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너에게.. 미안하다, 사랑한다,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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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봉금 작성일2019.04.27 조회5,568회 댓글0건본문
연산 방면 교감 김봉금
요즘 같은 100세 시대에 어느덧 70년 가까운 내 인생을 돌이켜 생각해보면 지나온 세월들이 아주 잠시 꿈을 꾼 듯 찰나의 시간으로 순식간에 스쳐간다. 울산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6남매 가운데 둘째로 자라면서 공부도 마음대로 못하고, 가정을 꾸리고는 부자로 넉넉하게 살지도 못하고, 그저 남편과 자식밖에 모르는 순종적인 여자일 뿐이라고 생각해온 내가 어떻게 이런 큰 도를 닦게 되었는지… 도를 닦아 행복함에 감사할 때도 많았지만 벅차고 힘겨운 수도의 과정에서는 나를 도문에 넣어주신 조상들께 원망 섞인 하소연을 하기도 했다. 많이 배워 아는 것도 많고, 재복 많은 자손을 골라 도를 잘 닦도록 하시지 왜 하필 나같이 어리석고 보잘것없는 자손을 골라 이 고생을 시키시느냐며 울었던 적도 많았다.
이 도는 아무나 닦는 것도 아니요, 그저 팔자고 운명이라서 닦는다는 어느 임원의 말씀에 그저 나도 절실하게 동감할 따름이다. 나는 1983년 1월 26일 부산 연산동에서 입도했다. 당시 30대의 평범한 가정주부로서 남편 내조와 자식 뒷바라지하는 일상을 살던 나에게 道라는 길이 나타났다.
어느 날 평소에 친분 있는 이웃집에 놀러갔다가 마침 후각을 챙기러 오신 지금의 방면 선감을 만났는데 절에 가끔 다니고 있던 나는 그때 조상님께 정성을 드려 운을 받아보라는 권유가 선뜻 내키지 않았다. 그래도 단호하게 거절하지는 않고 “대구 다녀와서 봅시다.” , “울산 다녀와서 봅시다” 하면서 차일피일 결정을 미루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꿈에 키가 자그마하고 깨끗한 옷을 입고 머리를 정갈히 가다듬은 할머니 한분이 방에 누워있는 내 머리맡에 앉아서 “한번 일어나 봐라, 한번만 일어나 봐라” 하는데 나는 계속 “안합니다, 안합니다.” 하며 실랑이를 벌였다. 애타게 사정하듯 몇 번을 그저 계속 일어나 보기만 하라는 할머니의 말을 듣지 않고 고집 부리는 꿈을 되풀이 하며 꾸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누운 채로 일어나지 않고 도를 거부하는 나의 업장과 입도를 시키려는 조상이 한바탕 씨름을 했던 것 같다.
그러다가 어느 날 밤에는 급기야 할머니가 어디선가 요령을 흔들며 나타나 나를 깨우기 시작했다. 요령 흔드는 진동소리에 놀란 내가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면서 꿈에서 깨어났다. 참 신기하기도 하고 왠지 입도를 결정해야만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날 바로 나는 동네에서 가게를 하던 지금은 돌아가신 나의 선각에게 달려갔다.
그때 나는 꽤 오랫동안 희귀한 병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밤만 되면 허리통증과 아랫배에 정체 모를 혹이 요리조리 자리를 옮겨가며 나를 괴롭히는 증상까지 겪고 있었다. 심상치 않은 꿈을 통해 입도의 필연성을 어렴풋이 느꼈고 병에 대한 두려움이 계기가 되어 나는 그렇게 입도식을 치르게 되었다. 입도 치성 후 우리 집에 기도를 모셔주기 위해 선각들이 밤12시가 넘으면 문을 두드렸다. 잠이 많은 나는 늦은 시간에 일어나 기도를 모시는 것이 너무 괴로웠다. 어떤 날은 잠들어 못들은 척 선각들을 밖에서 한참이나 기다리게 한 적도 있었다. 고백하기 부끄럽지만 아직도 잠이 많은 나는 잠시나마 마음을 속였던 그때를 생각하면 웃음이 난다.
그때는 남편 직장이 멀리 떨어져 있어 주말 부부로 지내던 터라 집에서 기도를 모실 수가 없었는데 신기하게도 꿈속에서조차 조상님들이 잠자는 나의 머리맡을 둘러싸고 보호해주시며 태을주를 외워주는 소리가 내 귀에 쟁쟁했다. 많은 수도인들이 입도를 하고 갖가지 신기한 경험을 많이 하였겠지만, 나에게 아직도 기억에 남는 것은 이틀 밤 동안 비몽사몽간에 수술복을 입은 의사들이 나타나서 내 몸을 살펴 구석구석 수술하는 장면은 지금도 생생하다.
하지만 당시에는 입도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때라 이유를 알지 못했고 사람들이 나를 이상하게 생각할까 봐 그것을 선각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로부터 몇 년 후에 시료가 열린다는 말을 듣고 그때서야 내가 입도 후부터 신명의 치료를 받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언제부턴가도 모르게 나를 괴롭히던 몸의 이상 증상이 사라졌음을 느꼈다. 상제님께서 베풀어 주신 덕화에 울컥 눈물이 차올랐다. 도통이 나기 전에 이런 일도 다 있구나 싶어 나는 그저 감격스러울 뿐이었다. 공교롭게도 남편과 아들, 딸이 모두 건강하지 않았던 시기였다. 도를 닦느라고 돈도 시간도 넉넉지 않은 형편에 그 시절 부자병이라 여겼던 갑상선 진단을 받은 딸을 위해 부모로서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상제님을 믿는 길밖에 없었다.
딸의 손을 잡으며 엄마가 도통해서 꼭 낫게 해주겠다고 병원 약을 끊고 법수만을 먹이고 있던 때였다. 나는 남매 둘을 함께 시료반에 보냈다. 직장에 다니던 아들이 시료를 다녀와서 이렇게 말했다. “갑자기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서 ‘상제님, 제가 비록 잘 몰라서 엄마 따라 열심히는 못했지만, 그래도 제 병을 낫게 해 주세요.’ 하고 빌었어요. 엄마, 제가 돈을 벌면 큰 집을 지어서 엄마의 기도 방을 멋지게 만들어 드리고 엄마가 회관에 가실 때마다 좋은 차로 모셔다 드릴게요.” 하면서 환하게 웃는 아들이 그저 눈물 나도록 기특하고 고마웠다.
그때의 다짐처럼 나의 아들 백선무는 지금까지 물심양면으로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주고 있다. 나는 무엇보다도 오늘날까지 가족들을 건강하게 보살펴주신 양위 상제님과 도전님의 덕화를 결코 잊을 수가 없다. 입도를 하고부터는 쉬지 않고 열심히 선각이 가자 하면 가고 오자 하면 오고, 그저 선각의 뒤만 따라 다녔다. 밤낮으로 사업에 전념하느라 가족들에게 소홀했던 시간이 많았고 남편의 이해를 얻기까지 고비도 있었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아무 탈 없이 건강하고 또 나의 수도를 묵묵히 지켜봐주고 도와준 사랑하는 나의 가족들에게 감사함을 표하고 싶다.
아마도 대순진리회 수도인 중에서 수도가 쉬웠다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지만, 나에게도 겁액이 발동하고 수도과정에 큰 바람이 불어 왔다. 교감 임명을 모시고 계속해서 사업을 해나가던 어느 날 방면의 직계 선감이 돌연 숨을 거두셨다. 나는 믿을 수 없었다. 입도하고는 언제 어디서든 매일 선각인 선감만을 따라 다녔다. 어제까지만 해도 내일 대구에 포덕하러 가자고 약속했던 선감이 나에게 한마디 말도 없이 아침나절 그렇게 신명계로 떠나셨다. 그날의 충격을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아무렇지 않게 웃다가도 그때만 생각하면 순식간에 눈가에 샘처럼 고이는 눈물을 어찌할 수 없다. 보잘것없는 평범한 나에게 도를 전해주시고 수도과정에서 동고동락하며 꼭 도통마당까지 함께 가자했던 세상 누구보다 믿고 의지했던 우리 선감이었다.
그렇게 희노애락을 함께 하며 걸어온 20여 년 세월을 뒤로 하고 한순간에 허무하게 가실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정신을 수습하기도 전에 선감의 빈자리는 나에게 지워진 커다란 책임으로 고스란히 밀려왔다. 설상가상으로 방면이 침체기를 겪으면서 수반들이 들어앉기 시작했고 당시에는 일선에 남아 방면에 힘이 되어줄 수 있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그나마 남아 있던 선사도 집안 사정상 지방에 떨어져 있던 때라 애타는 심정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멀리 있어도 나에게 남아있는 귀하고 소중한 사람이었고 누구보다 믿고 의지했던 사람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렇게라도 돌아올 것을 기다릴 수 있는 수반이 있었기에 그 시절을 견딜 수 있었던 것 같다. 홀로 동분서주해야 하는 암담한 시기에 나의 모든 겁액이 한꺼번에 달려드는 듯했다. 물질적 정신적 부담에 쫓겨 고난에 허덕이는 가운데 그래도 돌아가신 선감을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고 울며불며 정신없이 달려 나갔다. 나는 방면을 지켜야 했고 책임을 다해야 했다. 선감에 대한 가슴 아린 그리움, 그저 겉으로만 허허실실 웃으며 아무에게도 내색할 수 없었던 외로움으로 가슴이 터져나갈 것 같은 괴로움 속에서 숨 가쁘게 몇 년의 시간이 흘렀다.
인생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있다면 북풍한철이 지나가고 지금의 봄날 같은 안식을 주신 상제님께 감사드린다. 또한 오늘의 내가 있기까지 잘 참고 견딘 스스로를 칭찬해 주고 싶다. 어느 임원이 당부한 말처럼 거울을 보고 내 얼굴을 어루만지며 “예쁘다, 착하다, 너 참 장하다, 앞으로 잘하자, 잘 할 수 있다.” 스스로 나를 격려하며 나에게 운명처럼 주어진 이 길을 걸어가야겠다. 전생으로부터 지금까지 무엇을 그리도 풀어야할 것이 많았던지... 도통하려고 만난 수도의 길에서 선·후각이라는 관계는 해원상생이라는 상제님 진리를 실천하지 않고서는 결코 풀 수 없는 애증의 관계인 것 같다.
수도과정이란 소통의 과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도의 인연으로 만난 여러 도우들과의 오해와 갈등은 참으로 서로의 마음을 많이도 아프게 했다. 서로에게 했던 모진 말과 때로는 포덕사업 중에 나의 행동 처사에 실책도 많았다. 그로 인해 수반과 등지게 된 것이 모두 부족한 나의 탓이라는 자책으로 남아 마음이 많이 무겁다. 어떻게 그 마음을 풀어서 서로 웃으며 화합할 수 있을까? 이것이 지금 나에게는 가장 큰 숙제다. 모든 것이 나의 부족함과 실수로 빚어진 결과라는 것을 인정하였지만 지금 정작 그 수반의 마음을 풀어줄 방법을 몰라 홀로 가슴앓이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
또한, 지금까지는 말주변이 없어 마음과는 달리 수반과 대화도 많이 하지 못하고 표현력이 부족해서 마음을 온전하게 전달하지 못했다. 하지만 부디 이 기회를 통해서라도 수반을 향한 나의 애달픈 심정이 조금이라도 전달되었으면 한다. 수도과정에서 겪었던 속마음과 수많은 우여곡절을 지금껏 그 누구에게도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지 못했는데 이 지면을 통해서라도 이렇게 풀 수 있어서 참으로 감사하다. 내 마음의 묵은 응어리들이 풀려나가는 것처럼 나를 둘러싼 모든 사람들이 해원상생으로 풀어나가서 화목하고 화합하여 다함께 도통으로 성공하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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