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엄마가 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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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민자 작성일2019.04.10 조회4,996회 댓글0건본문
서면 방면 보정 김민자
얼마 전 저녁에 전화벨이 울려 받으려니 끊겼다. ‘누구지?’ 하고 발신을 눌렸다. 아들이 큰아빠라고 부를 만큼 친분이 있는 수도인이었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긴 인사를 건넸다.
“어머나! OOO요. 안녕하세요, 잘 계셨어요, 오랜만이에요, 어떻게 지내셨어요?”
“아! OO 엄마, 내가 다른 데 한다는 것이 잘못 눌러졌네요. 잘 지냅니까?”
“이렇게라도 목소리 들으니 좋네요.”
“아들은 어찌 지내고 있습니까? 잘 버티고 이겨내면 단단해지고 여물어져서 나중에 무슨 일을 하더라도 잘 해낼 겁니다.”
우리는 서로 웃으며 안부를 물으면서 통화를 이어갔다.
“OO 엄마, 나는 김보정이라고 하는 것보다 OO 엄마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정겹고 좋습니다. 좋은 엄마가 되어주세요. 세상에 엄마는 아주 많습니다. 그러나 좋은 엄마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 짧은 시간에 많은 생각이 스쳤다. 눈가엔 이슬이 맺혔다. 입술에 한껏 힘을 주며 잠시 머뭇거리다 알았노라며 전화를 끊었다. 통화 후 3주가 흘렀고 지금 난 이 글을 쓰고 있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현재 나는 좋은 엄마라고 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나쁜 엄마는 아니고, 힘들 때 전화해서 어떤 얘기라도 할 수 있고, 불통이 아니라 소통할 수 있고, 넘치도록 많은 것을 주어서 고맙고 사랑한다는 말을 듣는 엄마가 되었다.
나의 머리에 꽉 들어찬 ‘좋은 엄마’는 3주 동안 내내 많은 과거 생각을 하게 했고, 주위 사람들에게 좋은 엄마란 어떤 엄마일까?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기준이 뭘까요? 어떤 내용으로 평가해야 할까요? 아이에게 솔직히 잘못을 인정하는 엄마, 아이의 생각을 먼저 물어주는 엄마, 요즘은 아이들 생각보다 엄마의 의도대로 아이를 키우니 막상 20살이 되어 세상에 나가도 애들이 혼자서는 뭘 할 줄 몰라요…. 이런저런 의문과 말들이 이어지기도 했지만 많은 대답 중에 소통이 제일 많았다. 아이에게서 ‘우리 엄마 불통이야!’ 그런 소리만 안 들어도 좋은 엄마 아닐까?
어떤 임원이 들려준 이야기가 나를 돌아보게 했다. 평상시라면 절대 그렇게 말했을 리가 없는데 신기하다며 어떻게 그때 그 말을 했었는지 본인도 잘 모르겠다고 했다. 아들이 활발하게 학교생활을 하다 보니 주변에 인기는 많으나 공부와는 조금 거리가 있었다. 하루는 선생님이 교실에서 아이를 옆에 세워놓고 엄마에게 전화해서 심한 소리를 했다. 종일 속상함을 말로 어찌 표현할 수 있을까마는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간 엄마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는 아들을 향해 안쓰러운 마음으로
“오늘 너 많이 힘들었겠다.”
했더니 그 아들이 이불을 확 걷고 일어나 앉으면서
“응 엄마 많이 힘들었어.”
하며 자초지종을 얘기해주었다고 한다. 학교에서 돌아온 아들은 엄마의 반응을 예상하고 이불속에 자신을 숨겼는데 자신의 마음을 이해해 준 엄마의 말 한마디에 마음을 연 것이다. 바로 이런 마음을 알아주는 한마디 말이나 행동들이 소통이리라. 그분께는 딸도 둘이 더 있는데 그렇게 해 주지 못해 아직도 거리가 좀 있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고 하셨다. 엄마의 반성이 꾸준하게 행동으로 전해진다면 두 딸도 조만간 좋은 엄마에게로 다가올 것이다.
그렇다. 소통만 원활하게 된다면 다른 문제들은 얼마든지 해결해 갈 수 있다. 등지지 않고 분노에 차지 않고, 시간이 다소 걸리더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 것 같다. 나와 주위를 돌아보아도 힘들어하는 사람들 얘기를 종합해보면 첫 번째 이유가 서로 통하지않아 자신뿐만 아니라 가까운 사람들까지 힘들게 하는 경우다. 상대에 대해 어떤 생각인지 어떤 마음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물어보지도않고 내 마음대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으로 내보이게 되어 불신이 생기고 거리가 생기고 벽이 생겨 좋은 관계에서 멀어지고 있다. 내가 우리 아이에게 했듯이 아이가 원하는 걸 무시하고 엄마 뜻대로 밀고 가는 관계에서는 언젠가 반드시 문제가 발생한다. 물어보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것도 아닌데 질문은 우리에게서 너무 멀리 있는 것 같다.
나는 부부 교육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결혼했고, 부모 교육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아이를 낳았다. 물론 나만이 아니라 많은 부모가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래서 아이 키우기를 힘들어하고 아동학대가 심각해지고 가출 청소년이 늘고 부모와 자식이 분리되는 현상이 빈번해지지 않나 생각해 본다. 자라면서 간접적 교육은 받았다고 하겠지만 막연했다. 우리 가족에게도 일일이 언급하기 복잡한 엄청난 크기의 태풍이 찾아왔다. 다들 그냥 그렇게 사는 건 줄 알았다. 내가 아는 것이 다 옳은 줄 알고 살았다. 내가 마흔 살이 되고 나서야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고 내가 잘못 살았다고 하는 건 아니다.
내가 제대로 알지 못한 사실이 많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난 변화된 생활을 위해 아이와 같이 상담을 받기로 했다. 우리는 1년 동안 한 선생님과 상담을 하고 정신적 자아 성숙을 이루며 새로운 흐름에 적응했다. 그러면서 문제점과 해결책을 찾는데 예전과는 완전히 달라졌다. 그 이후에도 숱한 일들이 일어났지만 접근하는 방법과 마음가짐이 달랐다. 물론 완전하다고 할 수는 없다. 왜냐면 갈수록 발생하는 일들이 다양하고 크게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 일을 계기로 나는 사람에 대해 공부를 하고 싶었고 사람의 심리, 부부와 부모, 다문화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상제님께서 말씀하신 인존시대에 정말 필요한 공부가 아닐까, 세계가 한 가족이 되는 시대에 정말 필요한 공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상담 과정을 마치고 홀로서기를 시작하면서 2011년에는 야간대학을 다녔다. 보육교사 3급 과정을 하면서 내가 사람에 대해 이렇게 모르고 살았구나 하고 반성하며 아이에게 많이 미안했다. 정말로 해준 것이 없었다는 생각에 마음이 짠했다. 생후 5살까지 엄마의 양육 과정이 뇌의 성장의 80%를 차지한다고 한다. 평생을 바라봤을 때 얼
마나 중요한가! 생업과 수도에 바쁜 부모에게서 사랑을 갈구했을 내 아이와 지금 주위의 학생들을 보니 안타깝다.
변화의 필요성을 인식한 후 10년이 지난 지금, 나의 대장간 안에는 뜨거운 불과 차가운 물을 넘나드는 담금질이 반복되고 있다. 갈길이 멀지만 그래도 이 담금질이 감사함으로 와 닿기에 의식적으로 스스로 반문하며 올바른 수도인의 길을 가고자 마음을 가다듬는다.
25년 전 아이는 낳았지만, 결혼을 하여 산다는 것은 만만하지 않았다. 두 부부가 경제력이 없을 때는 더더욱 난감했다. 양쪽 집안에 경조사며, 주변인의 경조사, 명절에 드는 비용이며, 모유가 부족해 분유 부담까지. 임신 시기에는 먹고 싶은 것이 있으면 그것이 뭐든 생라면으로 대신했고 입고 싶은 임부복은 두 눈을 꼭 감아야했다. 그런 형편으로 둘째는 생각할 수도 없었고 더 답답한 것은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고 혼자 감당해야 하는 것이었다. 아이가 태어나고 몇 개월 뒤부터는 아이를 재워두고 밤에 일하고 새벽에 신문 배달을 하며 생활을 했는데 참으로 고마운 건 돌아올 때까지 아이가 엄마를 찾지
않고 잠을 자고 있었다.
이렇게 틈틈이 아르바이트를 하며 세월은 흘러갔고 아이는 착하게 커서 중1 사춘기를 맞이했다. 그 당시는 PC방이 유행이었다. 잦은 PC방 출입으로, 또 엄마 몰래 간다는 이유로 아이와 충돌이 심해졌고 결국 내가 심하게 매를 들었다. 지금 표현으로라면 아동폭력에 해당한다. 두 종아리가 시커멓게 변했고 다음날 난 울며 아이의 손을 잡고 한의원을 드나들어야 했다. 그날 이후로 매를 드는 일은 없었다. 정말 아이만을 위한 사랑의 매였다면 그렇게까지 멍들진 않았을 거였다. 엄마로서 부끄럽지만, 나에게 쌓여있던 스트레스가 아이에게 다 쏟아졌던 것이다. 이 지면을 통해 용서를 구하고 싶다.
“아들아 미안해. 그때는 엄마가 잘못했어.”
그 아이가 커서 군 복무까지 마치고 사회생활의 쓴 맛을 고루고루 경험하고 한 사람의 성인으로 우뚝 서 있다. 순하고 착한 아들인데 포덕소에 생활하면서 강하게 훈육을 했더니 어느 날부터 한쪽 벽에 키를 재고 선을 그어두면서 자기 소원이 엄마보다 키 크는 것이라 했다. 아들은 벽에 그어진 수많은 선과 함께 성장했다. 이 이야기를 하며 둘이 크게 웃었다. 그러면서 엄마가 옛날 엄마 같았다면 자기와 엄청 많이 싸웠을 거라고 했다. 엄마의 변화를 아들로부터 확인받은 셈이다.
여주본부도장에 건물을 짓는데 작업자를 구한다는 공문이 방면에 왔다. 아들에게 공문 내용을 전했다. 몸 쓰는 일을 하면서 겁액도 벗고 다 지어진 건물을 보며 성취감도 느끼는 수도인의 삶을 살도록 이끌어 주고 싶었다. 생각해보겠다며 바로 답을 주지 않았다. 2월에 아들은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학교 진학을 고민 중이라고 했다. 그러다가 방면 회관 치성에 참석하여 일을 도와주고, 포덕소 리모델링 공사에도 참여했다. 방면 임원분들의 많은 관심과 칭찬과 격려 속에 아들은 도에 대한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하였다. 5월 초 서울로 가는 차 안에서 우리는 긴 대화를 하게 되었고 난 간절한 마음으로 다
시 작업 얘기를 꺼냈다.
“OO아,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부모는 자식을 선택하지 못하지만, 자식은 부모를 선택할 수 있다더라. 네가 수많은 인연 중에 나를 선택해서 왔을 때는 분명 나를 통해 네가 이루려는 것이 있었을 거야.
넌 태어나면서 24년을 포덕소에서 살았어. 그렇다면 넌 도를 닦아 성공해서 도통군자가 되려고 이 세상에 온 게 아닐까? 넌 뱃속에서부터 태을주를 듣고 태어났으니 양위 상제님의 유지와 유법을 받들어 도전님의 일꾼으로 일하려고 온 것일 수도 있어. 한번 잘 생각해봐라. 엄마는 네가 도장 공사에 참석했으면 좋겠다.”
좀 더 얘기를 나눈 뒤에 아들은 해보겠노라고 했다. 자신을 한번 시험해보고 싶다고. 난 바로 현장 책임자께 직접 전화를 해 스스로 약속하게 했다.
안전화 두 켤레와 몇 벌의 작업복을 준비하여 시작된 현장 작업이 벌써 4개월째다. 가만히 있어도 견디기 힘든, 110년 만에 찾아온 폭염 속에 무더위와 싸우며 현장을 지키는 아들이 말 할 수 없이 고맙다. 현장 근처도 가보지 않았고 아시바가 뭔지도 모르면서 작업조를 나누는 첫날 자리에서 지원자가 없자 스스로 손을 들었다고 해서 같이 웃었다. 고소 공포증이 있기에 그 작업을 할 수 없어 중간에 목수로 자리를 바꿨다. 얼굴은 검게 타서 보는 엄마의 마음은 아프지만, 군더더기 살은 다 빠지고 멋진 사나이로 거듭난 모습에 감사하고 무엇보다 하루하루 수도인으로 성장해 가는 모습에 고마울 뿐이다. 현
장에서 어떤 일이 풀리지 않을 때는 무조건 심고를 드린다고 한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해결되었다며 얘기보따리를 풀어놓는다.
이런 성장에는 가족과 방면 사람들의 한없는 사랑이 있었다. 주위에서도 자기 자식처럼 물심양면으로 아들을 챙겨주고 격려해주고 기도해주시는 많은 임원분과 수도인이 계신다. 현장에서는 직접적으로 또 간접적으로 가르쳐주시고 안아주시는 분들이 계신다. 무엇보다 양위 상제님과 도전님의 덕화가 없었더라면 감히 지난여름 뜨거운 현장에서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덕화에 보답하는 길은 나 역시 올바른 수도인으로 일꾼으로 맡은 바 책임을 다하며 실천 수도하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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