안 하셨던 할아버지께서 생전에 남을 위해 베푸는 일에는 아낌없이 자신의 재주를 쓰셨다니 참으로 존경스러웠다. 그런 할아버지 밑에서 자라온 아빠는 집안 사정이 어려워도 제사는 빠짐없이 지내셨다. 평상시 뭐 하나만 사도 “뭐 그런 걸 사! 적당히 사! 뭐 그렇게 많이 사! 다 먹지도 못하는데.” 하시는 짠돌이 아빠는 제사음식만큼은 후했던 거 같다.
  “에고 너희들도 돈 벌고 일한다고 힘든데 쉬지도 못하고 뭐냐 이게. 요즘 세상에 누가 제사를 지내니. 마음만 있으면 되지 간단하게 끝내. 사람이 힘들어 죽게 생겼는데. 그냥 쉬어” 하시며 교회 다니는 작은 할머니의 높은 언성에도 아빠는 “그래도 해야죠.”라고 대답하셨다. 이런 아빠 덕에 명절과 제사가 있을 때면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야 했고 하루 전부터 엄마를 도와 정성을 다해 부지런히 음식을 만들어야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런 모든 것이 내가 도에 입도한 것에 많은 영향을 미쳤고 이것은 마치 필연이라 여겨진다. 그렇게 입도치성을 모시고 나는 100일 동안 꾸준하게 수도생활에 정성을 다했다. 반복되는 정성에 나는 수도인으로서의 참모습을 점차 갖추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서서히 나의 모습이 바람직하게 변화되고 있었지만, 마음 한구석에 나를 뒤흔드는 마음은 여전했다.
  그러던 어느 날, 도장 치성을 모시기 위해 시립해 있던 나는 아름다운 광경을 목도했다. 그 광경이란 한복을 입고 어머니와 딸이 치성을 모시기 위해 함께 시립을 하는 모습이었다. 한 눈에 나의 눈을 매료시킨 다정한 분위기는 나의 부러움을 사기에 충분했다. 이내 이 모습은 나에게 하나의 소망을 갖게 했다. 그 소망이란 나에게도 앞으로 가족 모두가 함께 수도생활을 할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라는 기대이다. 실제로 주변에서도 이런 사례는 어렵지 않게 전해들을 수 있었기에 그 소망이 언젠가는 꼭 이루어 질것이라는 기대를 놓지 않았다. 엄마와 같이 한복입고 정성을 드리는 모습을 생각만 해도 이렇게 흐뭇한데 실제로 그런 날이 나에게 오면 얼마나 좋을까? 라는 생각이 뇌리를 가득 채웠다.
  하지만 이런 생각들을 현실로 이뤄내기에는 넘어야 할 벽이 많았고 평소에 매우 정적인 나는 그러한 것을 감당할 만큼 정신력이 강인하지도 못했다. 특히 엄마는 어느 누구의 말도 쉽게 믿지 않는 사람이었다. 포덕을 하고 싶은 마음만 움켜쥔 채 도전하지는 못한 세월이 입도하고 꽤 되었다. 내수 때 품은 소망이 선무가 되어서야 조금씩 적극적으로 실행되어 명절이나 생신, 기념일 등 집을 가야할 때면 한마디씩 교화를 했다. 수도하는 것이 무엇인지 도가 무엇인지를 가랑비에 옷 젖듯 하나하나 설명해갔다. 또 기존 종교와 비교하며 대순진리회라는 곳이 정성을 드리고 실제 소문과는 다름을 알려드렸다. 엄마는 젊은 시절 잠깐 교회를 다니긴 했지만 생계유지를 하며 바쁘게 살아왔기에 종교를 믿을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다하셨다. 그러면서 종교에 심취한 사람들을 보실 때면 때로는 미쳤다는 말을 자주 하셨고 정신이 나약해서 그런 데 빠지고 그러는 거라며 고개를 저으셨다.
  엄마를 포덕하고 싶은 마음에 나는 수도인 한 분을 만날 것을 엄마에게 권유했다. 엄마는 무슨 눈치를 채셨는지 무조건 거부하셨다. 오히려 남동생이 이야기를 엿듣고는 “누나 그런 것도 있어? 신기하다.”하며 다가왔다. 오만상 찌푸리던 내 얼굴이 화색을 되찾았고 먼저 동생에게 선각분을 소개해줬다. 전해들은 말로는 동생이 교화를 잘 듣고 집으로 갔단다. “자기 속마음도 많이 털어놓고 대화 잘하고 갔어요. 겉으로 표현은 안하지만 우울한 게 많이 있던데…. 그나마 마음을 열고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 누나라고 그랬어요.”
  ‘짜식’하고 미소가 맴돌며 평상시 무뚝뚝했던 동생의 속마음이 이럴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몇 시간 뒤 휴대폰이 울렸다. 엄마였다. “너 동생한테 뭘 소개한 거야? 그건 어떻게 알았어? 뭐하고 다니는 거냐? 니가 지금 그런 거 할 때니?” 다짜고짜 뭐라고만 하시는 엄마에게 차분한 설명은 통하지 않았고 당황스러운 나머지 나또한 엄마에게 화를 내버렸다. “엄마 내가 뭐 그렇게 잘못했는데요? 동생이 하고 싶다 해서 소개해줬고 그게 내가 경험해봤을 때 이상한 것도 아닌데 엄마는 해보지도 않고 잘 모르면서 왜 그렇게 얘기하세요?”
  엄마는 한참 내던 성을 감추고는 끊자 하셨다. 잘 해보려고 한 것이 뜻대로 되지 않는 상황에 서러움이 밀려왔고 엄마의 이런 피해의식을 포용하지 못한 채 화로 맞선 내 자신이 매우 답답했다. 소망을 이뤄가는 과정에 있어 해야 할 노력은 결코 쉽지만은 않았다. 감정적으로 격하게 대립하는 처신과 쉽게 되려는 욕심을 지적해주시며 다시 마음을 먹을 수 있도록 선각들은 알려주셨고 난 다시 정성 드리는 마음으로 가족에게 다가갔다.
  남동생을 만나서 정성 드리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동생의 대답은 간단했다. “그래, 정성 드려 조상님들 잘 되시면 좋은 거고 누나가 좋은 거라니까. 같이 하자.”
  조금의 고민도 없이 쿨했다.
  “여자 친구도 불러 같이 할까?”
  “아이고 이 생각 없는 녀석아. 거기에 여자 친구가 왜 나오냐?”
  지금에 와서 돌이켜 보면 당시 동생이 생각 없이 뱉은 말이라고 여겨 한 명의 인연자를 놓친 것은 아직도 후회로 남는다. 하지만 그렇게도 바라던 가족과의 수도를 동생이라도 같이 동참해서 같이 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할 따름이다. 이렇게 동생과 나는 함께 치성을 모시게 되었다.
  며칠 뒤 동생과 함께 한복을 입고 정성을 드렸고 이 사실을 알면 노발대발할 엄마가 눈에 아른거려 “누나가 엄마한테 얘기하기 전까지 가서 정성 드린 거 말하지마.” 하고 입단속을 시키고 돌려보냈다. 안심이 되는 건 아니었지만 엄마의 전화는 없었다.
  그 후로 집을 다시 찾았다. 집 곳곳에 눈에 띄도록 쌓여있는 먼지들은 일하고 집에 들어오면 쉬기 바쁜 부모님의 쉼 없는 일상을 표현하는 듯 했다. 나이가 들어 이제 청소할 기력도 없으신 부모님을 위해 청소만큼은 끝내주게 했다. 이번에는 심고를 드리면서 말이다.
  ‘상제님 제가 상제님을 믿고 수도한다하지만 아직 가족들에게 떳떳하지 못합니다. 생계에 허덕이는 가족들에게도 희망을 전하고 싶습니다. 저에게 힘과 용기를주세요… 딸이 오니까 피곤해도 잠은 일찍 깨지나 보다. 붕 뜬 머리카락에 떠지지 않는 눈을 떠가며 뒤뚱 걸음으로 딸을 찾는 엄마에게 “엄마 나 동생이랑 치성 모셨어요. 엄마 아빠가 안하니까 둘이라도 하고 싶어서 먼저 했어요.” 아무 생각 없이 얘기했다. 엄마의 대답에 어떻게 반응할지 준비를 했지만 예상과 달랐다. “어, 그래.”
  생각지 못한 잠잠한 엄마의 반응에 속으로 나는 많이 놀랐고 신기했다.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갑자기 변해? 내가 마음을 잘 먹은 게 있었나?’ 싶었다. 소망을 가지고 가족포덕을 꿈꾸며 다가갔던 내 발걸음은 엄마의 좋아진 반응들과 함께 시간이 지나갔다. 그리고 엄마는 서서히 변해갔다. 집 앞 새로 만들어진 뚝방길을 걸으며 엄마와 이야기할  시간을 가졌고 그때 교화를 하면 안 듣는 척 하며 잘 들으셨다. 때로는 “그렇지, 그렇지.” 하셨고.
  그러던 어느 날 나는 힘들다는 감정에 깊이 빠져있었다. 수도를 해도 늘 듣는 소리는 여전했고 누구나 한계에 이르면 드는 생각이 떠올랐다. ‘아 나는 수도할 그릇이 안 되는 사람이구나.’ 라고 몇 번이고 마음에서 짐을 쌌다. 미움과 원망 절망 좌절이란 것과 함께 있으며 괴로워하는 나를 선각들은 기다려주셨다. 스스로 일어날 수 있는 시간을 기다리고 기다려 주신 것이다.
  마음을 꾸역꾸역 일으키며 임원분께 당분간 포덕소 주방을 제가 보면서 공덕을 좀 짓겠다고 했다. 그나마 도 안에서 있고자 하는 의지는 있었다. 이기적인 마음에서 벗어나려면 타인을 위해 마음을 쓸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는데 그런 곳으로는 주방이 제격이었다. 나는 그 일을 맡으며 봉사하는 마음으로 도인들이 먹을 맛있는 음식을 준비하고 나아가 나의 겁액을 벗기위해 노력했다. 조금씩 먹었던 마음이 흐트러질 때마다 선각들과 대화하며 마음을 바꿔나갔다. 시간이 흐르고 엄마한테 전화가 왔다. 
  “할아버지 제사 다가오는데 너 올수 있어?”
  “응, 가야죠. 엄마 혼자 준비하는데 내가 가서 도와야지.” 하고 끊고는 빨래를 하러 갔다. 빨래를 비비고 있는 순간 머릿속에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아, 할아버지 제사 때 치성으로 모셔볼까?’
  오랜 시간 연구 끝에 깨달은 과학자처럼 짠하고 떠오르는 느낌이 좋았다. 당장 서울 집으로 갔다. 오랜만에 만난 엄마는 변함없는 반가움을 표했고 말 못하는 나이 많은 강아지도 꼬리를 흔들고 날 반겼다. 긴장되는 마음과 달리 나는 엄마와 편안히 다리 뻗고 나란히 앉아서는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할아버지 제사 때 좀 더 형식을 갖춰서 치성을 모시면 어떨까요?”
  치성은 하늘에 올리는 귀한 정성이고 제사와 다르게 운을 모시는 정성이고 사람은 누구나 죽으면 크고 작은 원한을 남기고 죽지 않느냐 하면서 교화를 했다. 엄마는 친척 중 며느리의 박대를 받고 돌아가신 분이며 어릴 적 무당을 통해 봤던 모습을 떠올렸다. 골다공증으로 고통스레 돌아가신 외할머니를 생각하기도 했다. 나는 해원상생에 관해 얘기하며 교화를 이어갔다. 
  “그러지 않아도 이제 제사나 차례 중 한 가지는 못할 거 같다. 다 하려니 형편도 어렵고 엄마 몸도 힘들어서. 그럼 이 정성 드리면 차례 이런 거 안 지내도 괜찮을까?”
  엄마의 말에 경제적 무게가 느껴졌다. 우리 집이 큰집이라 명절이거나 집안행사가 있는 날이면 친척들은 다들 우리 집으로 모였다. 아빠 쪽 식구들만 하더라도 꽤 많아서 얼마나 북적대는지 여기저기 떠드는 소리에 시끄러워서 TV프로그램 하나를 제대로 본적이 없을 정도다. 그러니 음식을 준비하는 일도 만만치 않았다. 엄마 말에 의하면 명절 음식준비로 100만원은 들어갔으니 말이다.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될 테지만 통이 큰 엄마는 오는 손님들이 있으니 넉넉히 준비해야 된다는 말씀밖에 안하셨다. 그런 세월에 몸도 마음도 많이 지치셨는지 이제는 감당할 여유가 없으신지 차례나 제사 둘 중 하나쯤은 좀 내려놨으면 했다.   ‘내가 도장 가서 정성 드리면 되니까.’
  “그래요, 엄마. 치성 모시면 조상님들이 다 도장에 가세요.” 말이 끝나자마자 엄마는 그렇게 하자 하셨다. 처음 치성을 모셔보자고 권했을 때 쓸 때 없는 소리 하지 마라고, 뭐 그런 소리를 듣고 다니냐며 니 앞날이나 좀 생각하라던 엄마도 많이 약해지셨나 보다.
  “고모나 삼촌들도 제사라 올 테니까 그건 내가 같이하게 하던지 알아서 할게요.”하고는 그 자리를 떠났다. 분명 내가 특별히 엄마를 달라지게 만든 다른 요인은 없었다. 그럼 소망의 힘이었을까?
  아빠는 할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그런지 치성 모시는 데 “제대로 하면 좋지.” 하셨고 나는 그 뒤로 고모와 삼촌을 찾아다녔다. 평생 안하던 연락을 하니 고모와 삼촌들의 반응은 “웬 일이야? 무슨 일이야?”였고 용건부터 물어보았다. ‘참 내가 너무 무심했구나.’ 하는 생각에 웃음이 났다. 내가 초등학생 때부터 고모와 삼촌들은 차례로 번갈아가며 각자 독립을 할 때까지 우리 집에서 같이 살았다. 한솥밥 먹던 사이라 고모들과 삼촌들은 나에게 친구 같은 편한 존재였다. 치성 전까지 나는 고모들과 삼촌들을 만나기 위해 약속을 잡아가며 찾아 나섰고 부모님께 신세진 그 고마움이 있어서일까 둘째 고모가 그랬다.
  “네 아빠 엄마는 고모에게도 아빠와 엄마 같은 존재이셨어.”라고 말이다. 아빠와 엄마가 정성 드린다는 말에 고모들은 당연하게 따라왔고 교회 다니는 막내삼촌 제외하고는 다들 치성을 모시겠다는 약속을 받아왔다. 그렇게 나는 소망으로 가져왔던 가족 포덕을 터뜨렸고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치성을 마쳤다. 아직도 나에게는 소망들이 남아 있다. 극복하며 도전해야 할 과제들이 많지만 아무 의지도 없던 내가 이런 소망들을 가슴에 품고 숨을 쉬고 있는 것은 분명 상제님의 덕화가 아니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진심을 간직하기란 죽기보다 어려운 일이나 진심을 간직하면 복을 주신다는 상제님의 말씀처럼 오늘도 또 다른 소망을 향해 나아가본다.  

<대순회보> 16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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