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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일상의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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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명숙 작성일2019.04.08 조회4,86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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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의8 방면 교정 박명숙   

 

 

 

  나는 1997년 12월 24일, 강원도 원주에 있는 연락소에서 입도를 하기 전까지는 늘 무언가에 강박증처럼 매달리지 않고는 불안감을 떨칠 수 없었다. 남들이 하찮게 여기는 무언가에 매달리는 것은 결코 나 자신에게 용납할 수 없었고, 그러다보니 나는 5살 때부터 어른들의 인망을 독차지하는 아이였다. 한 살 한 살 나이가 늘어가는 만큼, 그 나이 때 많은 업적을 이룬 위인들이나 영웅들의 삶을 따라가기가 점점 벅차기 시작했다. 마치 뱁새가 황새를 쫓아가다 가랑이가 찢어진다고 하는 것처럼 그만큼 나 스스로에 대한 불만은 커져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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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남매의 맏이인 아버지와 5남매의 장녀인 어머니는 공부라곤 겨우 초등학교 4학년과 3학년을 다니고는 강원도 산골짜기 숙암, 절벽같이 가파른 길을 꼬박 한 시간을 올라가야 하는 곳에서 증조할머니와 할머니, 할아버지, 아버지의 5남매와 화전을 일구며 살았다. 젊은 시절부터 아편에 중독돼 있던 할아버지는 매해 곡식을 거둘 때마다 모두 팔아서 아편을 구했고, 장남인 오빠가 태어나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까지 가족들은 옥수수죽으로 연명해야 했다. 외가도 형편은 다르지 않았다. 외할머니는 어린 나이에 일찍 부모님을 여의고 남의 집 수양딸로 가서 그 집의 종처럼 일을 하다가, 역시 부모님을 일찍 여의고 그 집에서 일을 해주며 종처럼 살던 외할아버지와 두 분이 성년이 다 될 무렵, 밭과 논을 조금 얻어 나와서 일가를 이루셨고 슬하에 2남 3녀를 두셨다. 

 

  어머니가 17살이 되셨을 때, 머리가 좋고 말솜씨가 남달랐던 할아버지는 당신이 밭농사를 크게 짓는다고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를 속여 어머니를 맏며느리로 삼아 숙암, 산골짜기 집으로 데려가셨다. 할머니가 막내 고모를 낳다가 마흔이라는 젊은 나이에 돌아가시고 난 이후부터는, 어머니의 삶이 얼마나 고됐을지는 나는 짐작도 안됐다. 그래서 나는 어릴 때부터 내가 엄마, 아버지의 고된 삶을 반만 살아낸다고 해도 대단한 인내심을 가지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세월이 흘러 1971년, 강원도 정선군 신동읍 조동리 광산촌에서 내가 태어났다. 6ㆍ25때, 고려대를 나온 엘리트라는 이유만으로 북한으로 납치당한 큰고모할아버지와 생이별을 하신 큰고모할머니는 남겨진 자식들과 서울에서 단칸방에 사시면서 한복을 지어 팔아 생계를 꾸리셨다. 아버지가 그런 고모할머니께 단칸방 전셋값을 빌려와 하시던 두부공장이 부도가 나 고, 아버지는 도망 다니시면서 강원도 영월광업소를 거쳐 정선군에 있는 함백광업소에서 일을 시작하시면서 광업소 사택을 얻었다. 붉은 찰흙과 돌과 송판으로 기본골격을 만들고, 시멘트로 겉을 발라 벽을 만들고, 지붕은 슬레이트를 대충 올려 지은 열한 집씩 3개 동, 33집이 한 집처럼 묶여 있는 그곳이 내가 태어난 고향집터다.

 

  술만 드시면 도끼를 들고 집안 살림을 부수며 엄마, 아버지에게 술주정을 하시던 할아버지가 가장 좋아하시는 건 TV시청 시간이 끝나고 새벽에 듣는 라디오방송이었다. 할아버지가 라디오 소리에 열중하시다가 잠이든 새벽 3시 30분쯤에야 나도 안심하고 잠을 잘 수 있었다. 초등학교 6학년이 되던 해, 할아버지가 초봄에 돌아가시기 전까지 나의 생활패턴은 할아버지의 일상에 항상 맞춰 있었다. 할아버지와 함께 많은 시간을 보냈고, 할아버지는 점차 가족들과 행복한 일상을 살아가실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늘 잠이 부족했고, 자주 아팠다. 초등학교 6학년 때까지 나는 유난히 작은 아이였다. 팔다리가 긴 편이 아니었다면 아마 난장이처럼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부모님과 할아버지와 나와 12살 나이 차가 나는 장남인 오빠와 언니 셋, 네 살 아래 여동생과 일곱 살 아래 남동생까지 늘 다복하게 살기를 염원하였고 마찬가지로 같은 사택촌의 서른두 집 모두가그렇게 되는 게 늘 꿈이었다.

 

  그 꿈은 지역으로, 나라로, 지구촌으로, 우주에 이르기까지 커지고 커져서 나의 어린 시절은 어른이 되어서 만들어갈 멋진 세상만을 꿈꾸며 준비하는 나날들이었다. 내가 초등학교 6학년이 되던 그해,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우리는 시내를 중심으로 정반대에 있는 새골사택, 장마철이면 지대가 낮아 늘 물에 잠기던 내가 태어난 사택과 달리 개울에서 3층 높이는 될 법한 곳에 위치한 그곳으로 이사했다.

 

병풍처럼 쳐진 세 개의 큰 동을 이루어 아파트처럼 각 동이 5층, 10층, 3층으로 이루어진 사택촌과, 찻길을 따라 평지에 군데군데 있는 사택들. 그 모두가 내가 크리스마스와 신년에 만들어 보낸 카드 그림의 주된 풍경들이었다.

 

  우연히 도를 만나고는 나의 지나온 과거와 꿈꾸어왔던 이상들은 내게 필연이 되었다. 행록 5장 38절 한자 구절 중 마지막 구절 여섯 글자가 “성지직 성지업(聖之職聖之業)” 이듯이 천지공사의 일은 궁극의 성업(聖業)이고, 그 일에 참여하는 것은 성직(聖職)에 임(任)하는 것이기에 나의 일상은 지극히 성(誠)ㆍ경(敬)ㆍ신(信)을 다하는 삶의 연속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제 많은 풍파를 겪어 불혹의 나이가 된 지금, 그 어린 날에 꿈꾸었던 행복한 세상을 만들어가는 이상을 더욱 웅대하게 펼쳐 나갈 수 있는 수도의 삶에 늘 감사한다. 선각을 만나던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모두 함께 한마음이 되는 그날까지 나의 꿈꾸기는 멈추지 않을 것이고, 늘 그런 나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내가 되는 모습을 계속 그려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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