꼴찌 18조에서 다시 태어나다
페이지 정보
작성자 류병무 작성일2018.11.20 조회4,770회 댓글0건본문
구의10 방면 선감 류병무
나에게는 소중히 간직한 추억이 하나 있다. 수도하면서 힘들 때마다 한 번씩 꺼내어 맛을 보면 그때의 달콤함이 나를 다시 일깨우는 그런 소중한 추억이다. 추억을 가지지 않은 수도인이 어디 있겠느냐마는 이 추억은 나에게는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나의 삶 일부분이 되어 항상 숨을 쉬고 있다. 마치 나의 심장처럼.
기억은 1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00년 10월, 도전님께서 분부하셨다는 고성제생병원 기공식이 있었다. 많은 수임원분들과 수도인이 참석한 가운데 기공식이 진행되었다. 그때 질서요원으로 참석한 나는 도전님께서 분부하셨다는 병원공사의 기공식에 참석한다는 자긍심과 아직 한 번도 도의 공사에 참석하지 못한 아쉬움이 함께 했다. 늦었지만 이 공사만이라도 꼭 받들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방면에서 사업한다는 미명 하에 방면의 회관 공사 이외에는 도의 공사를 받들지 못한 죄송한 마음이 컸고, 공사에 다녀온 후각들의 공사 이야기가 더욱 나의 마음을 자극하였다.
기공식이 끝나고 기반 작업이 진행되는 동안에 나는 다시 방면의 사업 전선에 돌아와 있었다. 고성병원의 작업에 대한 열망을 간직한 채 하루하루의 시간은 화살처럼 지나갔다. 그해의 포덕사업은 유난히 힘들었던 것 같다. 그 어려움은 나에게 하나의 돌파구로써 공사를 떠올리게 했다. 몇 번의 망설임 끝에 방면 선감께 병원공사에 참여하고 싶다는 말씀을 드렸다. 몇 번을 말씀드린 끝에 확고한 나의 마음을 아셨는지 드디어 허락이 떨어졌다.
‘야호!’ 마음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고대하던 작업에 들어간다는 즐거움과 부끄럽지만 포덕사업 전선에서 잠시 벗어난다는 해방감도 없지는 않았다. 2001년 9월 고성병원작업에 세 개의 조가 증원되었다. 17조, 18조, 19조로 편성되었고 나는 18조의 조장으로 8명의 조원을 이끌게 되었다. 대부분이 처음 공사에 투입되었던 터라 기존의 작업조에 편성되어 도와주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우리 조도 기존의 5조를 도와서 작업했다. 5조에는 오랫동안 공사를 받들어서 그런지 작업을 잘하는 일꾼들이 많았다. 모르는 것은 각 조의 조장들을 찾아가서 물어가며 열심히 작업 요령에 대해서 숙지하기에 바빴다. 축대벽(옹벽)작업과 기반작업은 다 되었고 지하층의 작업도 끝난 상태에서 지상층의 작업에서부터 공사에 참여하였다. 처음에 맡은 작업은 보 밑판형틀[하리소꼬, 梁(はり)底(そこ)]을 짜는 것이었다. 며칠 동안 망치질만 한 것 같았다. 기둥 철근을 엮고, 형틀을 짜고, 축대벽 철근을 엮고, 보 옆판 형틀을 대고, 보 밑판 형틀을 걸고, 상판을 깔고, 바닥 철근을 엮는 등 처음부터 하나하나 배워 갔다. 빨리 배워서 기존의 작업조에 누가 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뿐이었다. 한 층의 작업이 지나고 나니 어느 정도 작업에 대한 윤곽이 잡혔다. 이제 초보자였던 조원들도 제법 작업자의 자세가 나왔다. 그러나 작업에 대한 숙련과 동시에 다가오는 것은 맡은 구역에 대한 책임감이었다. 우리가 속한 구역이 항상 꼴찌를 했던 것이다. 처음에는 몰라서 배우고 있다는 명목이 있었지만, 이제는 한 조의 조장으로서 작업구역에 대한 책임에 대해서 자유로울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침마다 소장에게 불려가서 혼나는 것도 힘들었지만, 소장이 우리 때문에 불려가서 혼나는 것이 더욱 힘들었다. 누군가에게 힘이 되기보다는 짐이 된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었다. 한 층의 작업이 끝날 때까지 우리 조가 속한 구역은 계속해서 제일 늦게 작업이 진행되었다.
이유가 무엇일까? 작업에 익숙하지 않아서일까? 아니면 우리 조에 어떤 문제가 있는 것일까? 다른 무슨 이유를 생각해도 결국은 조장인 나에게 이유가 있는 것 같았다. 작업이 끝나고 다른 조가 취침할 시간에 우리 조는 따로 모였다. 작업이 끝나고 도장에 돌아와서 씻고 나면 자기 전의 시간을 쪼갤 수밖에 없었다. 과자 한 봉지, 빵 한 조각, 사탕 한 봉지, 어느 때는 냉수를 한 컵 떠 놓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다가 운 좋게 방면에서 참배라도 오는 날이면 과일이라도 놓고 모일 수 있었다. 처음엔 어색하고 서먹서먹했지만, 하루 이틀 시간이 지날수록 서로에 대하여 알아갈 수가 있었다. 도의 일을 잘 받들고자 하는 마음은 공사에 와서 처음 보는 외수들이지만 마치 오래전부터 알던 사람들처럼 쉽게 서로의 벽을 허물어 갔다. 자기 전에 가지는 10분 정도의 짧은 모임이었지만 그 짧은 시간을 통하여 서로가 표현을 달리해도 공사에 보탬이 되고 싶어 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리고 조장인 나만 작업의 진도에 대해 힘들어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조원들도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고 또 열심히 하고자 한다는 것을 알았다. 조원들은 조금씩 바뀌고 있었다. 남들보다 더 움직이고 더 뛰어다녔다.
하지만, 이러한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리 조가 속한 구역은 여전히 꼴찌였다. 꼴찌 18조. 하나의 꼬리처럼 따라다니는 수식어가 되었다. 나도 괴로웠지만, 조원들의 노력이 안쓰럽기만 했다. 그러나 더욱 마음이 아픈 것은 같은 구역을 담당하고 있던 다른 조의 시선이었다. 마치 우리 조원들이 작업을 못해서 같이 꼴찌 소리를 듣는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서로서로 도와주는 동료의 관계가 아니라 마치 부담스러운 존재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과연 우리 조원들이 미숙해서일까? 열심히 땀 흘리는 조원들의 모습을 보니 조금씩 반문이 들었다. 내가 보기에는 작업을 잘하는 조원들이 많은 조이긴 하지만 무엇인가 불만이 많아 보였다. 몇몇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어본 결과 조장에 대한 불만이 있었다. 조원들의 의견을 무시한 일방적인 작업지시가 원인인 것 같았다. 내가 보기에도 조금 더 나은 방법이 있어서 의견을 내어도 자신이 더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결국, 우리 구역이 꼴찌 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작업이 진행될수록 5조 조장과의 마찰은 심해져 갔다. 서로 마음을 모으려고 한 시도인데 오히려 간섭으로 비쳤나보다. 그러한 끝에 온 의견충돌과 사소한 감정대립, 서로가 서로를 무시한 채 감정의 평행선을 달렸다.
콘크리트 치는 날이었다. 기둥 보에 콘크리트를 붓고 진동기(진동을 이용하여 콘크리트가 잘 들어가도록 도와주는 기계)를 작동하는 순간 갑자기 “쩡!”하는 소리가 나면서 기둥보가 터졌다. 반 차 가량의 콘크리트가 흘러내렸고 그것을 퍼서 올리느라고 많은 사람이 하지 않아도 될 고생을 했다. 미안했다. 그곳이 내가 다른 조장과 언쟁을 했던 자리였기 때문이었다. 누구의 잘잘못을 떠나서 나 자신의 잘못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상제님 죄송합니다. 저의 불찰로 공사에 크나큰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마음 잘 다스려서 앞으로 다시는 이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그날은 정말이고 땅속으로 숨고 싶을 정도로 다른 사람의 얼굴을 보기가 부끄러웠다.
다음 날 다른 조의 조장을 만나서 제안했다. 우리 조가 매일 누를 끼치고 있어서 미안하니 서로 구역을 나누어서 하면 서로에게 상승효과가 있을 것 같다고. 다른 조장도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날 조원들과 모여서 얘기를 했다. 꼴찌 18조라는 이름으로 공사를 마치는 것보다는 노력하는 모습의 18조를 보여주자고. 우리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자고. 지금까지 열심히 한 우리의 모습이 절대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자고. 노력하고도 안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노력이 부족해서 꼴찌가 되기에는 여러분이 흘린 땀이 너무나 아깝다고….
구역을 나눈 효과는 당장 나타났다. 우리 조나 다른 조는 서로 앞서거나 뒤서거나 하면서 다른 구역보다 조금씩 앞서 나가기 시작했다. 다시 꼴찌를 하지 않으려는 노력은 처절했다. 식사 시간이 되어도 남들보다 늦게 내려가서 일찍 올라왔고, 다시 올라올 때는 자신이 들고 올 수 있는 자재들을 들고 왔다. 조그마한 노력이 조금씩 우리를 변화시키고 있었다. 이제 더 이상은 꼴찌가 아니었다. 이제는 조원들도 자신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기둥 철근을 엮고 보 형틀을 짜고 보 밑판형틀을 올릴 때였다. 7~8명의 조원들의 힘만으로 400×12,000mm가 넘는 보 밑판형틀을 올리는 데 몇 번의 기합으로 보 밑판형틀이 올라갔다. “영차! 영차!” 조원들의 기합소리는 점점 커졌고 보 밑판형틀은 점점 빨리 올라갔다. 1시간에 13개의 보 밑판형틀을 거는 동안 주변에서도 구경하고 있었다. 당시에 크레인으로 걸어도 13개를 걸기가 어려운 숫자였으니 신명이 응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정말 “영차! 영차! 영차!” 하는 기합에 쑥쑥 올라갔다. 보 밑판형틀을 거는 우리도 힘이 났고 감격스럽기까지 했다.
우리가 보 밑판형틀을 거는 동안 옆의 다른 조도 보 밑판형틀을 걸고 있었다. 하지만, 걸다가 떨어지고 치수가 안 맞아 다시 내리기를 반복하며 한 시간에 2~3개도 걸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 조만을 탓했던 모습들이 이제는 미안함으로 바뀌고 있었다. 다른 조의 조장이 나에게 왔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나의 의견을 물어보았다. 이제는 서로서로 도와서 작업을 해 나갔다. 서로서로 신나서. 오랜만에 소장의 얼굴에 웃음이 서려 있었다. 우리 조원들의 얼굴처럼.
우리 조는 더 이상 꼴찌가 아니었다. 병원 5층을 마치고 난 후 방면의 후각이 대신 들어오면서 나는 방면으로 오게 되었다. 길지 않았던 6개월의 시간이었지만 나에게는 너무나 소중한 진리를 깨우쳐 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기간이었다. 꼴찌에서 시작했지만 노력하면 상황을 바꿀 수 있다는 사실과 화합의 중요성을 깨달은 것이 너무나 기뻤다. 아직도 수도하다가 힘들 때면 서로 서로의 노력으로 일구어 낸 조그마한 기적을 떠올리곤 한다. 그러면 어느 순간 그때의 함성이 들려온다. “영차! 영차!” 그 함성은 내 몸에 활력을 불러일으키면서 다시 일어설 힘을 준다. 마르지 않는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이제는 방면의 기둥으로 성장해 있을 그때의 조원들을 떠올리며 다시 한번 힘을 내어 수도에 매진해 본다. 꼴찌였지만 굴하지 않았던 18조원들의 땀방울을 떠올리며…. 18조 파이팅!
<대순회보> 111호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