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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道)에 대한 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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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효석 작성일2018.11.20 조회4,85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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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동5 방면 교감 이효석  

 

 “자각(自覺)이 없으면 확신이 서지 않는다.”는 도전님 말씀이 있다. 확신이 있어야 성(誠)과 경(敬)을 다할 수 있고 우리가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다. 나는 수도하면서 세 번의 자각을 통해 도전님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확신으로 도장을 지키는 데 일신(一身)을 아끼지 않았으며 16년째 도장 수호에 만전을 기하고 있다. 도전님께서 은신(隱身)하신 지도 어느덧 20년, 마음이 해이해지기 쉬운 세월임에도 도전님께서 항상 옆에 계심을 확신하는 것은 자각의 경험 때문이다.
  입도할 당시 나와 아내(현재 성동5 방면 선감)는 맞벌이 부부였다. 나는 사장님 소리를 들으며 건축 일을 했고, 아내는 사당동에서 종업원 7~8명에 2층으로 된 제법 규모 있는 한식집을 운영했다. 아내는 불심이 깊은 불교신자로서 일이 끝나면 관악산 연주암에 올라가 기도했는데, 밤 12시 넘어 일이 끝나도 추운 겨울에 아무리 눈이 많이 내려도 이를 거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가 운영하던 식당에 새로운 여종업원이 들어왔다. 그녀는 도인이었고 아내와 친한 주방 아주머니를 포덕하였다. 그리고 나는 조상님께 정성을 드려보자는 주방 아주머니의 말이 마음에 와 닿았고 뿌리 없는 나무가 어디 있겠냐 싶어 중곡도장 근처에 있는 방면 연락소에 가서 입도식을 올렸다. 그때가 1987년 7월이었다. 입도식을 마치고 도장으로 참배를 갔는데, 아내가 다니던 연주암은 정성 드리려는 사람으로 항상 아수라장이었는데 반면 도장 분위기는 경건하고 조용하여 마음에 들었다. 엄숙하고 신성한 도장 분위기와 조상을 모시는 게 좋아서 몇 십년 절을 다닌 아내를 겨우 설득하여 함께 믿기 시작했다.
  선각 분들께서는 아내를 만나러 식당에 매일 오셔서 교화를 하시곤 했다. 처음엔 정성을 드려주시는 선각 분들의 호의에 다른 뜻이 없는지 의심했고 그분들이 말씀하시는 진리가 선뜻 믿기지 않았다. 그래서 사실인지 확인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당시 수임선감께서 가게에 오셔서 영업이 끝나면 밤 12시부터 새벽 4시까지 교화를 해주시곤 하였다. 밤 1시에 기도를 모신 법수는 몇 개월이 지나도 썩지 않는다고 하셨는데 하루는 집에 오셔서 1시 기도를 함께 모셨다. 나는 법수를 시험해보고자 아내 몰래 페트병에 담아서 베란다 한 귀퉁이에 두고 가려놓았다. 3개월 뒤에 법수를 꺼내보았더니 한여름이었음에도 썩지 않고 그대로인 것을 보고 수도를 해봐야겠다는 믿음이 생겼다.
  포덕을 하면 업장이 벗겨져 장사도 잘되고 한 사람, 한 사람 포덕할 때마다 전생에 지은 죄가 풀어진다고 하여 식당 재료를 대주던 사람(현재는 교감), 기름집 하던 사람을 비롯하여 하루에 1~2명을 입도시켰다. 위에서 선무 임명을 모시라고 하셨으나 임명에 관심이 없어서 88호가 되었을 때인 88년에 임명을 모셨다.
  임명을 모시면서 점차 아내는 도심이 커져서 식당일을 소홀히 하고 도의 일과 포덕을 하러 다녔다. 한번은 150명 단체 손님 예약이 있었는데 수임선감께서 도전님 생신 때 도장에 소갈비를 사서 올려야겠다고 하시니까 가게는 뒷집에 맡기고 소갈비를 사가지고 올라갔다. 그리고 밤낮으로 포덕을 다니느라 가게를 비우기 일쑤였다. 해도 너무 하는 거 아니냐며 여러 차례 싸우기도 했으나 아내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럴 때 즈음 아내는 곗돈을 사기당하는 일이 생겼다. 계를 들어주면 밥을 팔아주겠다고 해서 계를 들었다. 친척 동생들도 계를 하겠다며 오지는 않고 믿고 돈만 부쳤다. 계가 막바지에 이르러 친척 동생들과 아내가 탈 차례만 남았는데 그만 계주가 도망을 가버리고 만 것이다. 할 수 없이 방배동에 있던 큰 집을 팔아서 친척 동생들에게 다 갚고 나니 남은 게 없었고 아내는 포덕할 심산으로 식당을 정리하여 일수를 하기 시작했다.
  우리 부부가 도를 닦아야 할 운명인지 나 또한 하는 일마다 실패하곤 하였다. 대출을 받아서 동암역 근처에 3층짜리 건물 3동을 지었는데 팔리지 않았다. 겨우 팔기는 했으나 건축 일을 그만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뒤 영광 법성포 해변 주위의 땅 만 평을 샀는데  정부의 행정 조치로 묶이고 말았다. 지금도 묶여 있는 상태다. 다음으로 렌트카 사업을 했는데 그 또한 잇따른 사고로 그만두었다.
  일이 이렇게 꼬이니 ‘도 닦을 사람은 돈을 벌려고 해서는 안 되는구나.’ 하는 생각과 ‘식당 문을 닫고 밤낮으로 포덕 다니는 아내와 싸우지 않으려면 같이 도 닦는 수밖에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아내와 상의한 뒤 함께 불고가사를 시작했다. 그리고 1년 뒤인 1991년에 아내는 차선감, 나는 교령 임명을 모셨다. 교령 임명을 모시고 방면의 기사 역할을 하면서 도에 확신을 갖게 되는 또 하나의 일을 겪었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집에 들어가서 씻을 때였다. 욕실 바닥은 타일이었는데 물이 잘 빠지도록 경사져 있었다. 양은 세숫대야에 물을 가득 받아서 두발을 다 넣고 씻는데 세숫대야가 미끄러지면서 균형을 잃고 뒤로 넘어졌다. 넘어지면서 벽에 있는 수도꼭지에 옆구리를 세게 부딪쳤다. 너무 아팠다. 그러나 하루 종일 운전으로 몸이 피곤했던지라 술을 한 잔 마시고 잠을 청했다.
  다음 날 잠에서 깨니 일어나기도 힘들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꾹 참으며 선감을 수반집에 모셔다 드리고 약국에 가서 약을 지어먹었으나 소용이 없었다. 참다못해 선감께 말씀드리고 병원에 가서 사진을 찍었더니 4번째 갈비뼈가 부러졌다고 해서 입원하였다. 방금 퇴원한 사람 자리에 들어갔는데 그 사람은 갈비뼈가 부러져 28일 만에 퇴원했다고 한다. 그 말을 듣고 나도 치료받는데 그 정도 시간이 걸리려나 싶었다.
  극심한 고통으로 앉아 있기가 힘들어 임원 분들께서 훈시 말씀을 기록해놓은 것을 차분하게 읽어보았다. 읽다보니 마음에 드는 인상 깊은 내용이 있었다. 모 방면 참배차가 참배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전복사고가 났다. 나이 드신 분들이 많이 탔는데 갈비뼈가 부러지고 내장이 파열되는 등 크게 다쳐서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이에 도전님께서 시료를 보시고는 다음 날 퇴원하라고 하셨다. 병원 측에서는 놀라며 안 된다고 했지만 도전님을 믿는 마음에 퇴원을 하였다.
  이 훈시 내용을 읽고 또 읽으며 진심으로 심고를 드렸다. ‘방면에 기사도 없고 선감 모시고 수반 집에도 많이 다녀야 합니다. 저도 시료 좀 봐주십시오.’라고 계속 심고를 드렸다. 이틀째 되던 밤에도 끊임없이 심고를 드리다가 잠이 들었는데 다음 날 일어나보니 몸이 괜찮았다. 꿈인가 생신가 해서 몸을 돌려보고 누웠다가 일어나기를 세 번 되풀이 하고 슬리퍼 신고 이리저리 막 움직여 봐도 아무렇지 않았다. 다 나은 것이다. 입원한 지 3일째였다. 가족들과 병원의 만류를 뿌리치고 퇴원했다. 그리고 그 다음 날부터 바로 운전을 했다.
  법수를 실험해보고 점차 굳어진 믿음은 도전님의 시료를 경험하면서 요지부동의 확고한 신념이 되었다. 도전님께 진심으로 심고 드리면 안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현재 안 계시지만 모든 덕화를 다 내려주신다. 상제님께서도 “내가 없다고 핑계하여 잘 믿지 않는 자는 내가 다 잊으리라.  내가 가서 일을 행하고 돌아오리니 그때까지 믿고 기다리라. 만일 나의 그늘을 떠나면 죽을 지니라”고 말씀하셨다.  이렇게 나는 틀림없이 믿고 있고 이 믿음으로 도장을 지키는 데 일신을 아끼지 않았고, 진법과 진리를 지키며 지금까지 수호를 서고 있다.

 

<대순회보> 17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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