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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화합으로 가정화목을 이루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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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서선희 작성일2018.04.19 조회5,35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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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7 방면 교감 서선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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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케의 소개로, 만난 지 한 달 반 만에 결혼을 하고 간 시댁은 평범한 집안이 아니었습니다. 대대로 내려오는 신(神)줄이 있었고, 그 기운이 얼마나 세던지 집안에 우환이 끊이질 않았습니다.

 

신줄을 받은 시할머니. 집안이 너무 가난해 생계를 꾸려나가기가 어려웠는데 어느 날, 꿈을 꾸셨답니다. 꿈에 쪽을 진 할머니가 나타나, 집 뒤에 있는 굴뚝에 가면 엽전 7개가 있으니 그것을 부려먹으라고 했답니다. 꿈에서 깬 시할머니께서 그곳에 가보니 엽전 7개가 실제로 있었고 그걸 가져다 점을 쳐서 자식들을 키우고 살림을 일으키셨습니다.

 

그 신줄은 시어머니께로 이어졌으나 시어머니 한 분으로는 모자랐던지, 가족들이 일찍 죽거나 시고모님들과 남편의 형제, 자매들에게도 그 기운이 작용해 모두들 신병을 앓았습니다. 남편 또한 그것을 피하기 위해 결혼 전 이 종교 저 종교를 다니다가 해외로 성지순례를 가고 급여를 모두 헌금으로 낼 정도로 기독교를 열렬히 믿었지만, 왠지 모를 허전함이 항상 있었답니다.

 

저와 아이들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효자인 남편이 시댁의 농사일을 도와 드리러 갈 때면 저도 따라갔는데, 그때마다 형언할 수 없는 뼈마디의 고통과 머리에서 나는 달그락거리는 소리로 시댁에 가기 전후 일주일씩 드러눕곤 했습니다. 연년생인 아이들 또한 기관지염, 천식, 비염 등으로 늘 응급실 신세를 지곤 했습니다.

 

남편의 급여가 많은 편이었지만 저는 아이들 양말을 기워 신기며 알뜰하게 살림을 해서 급여의 70% 이상을 저축했습니다. 그러나 적금을 탈 때쯤이면 꼭 시댁에 일이 생겨 속을 끓였을 뿐만 아니라 그 돈을 다 쓰게 돼, 점차 불평과 화가 쌓였습니다. 결혼 후 9년간 누적된 화는 시댁에서 남편의 명의를 도용해서 남편 앞으로 2억 가까이 되는 빚이 생기면서 폭발하고 말았습니다. 남편에게 더 이상 못 살겠다고 선언했는데 이런 심정이 아니더라도 집을 압류당하지 않으려면 이혼은 불가피해 보였습니다. 이런 답답한 상황을 지켜보던 옆집 새댁이 자신의 언니(전도인)가 수도를 하고 있는데 만나보면 좋을 것 같다고 해서 그분을 만나 남편과 함께 입도를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입도일을 정해 놓고 꿈을 꾸었습니다. 넓은 바다 백사장에 서 있는데 그곳에 두루마기와 갓으로 정장(正裝)하시고 수염이 긴 분이 서 계셨는데 너무 빛이 났습니다. 그때는 일이 잘 될 징조라고 막연하게만 생각했는데, 도장 영대에 와서 그분이 상제님이셨다는 것을 깨닫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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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도 후, 거리에 나앉거나 이혼할 상황에 처해 있던 남편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은행에 가서 하소연했는데 뜻밖에도 은행에서 없던 일로 해주었습니다. 사회적으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에 이것이 덕화라는 것을 저희 부부는 알 수 있었고 알게 모르게 신심(信心)이 싹터 선각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선각께서는 부산에서 울산까지 두 시간 반이나 걸리는 거리를 멀다 않고 이틀에 한 번씩 찾아와 축시 기도를 모시고 교화를 해주고 가셨습니다. 교화를 들을 때는 무슨 얘기인지 알 것 같았는데 선각이 가시고 나면 기억이 전혀 나지 않았습니다. 3개월 쯤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상제님의 덕화와 선각의 정성에 감복한 남편이 이 종교는 무슨 종교며, 무슨 일을 하시는 분이냐고 물었습니다. 선각이 이러이러한 일을 한다고 설명을 하고 돌아가시자, 저희는 수도를 하기로 했고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서 상의를 했습니다. 그 결과 저는 포덕사업을 하고 남편은 생계비를 벌기로 했고, 며칠 후부터 울산 회의실로 출근하며 포덕사업을 시작했습니다.

 

대순진리회라는 종교 자체를 몰랐던 저희가 친정과 시댁 식구들을 포덕하려고 했을 때, 대순진리회라는 말에 양가 모두 말렸지만 남편이 저와 가정을 책임지겠다고 신념에 차 말했더니 마지못해 수긍하셨고 얼마 뒤 친정 부모님께서 입도하셨습니다. 시댁에서는 신병에 시달리던 시고모님들과 시누이들을 입도시켰습니다. 그러나 입도를 하기로 했던 오빠는 마음이 변해 칼까지 들고 와 위협하면서 저희를 말렸으나 상제님이 계시므로 무서울 게 없었던 저희가 당당하게 행동하자 미쳤다고 하면서 돌아갔습니다. 그러고 나서는 친정 형제, 자매들이 두 번 다시 저희를 말리지 않았습니다.

 

신기가 많은 집안이다 보니 다양한 일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남편은 기도를 모시면서 환영을 보았습니다. 전 그것이 싫어 왼손으로 뺨을 세 번 때리면 환영이 보이지 않는다는 누군가의 얘기를 듣고 자는 남편의 뺨을 때렸고 놀란 남편이 일어나 버럭 화를 낸 적이 있었습니다. 결국 그 환영은 선무 임명을 모시고 나서야 없어졌습니다. 저 또한 꿈도 많이 꾸었으며 공부를 들어갈 때면 꼭 한복을 입은 조상님 한 분이 따라 들어오시는 걸 보았고 앉을 때 사그락 사그락 하는 소리까지 듣기도 했으나 선사 임명을 모시니 보이지 않았습니다.

 

도장 수호를 올라올 때는 선각 분들께서 아이들을 봐주셨는데 수호를 마치고 돌아오면 아이들 입이 부르터서 나팔처럼 부어 있었습니다. 그것을 겁액이 발동하는 거라 생각하여 독하게 마음먹고 계속 도장수호를 다녔습니다. 점차 그런 증상이 약해지다가 끝내는 없어졌는데 꿈에 쪽을 진 할머니가 나타나 “독한 년! 나는 이제 간다.”라고 하면서 떠났습니다.

 

남편은 조선소에서 일을 했으므로 위험한 순간이 많이 있었습니다. 꿈에 조상님께서 나타나 정성을 드리라고 10원 단위의 금액까지 알려주셨는데 그렇게 복을 짓고 나면 위험한 상황을 모면할 수 있었습니다. 한 번은 복을 짓고 출근했는데 “종식아!”라고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려 돌아보았지만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 순간 크레인 위에 실려 가던 철판이 바로 앞에 딱 떨어지더랍니다. 철판의 두께가 매우 두꺼웠으므로 맞았으면 즉사했을 거라고….

 

이렇게 눈으로 보고 덕화를 몸소 체험하니 열심히 하지 않을 수가 없었고 남편이 저보다 더 열심히 했으나 제가 먼저 선무 임명을 모셨습니다. 이때, 밤 1시 기도를 모시는 것이 철칙이었는데 어느 날, 남편 때문에 1시 기도를 모시지 못하게 되어 다투고 잤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남편이 저를 깨우더니 큰 절을 두 번 했습니다. 내가 죽은 사람도 아닌데 왜 절을 두 번 하냐고 했더니, 꿈에 조상님께서 나타나 어디 감히 선무에게 대드냐며 막 야단을 치셨답니다. 급선무(선무가 되는 것이 급하다)라는 말이 있고, 예전에는 선무에게도 선무어른이라고 했다는데 선무가 크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선무가 되고 입도한 지 일 년 반 정도 되었을 무렵, 선각과 가까운 곳에서 사업하고 싶어 이사를 했습니다. 우리 방면이 소속되어 있는 부산회관 근처로 가고 싶었으나 남편의 직장이 너무 멀어져 부산회관과 남편 직장의 중간 지점이면서 선각이 사는 덕계로 갔습니다.

 

덕계로 이사하면서부터는 부산회관으로 출근했고 아무 연고도 없는 곳에서 포덕을 다녔습니다. 그러나 포덕이 되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2,3일에 한 번씩 포덕을 해서 입도치성을 하기에 바쁜데 저는 아무리 열심히 해도 포덕이 되지 않았고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에 서러움과 자괴감이 오래된 친구인양 따라붙었습니다. 남들이 비웃는 것 같아 부끄러웠고 나는 왜 이럴까, 전생에 얼마나 뿌린 게 없으면 이렇게 포덕이 안 될까 하는 비관과 자책으로 날마다 울면서 집에 왔습니다.

 

그렇게 3년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출근해 포덕을 다녔건만 단 1호의 포덕도 하지 못했으면서도 포기하지 않았던 데는 항상 용기를 북돋아 주는 남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덕화로 몇 번의 위기 상황을 넘긴 남편은 평소에 수련도 열심히 했고 급여를 아끼지 않고 정성드렸으며 힘들 때 조언을 해주는 최고의 조력자이자 동반자였습니다.

 

그런 남편이 선무 임명을 앞두고 사고를 당했습니다. 도장 수호 후 내려오던 날이었습니다. 도장에서 내려오기 전, 제가 꿈을 꾸었는데 남편이 환자복을 입고 병원 침상에 앉아 이불을 덮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도를 닦는데 설마 무슨 일이 있으랴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부산에 내려왔습니다.

 

그날 따라 평소에 하지 않던 불평불만의 말을 내뱉고는 주일기도도 모시지 않은 채, 집에 가 잠을 잤습니다. 오후에 선각 분들께서 집에 오셔서 교화를 하시고 돌아가셨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밤 10시경에 남편이 퇴근하다가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상대 차량 기사가 음주운전을 하다가 중앙선을 침범해 남편 차량을 정면으로 들이박았습니다. 차는 폐차해야 할 상황이었고 병원에 실려 온 남편은 한쪽 눈알이 튀어나오고 눈 주변이 다 벗겨졌고, 팔도 다리도 세 동강이 났으며, 다리뼈가 대퇴부를 관통해 몰골이 처참했습니다. 그 병원에서, 자신들로서는 도저히 치료가 불가능한 상황이라고 해서 대학병원으로 옮겼습니다. 돌아가시던 선각 분들께서 연락을 받고 오셨고 제가 남편의 그 끔찍한 몰골을 보지 못하도록 하셨는데 수술실에 톱과 드릴이 들어가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다친 곳이 많아서인지 수술팀도 흉부외과, 성형외과 등 4팀이 동원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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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의 사고 소식을 듣고 달려오신 시어머니께서는 저희가 대순진리회를 믿어서 이런 큰 사고를 당한 것이라며 모든 게 다 저 때문이라며 별의별 욕을 다하셨습니다. 시어머니로부터 갖은 욕을 다 먹으면서도 생사의 갈림길에 놓인 남편을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건 오로지 상제님 전에 심고 드리고 태을주를 외우는 것이었습니다. “상제님 지난날 저의 과오를 모두 용서해주시고 남편을 살려주십시오. 남편이 살아야 수도도 하고 애들을 키울 수 있습니다. 남편을 살려주신다면 선각과 후각에게도 더욱 잘하고 조상님을 위해, 상제님 뜻을 받들기 위해 정말 열심히 수도하겠습니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이때가 치성 드는 날이라 선각 분께서 치성 모시러 올라가는 차 안에 계신 수도인 분들께 남편 얘기를 하면서 심고를 드려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차 안에 계시던 분들이 모두 치성을 모시며 남편의 쾌유를 위해 심고를 드렸다고 합니다. 이런 염원의 덕이 돌아 닿았는지 남편은 18시간이라는 장시간의 수술을 무사히 마쳤고 의식이 완전히 돌아오기도 전에, 저의 손을 붙잡고 간절하게 “서선무, 마음 변하면 안 돼요. 마음 변하면 나 죽어요. 그러니 절대 마음 변하지 말아요.”라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말했지요. 남편이 저렇게 큰 사고를 당했으니 서선무는 도를 닦지 않을 거라고. 남편도 제가 걱정이 됐던 모양입니다. 살아줘서 감사할 따름인데 오히려 제 걱정을 할 정도로 확고한 믿음을 보여주니 얼마나 든든한 수도의 동반자입니까? 한편으론, 자신의 제생이 상제님의 덕화로 인함이었다는 확신에서 나온 말이었겠지요.

 

남편을 회복시키기 위해 저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들통에 물을 담아 기도 시 옆에 두고 모셨습니다. 그 들통을 버스와 지하철을 여러 차례 갈아타며 병원까지 들고 갔는데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남들은 상처에서 진물이 나오지 않기까지 일주일이 걸린다는데 남편은 3일 만에 말랐고 회복도 빨라 의사들이 신기해했습니다. 또 눈을 많이 다쳤음에도 불구하고 시신경의 손상이 하나도 없다는 것에 대해서도 놀라워했습니다. 남편이 평상시 수련을 많이 하고 법수를 많이 마신 덕이겠지요. 또, 아이 똥을 넣어 만든 술이 뼈에 좋다고 해서, 그것으로 술을 만들어 양밥01을 하고 남편에게 먹이기도 했습니다.

 

며칠 뒤 남편이 이상한 꿈을 꾸었는데 팔 다친 사람, 다리 다친 사람, 눈 다친 사람, 붕대 감은 사람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남편의 머리와 입에서 줄줄이 빠져나가더랍니다.

 

대학병원에서는 한 달 이상 입원할 수 없었으므로 재활병원으로 옮겼습니다. 옮긴 병원 의사가 갈비뼈도 8개나 부러졌었는데 몰랐냐고 물었습니다. 남편이 아프다고는 했으나 워낙 크게 다친 곳이 많아 갈비뼈 부러진 것은 대학병원에서 미처 알아내지 못했던 모양입니다. 치료도 없이 제 자리에 잘 붙어 다행이라고 의사가 덧붙여 말했습니다.

 

8개월간의 재활치료를 받고 퇴원한 뒤, 사주를 보고 약을 지어주는 곳이 있어 남편과 함께 약을 지으러 갔습니다. 그곳에서 남편의 사주를 보고는 이 사람은 죽은 사람인데 왜 가지고 왔냐고 물었습니다. 남편은 아직도 그 소리가 잊히지 않는다고 합니다. 상제님의 덕화로 제생의 삶을 살고는 있으나 막상 그런 소리를 들으니 만감이 교차했겠지요.

 

이후 남편은 더 열심히 정성 드렸습니다. 퇴근하고 와서 7시 기도를 꼭 모셨고 주말이면 회관에 출근했습니다. 시댁에도 더욱 신경을 써서 자주 연락하고 왕래하여 어머니 마음도 점차 누그러지셨습니다.

 

한차례 거대한 풍파가 지나가고 시간이 흘렀음에도 저에겐 여전히 직계 수반이 생기지 않았고 다른 사람의 후각을 맡아서 선사 임명을 모셨습니다. 꿈을 꿔도 내 아이 기저귀를 갈아주는 것이 아니라 남의 아이 기저귀를 갈아주는 꿈을 꾸곤 했는데 같이 임명을 모신 선사 2명이 개인적인 사정으로 인해 체를 관리하지 못하게 되자 제가 또 맡게 되었습니다. 남편의 도움을 받아 부족하나마 선사로서의 책무를 하다 보니 시어머니께서 입도를 하셨고 집안에 크고 작은 우환들도 잦아들기 시작했습니다.

 

몇 년이 흘러 고목나무에 꽃이 피듯 제게도 수도생활 10년 만에 직계 수반이 생겼습니다. 지금은 선무가 된 그 직계 수반 앞으로 후각들이 맺어져 양위 상제님과 도전님의 뜻을 받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선감과 교감의 배려로 그 후각이 있는 밀양에 연락소가 마련되어 부산, 대구, 청도에 있는 도인들이 모여 주일기도를 모십니다.

 

작년에 저와 남편은 교감과 보정으로 각각 임명을 모셨습니다. 시댁은 이제 평안해졌고 형제들이 모두 잘 삽니다. 명절 때면 어머니께서 “너희는 제사 참석하지 않아도 되니 치성 잘 모시고 오너라.”라고 하셔서 명절이면, 황보정과 저는 아이들을 데리고 치성을 모시러 도장에 옵니다. 삼재팔난에 비견할 만한 집안의 겁액(劫厄), 아무리 해도 되지 않았던 포덕사업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나 혼자가 아닌 우리 부부의 화합된 힘으로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우리 집이 다 평안해진 것은 아닙니다. 자식으로 인해 속 끓이는 일이 생기곤 합니다. 그럴 때마다 황보정은 “우리가 잘 닦았든 못 닦았든 이만큼 닦았는데도 이러니 닦지 않았으면 어땠겠어요?”라고 말합니다.

 

상제님께서 끝나는 공부가 어디 있겠느냐고 하신 말씀처럼 운수 오는 그날까지 수도인들의 겁액 극복과 마음 닦는 공부, 남 잘 되게 하는 공부는 계속되겠지요. 제게도 아직 극복해야 할 겁액과 남을 잘 되게 하면서 닦을 것이 많기에 오늘도 화합을 강조하신 도전님의 말씀을 되새겨 황보정과 함께 가정화목, 이웃화합, 세계평화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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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회보 18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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