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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피쉬, 마음에 보석을 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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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미애 작성일2018.11.15 조회5,22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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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천4 방면 선사 강미애   


  어릴 적 나의 꿈은 만화가나 작가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가난한 부모님을 돕기 위해 중학교를 졸업하곤 곧장 공장에 취직을 할 수밖에 없었지요. 고사리 같은 손으로 완성된 신발의 실밥 따는 일부터 배웠습니다. 부모님을 도울 수 있다는 생각에 철야 작업은 도맡아 놓고 했었지요. 아무리 힘들어도 꾹 참을 수 있었던 건 8살 어린 동생을 공부시킬 수 있다는 즐거움이 있어서였지요.


  공장으로 출근하며 만나는 친구들은 교복을 입고 학교로 가는데 나만 왜이리 힘들어야 하는지 의문이 생기기 시작하더군요. 나중에 시집가서 내 아이들에게 엄마의 최종학력이 중졸이라고 말하기 싫었습니다. 뒤늦게 방통고에 입학해서 버스표도 학생 것으로 내면서 기사아저씨가 뭐라 하면 자신있게 학생증을 내밀며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친구들이 조용필 콘서트에 쫓아다닐 때, 방통고는 배움의 기회를 놓친 사람들이 나이와는 상관없이 배움의 모닥불을 지피는 곳이었지요. 연세 지긋하신 아줌마들을 만나면서 아직도 나는 늦지 않았다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습니다. 연세가 많으신데도 불구하고 우리를 열정적으로 가르치시던 담임선생님이 생각납니다.


  그러다가 문제에 부딪히게 되었지요.


  “난 왜 태어난 거지? 이리 힘들게 살아야 한다면 차라리 안 태어났음 더 좋았을 걸, 왜 어린 나한테 이렇게 힘든 삶을 살게 하는 걸까, 나는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 걸까? 나는 도대체 뭐하려고 태어난 걸까, 왜? 왜? 무엇 때문에?”


  한없는 의문 속에 저는 답을 찾고 싶었습니다. 어린 동생의 죽음을 목격하고 난 뒤론 혼자 생각하는 시간이 더 많아졌지요. ‘죽음이란 대체 무어란 말인가…’ 모든 것이 포기 상태가 되었을 때 지금의 남편을 만났습니다.


  부모님 곁을 도망치듯 서둘러 결혼을 했습니다. 여우 피하려다 호랑이 만난다고 시작부터 삐걱대는 결혼생활은 더욱더 나를 절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고, 결혼 전엔 부드럽다고 알았던 남편의 성격이 우유부단하고 이기적인 걸 깨달았을 땐 이미 늦은 것이었습니다. 아들이 태어나고 둘째로 딸아이가 태어난 뒤에도 남편이나 같이 사는 시집식구들은 저에게 책임과 의무만 전가할 뿐, 그저 파출부 취급을 했지요.


  칠 남매의 맏며느리로서 오기가 생기더군요.


  “그래! 한번 살아보자. 언젠가 끝이 있겠지.”


  둘째 아이의 백일이 지났을 때 친한 친구를 통해 대순진리회를 만났습니다. 시운치성을 모신 뒤엔 마음이 참 편했고 어딘가 의지할 곳이 생긴 것처럼 든든했습니다. 그러기를 몇 년, 내 생활이 어렵고 층층시하의 시집살이에다 아이 둘을 키우기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제 나이 그때 스물다섯 살이었어요. 포덕할 생각보다 하루하루 살아내기가 급급했던 그 시절이, 눈물 나는 많은 시간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강한 나를 만들 수 있었겠지요.


  어느 날 임원께서 저를 부르시더니 


  “강내수, 니 분가 하겠다.” 그러시더군요.


  그냥 저는 “네” 대답만 했습니다. 분가란 제게 있어 꿈만 같은 현실이었으니까요. ‘설마 그러려고’ 하는 마음이 컸습니다.


  그러나 정확히 20일 후 남편이 장사를 벌이는 관계로 울산 근교 웅촌이라는 시골동네로 이사를 가게 되었어요. 얼마나 좋던지, 냉장고가 없어도, 세탁기가 없어서 차가운 물에 언 손을 호호 불며 손빨래를 해도, 겨울 빨래가 꽝꽝 얼어붙어 고드름이 되어도 하루하루가 신바람이 났습니다.


  며느리 손에 매 끼니마다 더운밥 드시던 시어머니께서 날마다 전화하시며 우시더군요. 마음은 아프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 어머니께 잘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운 때를 만난 남편의 사업이 본 궤도에 오르고 사업을 시작하면서 냈던 빚도 조금씩 갚아가니, 매일 밥 먹을 시간이 없을 정도로 바쁜 날의 연속이었습니다.


  사업이 번창하고 통장에 조금씩 돈이 모이게 되자 남편은 다른 데 눈을 돌리기 시작했지요. 돈이 많이 드는 취미생활을 하는 것도 부족하여 여러 사람들과 어울려 노름까지 손대더니 급기야 나중엔 다른 여자들을 만나며, 외박을 밥 먹듯이 하더군요. 남편이 그러건 말건 나라도 정신을 차리고 아이들 건사하며 사업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나중엔 주객이 전도되어 시작은 남편이 했지만, 남편은 돈 주머니만 쥐고 사업은 나 몰라라 했습니다.


  남편이 그럴수록 저는 더 강해졌습니다. 어린이집 다니는 애들을 친정에다 3개월씩 맡겨놓고, 자는 시간 먹는 시간도 줄여가며 서울로, 포항으로 종횡무진 달려갔습니다. 밤 늦게 집으로 돌아와 내일 나갈 물건들 정리, 창고 정리해 놓으면 어느 새 새벽, 너무 배가 고파 컵라면 하나 먹고 잠들기 일쑤였지요.


  그러던 남편이 일을 저질렀습니다. 말 타면 종 부리고 싶다고, 좀 살만해 지니까 다른 사람들의 꼬임에 넘어가 덜컥 땅을 계약해 버린 겁니다. 그것도 사채 빚까지 내서요. 아무리 말려도 도무지 듣지를 않더군요. 


  “여자인 니가 뭘 아노? 남자가 하는 일에 배 놔라 감 놔라 하노? 시끄럽다~!”


  매사가 이런 식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알았습니다. ‘이것이 내리막이구나!’ 하구요. 아이엠에프가 터져도 여차저차 잘 꾸려가던 사업이 내리막길을 달리기 시작한 것은 돈 좀 번다 하고 여기저기 사장님, 사장님하고 부르니 우쭐한 마음에 아는 사람 몇 명에게 보증을 서 주었나 봅니다. 그것이 일시에 터지기 시작하면서 삽시간에 도미노 현상을 일으키는 것이었습니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을 정도의 높은 파도가 덮치는 형국이었지요. 겁이 난 남편은 연락도 끊고 잠적해 버리고 저는 갑자기 채무자가 되어 집, 땅, 돈… 모두 일순간에 안개처럼 사라져 버렸습니다. 연일 채권자들은 집으로 찾아와 난리를 피우고, 머리끄덩이를 잡히고, 폭행을 당하고, 그런 저의 부끄러운 모습을 어린 아이들은 울면서 지켜보았습니다.


  “우리 엄마 나쁜 사람 아니예요.” 하는 그 모습을.


  혀를 깨물며 참았습니다. 여기서 내가 무너지면 끝장이다. 저 아이들을 지켜야 한다. 죽고 싶은 적도 많았지만 이대로 끝내기는 억울했습니다. 아들과 딸은 밤마다 내 곁에서 손을 꼭 잡은 채 잠이 들곤 했지요. 엄마인 제가 저희들을 두고 갈까봐 그랬나 봅니다.


  선각과 임원들께선 “내 옆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다 나로 인해 빚어지는 것이다. 원인도 내가 제공하고 답도 내가 가지고 있다.”라고 교화하시곤 했습니다. 저는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 이리 열심히 살았는데…. 아이들과 보름이 넘게 라면만 먹고 살았습니다. 사업이 망한 것보다 남편의 무관심과 이기심에 치를 떨었습니다. 사람이라면 이럴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망하려는 살림살이를 아낌없이 버리고 새로운 배포를 차리라”는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잘 살 때는 형제들도 오빠, 형, 친하게 다가오더니 이 지경이 되니 다들 나 몰라라 했습니다.


  애들 데리고 들어갈 단칸방을 구해 놓고 돌아오니 텅 빈 집에 임원께서 와 계시더군요.


  “정신 차려라. 넌 아직 젊다. 다시 시작하면 된다. 애들 생각하고 수반들 생각해라. 시련은 있지만 좌절은 하지 마라. 너 답지 않다.”하시면서 배고픈 저에게 소머리 국밥을 사 주셨습니다. 저는 아직도 그 맛을 잊지 못합니다.


  세상에 태어나 흘릴 눈물이 정해져 있다면 그때 다 흘린 것 같습니다. 치성에 참석하면서 6년을 일심으로 빌었습니다. 상제님 밥 먹게 해 달라구요. 제가 가야 할 길이 정해져 있는데 지금껏 멀리도 돌아왔나 봅니다. 식당일이며 파출부 등 닥치는 대로 일하며 키워냈던 아이들이 알토란처럼 여물게 잘 자라 주었습니다. 그때는 풀잎처럼 여리던 아이들이 어느덧 다 자라 세상을 향해 날갯짓을 합니다.


  항상 입버릇처럼 “엄마는 마흔이 되면 이제 나를 위해 살거야. 내가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거야.”라고 되뇌었는데 그것이 이루어졌습니다.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진다지요. 부끄러운 일이지만 남편과는 헤어졌습니다. 하지만 후회는 없습니다. 저를 배신하고 버린 건 그 사람이니까요. 후회가 없는 이유는 제 안의 모든 에너지를 뽑아 최선을 다 했기 때문입니다. 지난 시간을 돌이켜 보면 많이 아팠지만 비싼 수업료 내고 인생을 배웠습니다. 그 사람이 편안히 잘 살기를 바랍니다. 한때는 제가 사랑했던 사람이니까요.


  제 나이 4학년 2반, 지금도 늦지 않습니다. 하고 싶은 것도, 해야 할 것도 많습니다. 저는 양위 상제님 도전님 품 안에서 자유로이 꿈꾸는 물고기입니다. 여기저기 자유롭게 유영하다 도전님 품에서 잠드는 행복한 꿈을 가진 물고기입니다. 눈을 감고 꿈을 꾸는 자는 꿈을 이룰 수 없지만, 눈을 뜨고 꿈을 향해 나아가는 자는 꿈을 이룰 수 있다지요. 늦다고 생각될 때가 가장 빠르다는 것을 인생을 통해 배웠습니다.


  오늘도 쓱싹쓱싹 내 안의 보석을 갈고 닦아 봅니다. 도전님께서 보자 하실 때 자신 있게 내 놓을 수 있도록 열심히 갈고 닦으렵니다. 위태롭게 걸어오는 저를 지켜봐 주신 선각께 감사하고, 마음으로 빌어 주고 이끌어 주신 임원들께 감사합니다. 그분들의 응원이 없었다면 지금의 저는 존재하지 않았을 겁니다.


  오늘 아이들에게서 문자 메시지가 왔습니다.


  “엄마 사랑해요. 열도 하세요”


  천군만마가 부럽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나를 인정해 주는 이가 있다는 건 참 행복한 일입니다. 저는 오늘도 행복한 꿈을 꾸는 도전님의 물고기입니다.

<대순회보> 10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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