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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에 본 흑장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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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정현국 작성일2018.11.21 조회4,86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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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포 방면 선감 정현국
그림 선무 윤상설

 

  1967년 당시 20세였던 저는 신장염으로 입원해 사경을 헤매며 죽음의 문턱을 넘나든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너무도 신기한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죽음의 문턱, 미지의 그곳에는 흑장미나무와 건물이 있었고 그 앞 잔디밭에서 뛰어 놀고 있는데 그때 어떤 할아버지가 오셔서 너 올 때가 멀었는데 여기 무엇하러 왔냐며 크게 나무라셨습니다. 가서 네가 해야 할 일이 많으니 어서 가라고 하셔서 오기 싫었지만 쫓기다시피 내려왔습니다. 눈을 뜨니 저의 임종을 지키려고 3백 리나 되는 먼 길을 달려오신 형님께서 침대 옆에 앉아 계시다 깨어난 저를 기쁨의 눈물로 환대해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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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렇게 죽을 위기에 처해 조상님 덕으로 고비를 넘기고 제2의 인생을 시작했지만 제가 이 세상에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깨닫기까지는 15년, 흑장미나무 앞에 있던 건물이 어떤 건물인지 알기까지는 21년이 걸렸습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하물며 15년은 결혼해 아이를 낳고 기르며 중년의 가장이 되어 안정된 가정을 꾸리기에 충분한 시간이었습니다. 그 옛날 사경을 헤매던 때의 꿈같은 일은 까마득히 잊고 빗자루 공장을 운영하며 별다른 걱정 없이 살던 1982년 어느 날, 제 공장에서 일을 하고 있던 친구 집에 갔습니다. 그곳에서 중곡도장 조감도가 있는 달력을 보았고 풍수에 대한 지식 없이 무심결에 “참 좋은 절인데 물이 없어 별로야.”라고 말했더니 친구가 한번 가보지 않겠냐고 권했습니다. 부산이었으므로 참배 갈 사람이 여러 명 생기길 기다려 얼마 뒤 서울 중곡도장으로 참배를 갔습니다.
  부산 선감께서 참배객들을 맞아주셨고 중곡도장 뒤편에 있는 복바위에 올라가 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또 문득 복바위의 복(腹)은 ‘배 복’이므로 배꼽 밑에 물이 없으면 헛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복바위에 올라가 보면 알 수 있었겠지만 너무 험해 올라가지는 않고 “이 복바위에서는 무엇이 보입니까?”라고 부산 선감께 여쭈었습니다. 선감께서 한강물이 보인다고 하셨습니다. “또 뭐가 보입니까?”라고 재차 여쭈니 어린이 대공원이 보인다고 하셨습니다. 한강물과 어린이 대공원이 보인다는 말씀을 듣고 순간적으로 중곡도장터가 명당자리라는 것과 ‘아! 나는 사람을 많이 살려야 되겠구나!’란 생각만 들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고인(故人)이 된 아내와 함께 입도를 했습니다.
  이후 아내와 저는 번갈아 생업에 종사하면서 수도생활을 했습니다. 제가 해야 할 일은 사람을 살리는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포덕에 힘썼습니다. 평소 병자들을 살리고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서 아프고 형편 어려운 사람들과 인연을 맺어 입도시켜 기도를 모시게 하고 정성을 드리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어떤 후각은 입도만 했을 뿐인데 병이 나았고 어떤 후각은 기도를 많이 모셔 병이 나았습니다. 한 소아마비 환자는 제가 들고 다니던 『전경』 가방을 자기에게 주면 안 되겠냐고 사정해 손에 올려주었더니 손이 쫙 펴지기도 했습니다.
  또 폐병 말기에 처한 60대 환자를 겨우 입도시킨 적이 있었는데 몇 개월 지나 그 집에 갔더니 작은 양동이에 약이 한 바가지 있었습니다. 제가 외수에게 그 약을 달라고 했더니 외수가 약을 주었고 그 뒤로 약을 먹지 않고도 병이 나았습니다. 상제님을 믿고 자각하여 행하니 병이 나은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포덕을 하면서 참된 정성이 있는 곳에 상제님의 하감하심과 천지신명의 보살핌이 있으며 참된 정성과 공경, 수도가 모두 믿음으로 이루어진다고 하신 도전님의 말씀처럼 상제님을 믿고 열심히 정성을 들이다보면 병이 나을 것이란 확신을 갖고 믿을 신(信) 자가 으뜸이라는 것을 깨달으며 7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이때 아내가 수도생활에 전념했고 저는 생업에 종사하며 도의 일을 보고 있었습니다. 빗자루 공장을 운영하면서 연탄 불마개를 개발하여 전국에 팔았습니다. 하루에 만 개씩 팔릴 정도로 장사가 잘 되자 한 친구가 형편이 어렵다며 우리 공장에 들어와 일하기를 원했습니다. 마침 저도 도의 일로 바빴던 때였으므로 친구에게 생산업을 맡기고 저는 영업직만 담당하였습니다. 그렇게 일한 지 보름 만에 그 친구가 기계에 손이 잘리는 불의의 사고를 당했고 제게 엄청난 보상금을 요구했습니다. 그만한 돈이 없는 저로서는 공장을 고스란히 다 넘겨주었는 데 그럼에도 친구는 그것에 만족하지 않고 더 많은 것을 요구했습니다. 속이 상하고 답답해 술을 마시기 시작했습니다. 하루에 소주 한 되씩 두 달을 먹고 나니 돈도 떨어지고 몸도 아프기 시작해 급기야 중풍이 들었습니다. 일주일간 뜸을 뜨고 겨우겨우 걸음만 걸을 수 있었습니다. 공장도 넘어갔고 아픈 몸이었지만 도에 전념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아내에게 병을 고쳐 올 테니 내가 어디 갔는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당부하고 동두천병원 공사에 참여했습니다. 도의 일에 정성을 들이면 병이 나을 것이란 확신도 있었습니다.
목수조에서 일을 했는데 손으로 망치질을 하려고 하니 망치가 잡히질 않아서 일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쇠망치를 사서 손에 감아서 망치질을 했습니다. 제 몸이 아프다는 것에 개의치 않고 성심껏 일을 하는 것으로 운동을 대신했습니다. 그러면서 몸이 점차 좋아져 공사장에서 나와 방면 일을 돌보았습니다.
  그러다가 1997년 여주본부도장에 A동이 지어지면서 저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곳이 바로 제가 30년 전 저승의 문턱을 넘어 가 뛰어놀았던 건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보았던 흑장미는 초소 뒤편에 심어진 것이었습니다.01 조상님께서 저를 재생시켜주신 이유가 도를 닦으며 사람을 살리라는 뜻이었음을 다시 한번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종단이 큰 고비를 겪고 있을 때 불편한 몸이었지만 혼신을 다했습니다. 2m 길이의 지팡이를 짚고 다니며 수없이 넘어지면서 수반들과 함께 강가에 있는 돌을 날라다 수호 초소를 모두 지었고 수호를 섰습니다. 수호를 서는 가운데 동고동락했던 아내가 유명(幽明)을 달리했고, 저에게는 중풍이라는 시련이 또 찾아왔습니다. 비 온 뒤에 땅이 굳어진다고 했던가요? 병마에 굴하지 않고 각 수호 초소에 나무를 깎아 만든 운동 도구를 갖다 놓고 수호를 서며 운동을 했고 지금은 중풍을 거의 극복했습니다. 사람들이 제가 중풍 걸렸던 것을 모를 정도로 좋아졌습니다.
  믿음을 갖고 도의 일에 정성을 들이다보면 양위 상제님과 도전님, 천지신명의 보살핌으로 모든 일이 무위이화(無爲而化)로 풀린다는 것을 몸소 겪고 나니 아프고 어려운 수반들과 세상 사람들에 대한 마음이 더 애틋해졌습니다. 상제님과 진리를 믿고 정성을 드리면 안 되는 일이 없다는 것을 그들이 깨닫기를 상제님 전에 간절히 빌었고 솔선수범하기 위해 노력해왔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조상의 공덕으로 도문에 들어온 것이고 자손이 도를 잘 믿어 닦아 나가면 조상도 가족도 모두 후천 선경에 함께 갈 수 있는 것이므로 나 자신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실한 믿음과 노력이 중요합니다.”라는 도전님의 말씀을 되새기고 사람을 살리는 것이 제가 할 일이라는 것을 깨우쳐주신 조상님의 은덕이 헛되지 않도록 ‘믿을 신(信)’ 자를 으뜸으로 여기며 열심히 사람 살리는 일에 성·경·신을 다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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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회보> 17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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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현재는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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