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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있는 이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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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태영 작성일2018.07.02 조회5,23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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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진리회복지재단 조리실 조리장 김태영 교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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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봄이 오나 했더니 화단에 조경되어 있는 영산홍 봉오리가 꽃을 피우기 위해 나무마다 힘찬 생명력을 보여준다. 수도인들이라면 누구라도 유형이든 무형이든 아픔 없이 도의 깨달음을 갖게 된 사람이 없을 것이다. 가슴에 담긴 풀리지 않는 서러움으로 웃고 또는 울고 있지만 말할 수 없는 아픔의 기억들을 가지고 양위 상제님의 덕화와 자신의 믿음으로 이겨내어 소중한 깨달음으로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 있을 것 같다. 모두가 하나같이 소중한 수도인으로서 나 역시 그런 연고가 없었다면 과연 이 자리 이곳에 있을 수 있을까?

 

젊은 시절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한때 내 개인의 능력과 실력을 인정받아 대통령 의전행사, 대구에서 유치된 2003년 대구 유니버시아드대회에서 세계의 스포츠 뉴스 통신 전송을 담당하는 메인 프레스센터의 조리팀장으로 행사를 진행 한 적이 있었다. 아무런 문제가 없이 치러내어 세계에서 모인 외신기자 및 임원들로부터 잘해줘서 고맙다는 인사와 대구라는 지방도시에서 국제적인 행사를 잘 치러 수고했다는 시청의 격려를 들었다. 국무총리와 국회의원 및 세계 각국의 경제 장관, 도지사, 시장 등 흔히 이야기하는 거물급들이 참여하는 수많은 국제적인 행사를 진행했으니 나의 마음에는 최고의 긍지와 자신감에 넘치는 생활이 이어졌다. 수백억씩 투자하는 신생 기업체에 오픈도 몇 군데 준비하여 성공적인 업무를 관리하던, 한마디로 잘나가는 조리사였다.

 

하지만 지금 내가 있는 이곳 복지관은 참으로 의미가 되새겨지는 곳이다. 복지재단에 몸을 담고 지내온 시간이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벌써 2년 남짓 되어가고 있다. 언젠가 산북요양소가 만들어지며 인력을 모집한다는 공문을 보게 되었고 내가 배운 기술을 종단에서 운영하는 곳에서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력서를 제출하고서 기다렸지만 인력을 충원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어 입사를 포기하고 본래의 일상으로 돌아와 일을 하였다. 무슨 연유인지 몰라도 그때부터 내가 하는 일들에 변화가 오기 시작했다.

 

어찌나 일이 꼬이기 시작하는지…. 멀쩡히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더 좋은 대우와 조건을 제시한 회사로 옮겼다. 그것이 또 다른 화근의 시작이었다. 새로운 변화를 꾀할 수 있을 정도로 좋은 환경을 누릴 수 있는 조건이었다. 그때부터 이상하리만치 일을 하여도 일을 하는 게 아니라 마음이 불안하고 능률도 오르지 않고 의견충돌이 생겨 불가피하게 짧은 몇 개월의 시간을 뒤로하고 일을 그만두었다. 나의 고집 때문에 주위의 조언도 묵살하고 스스로 그만두었다. 스스로가 옳다고 생각하면 미련 없이 떠나버리는 것이 나의 성격이었다.

 

그런 나를 바라보는 선각이 어떤 생각이 들었는지 나에게 도장의 복지관 공사에 동참하면 어떻겠냐고 의견을 물어왔다. 경제적인 문제와 하던 일을 접고 현장 일을 해야 하는데 대한 두려움이 있기도 하였다. 내가 누리는 일상의 것들로 인해 쉽게 현장으로 마음이 향하지 않았고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거절하곤 했다.

 

실직 후 지인의 도움을 받아 좋은 조건으로 재취업한지 한 달 만에 경영자가 바뀌는 일이 일어나 또 일을 관두게 되고 소송까지 휘말리게 되었다. 나 자신에게는 너무나 힘든 날들의 연속이었다. 다시 동업형식으로 자영업을 시작한지 2달 만에 실패하고 또 다른 곳에서 일을 하기 시작했다.

 

나의 이력을 볼 때 남에게 뒤질게 없었고 나 자신도 그렇게 믿고 지내왔다. 그러나 실패가 반복되자 왠지 모를 불안함과 예전에 느껴보지 못한 초초함이나 두려움이 나를 엄습해왔다.

 

가족을 돌아보았다. 엉망이었다. 앞으로도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일들만이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모두가 미웠다. 나 혼자 버려진것 같았다. 누구의 이야기도, 누구의 위로도 들리지 않았다. 가족들과 떨어져 인적이 없는 외진 곳에서 일하고 싶었다. 그렇게 마음을 먹은 탓인지 그런 곳에 연결되어 또다시 새로운 일터에서 근무를 하게 되었다.

 

막상 근무를 하는데도 항상 느끼는 마음의 불안감은 더 깊어만 가고, 소신도 책임감도 없이 무기력하게 보내는 하루하루가 반복되었다. 많은 사람들과 함께 했던 시간, 내가 하는 일에 자긍심을 가지고 지내왔던 시간 그리고 초라해진 지금의 나의 모습, 내가 겪어야 하는 현실이 믿기지가 않았다. 한때는 40~80명의 요리진을 지시하며 세계적인 국제행사를 계획하고, 밤새워 요리를 연구하느라 힘들었을지 언정, 능력 없다는 소리를 들어 본 적 없이 지내온 시간들이었다. 하지만 나와 달랑 1명의 요리사만으로 일하는 초라한 현실이 믿기지가 않았다.

 

나 스스로에 대한 원망에 가족이 보이지도 않았고 삶에 대한 모든 것이 허무함 그 자체였다. 이젠 지나간 시간들이 그리워지고 우울증 증세까지 나타나니 내가 봐도 내 모습이 아니었다. 이겨내 보려고 수련과 기도에, 미친 듯이 운동하고 달리고 또 달리고 해도 아무 변화가 없었다.

 

그런 와중에 선각이 안타까운 마음으로 복지관 공사현장에 일손이 부족하니 가면 어떠하겠냐는 수차례의 말씀을 하셨다. 단호하게 거부했다. 정말 싫었다. 이제는 정말 오갈 데가 없어서 피난처처럼 끌려가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더더욱 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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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상심으로 나의 주변을 돌아보았다. 1년 6개월 짧은 시간, 살아가고는 있지만 살아 숨을 쉬는 게 아니라 지옥 같았다. 5번이나 직장을 옮기고 그 공백 기간으로 인해 현실에 펼쳐진 내 모습은 참담했다. 나 자신도 육체적, 정신적, 물질적으로 공황상태에 이르렀다. 그런 나를 바라보는 선각분들, 아이들, 아내, 그리고 나 자신조차 힘들었다. 무언가 선택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스스로 마음의 정리를 했다. 무언가 정해진 길처럼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숙명과도 같은 생각이 들었다. 눈앞에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선각의 뜻을 따라야만 바르게 바뀔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가기 싫어서 완강하게 거부하던 내가 복지관 공사현장에 자원했다.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2008년 5월, 현장에 도착해서 일을 시작했다. 내가 왔을 땐 A동 건물과 B동 건물이 마무리되어 가고 있을 때였다. B동에서 바라보는 C동, D동 기초공사는 워낙 큰 공사라 완공될 때까지 내가 해낼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이 앞섰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보름 남짓 시간이 흐르고 도저히 이겨내기 힘들어 지방으로 다시 가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수도한다는 것을 아주 몰라서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나 자신은 항상 스스로가 강하다고 생각하고 어떤 일도 나름대로 잘 헤쳐 왔다고 생각했는데, 현장은 생각했던 그 이상이었다. 내가 아는 것과는 또 다른 환경에 적응하기가 힘들었다.

 

결론을 내렸다 ‘이게 아니야. 내려가야지’ 하고 마음을 먹는 순간 초여름의 무더위에 땀 흘리며 일하는 후각을 보았다. 가슴이 답답했다. 내가 어떤 말과 어떤 모습으로 후각 앞에서 처신했던가? 어떤 힘든 일도 도심으로 이겨내고 정신력이 강해야 된다고 하지 않았던가? 단순하게 이곳에 오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이미 그 사람이 필요하기에 그 시기에 그 자리에 있는 것이라고 이야기를 해주며 종단의 3대 중요사업 중 하나인 사회복지사업에 대한 중요성을 교화하지 않았던가?

 

내가 그만두고 간다면 후각도 후각이지만 내가 했던 말에 너무 무책임하다는 생각과 나 자신이 위선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후각의 모습이 나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어 다시 현장에 머무르게 되었다. 스스로도 이겨내지 못하면서 남보고 이겨내라고 하면 후각 또한 그만둔다 해도 할 말이 없지 않는가? 열심히 일하는 후각을 위해서라도 선각인 내가 약한 마음을 먹을 수가 없었다. 스스로에게 다짐을 했다. ‘모든 것을 다 나의 잘못이라 생각하고 받아들이자. 이겨내어서 이 복지관 건물이 완성되는 날까지 꼭 이겨내리라’, 그리고는 현장 생활 속에서 스스로가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왜 내가 이곳에 있어야 하는가? 그리고 왜 이겨 내야 하는가? 일을 하면서도 많은 생각으로 시간을 보냈다. 예전엔 나와 뜻을 함께하는 사람들과 모든 일을 해왔지만 현장은 달랐다. 그 속에는 강한 정신력과 순간순간 일어나는 자신과의 싸움, 사람과의 관계, 자신에게 일어나는 육신의 고통, 자신도 모르게 ‘양위 상제님, 도전님 감사합니다.’ 하며 마음속으로 몇 번이고 되뇌이던 여러 차례의 기억들, 수 많은 도움을 받았다는 것에 대한 감사함을 가슴속에 담아 두고 있다.

 

이곳에 내가 없었다면 이 소중한 깨달음을 얻을 수가 있었을까? 짧은 시간 속에서 겪었던 수많은 갈등. 힘들 때 위로를 받으려고 말씀을 드렸더니 잘못된 점을 조목조목 지적을 하시면서 자상하면서도 강하게 내 마음을 담금질 해주셨던 고마운 분들, 항상 염려 속에 내가 잘 되기를 기도해주셨던 고마우신 선각들, 나를 깨닫게 하여 지탱하게 해준 후각, 수도인으로서 그분들을 오랜 기억으로 가슴속에 고이 간직하려 한다.

 

현장에서 2개월 정도 지났을 무렵 숙소에서 꿈을 꿨는데 너무 생생해서 지금도 잊혀 지지가 않는다. 내가 꿈속에서 청와대에 인사발령이 나서 부임해서 첫 인사차 청와대에 들어가는데 남자가 아닌 여자분이 친절하게 나를 맞이하였다. 청와대 출입증을 주시더니 또 다른 출입증을 하나 더 주시면서 이것은 청와대 외에 다른 곳을 왕래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고는 꿈에서 깨어났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내가 도장을 출입하고 또 하나의 기관인 복지재단의 출입증을 받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현실이 일어나기 전에 하늘에서는 이미 계획되고 만들어져 여기에 내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조심스런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일이 풀리지 않던 것이 복지관에 있으라고 일어난 일이었었나?’ 라고 생각하면 참으로 두렵기도 하고 감사한 생각이 스친다. 현장에서 많이 느끼고 배우고 하였지만 복지관에서는 또 다른 새로운 배움이 나를 채워가고 있다. 아직도 나에게는 풀어야 하는 숙제가 너무나 많이 남아 있는 것 같다. 많은 이들과 더불어 이야기 하고 싶다. 나에게 스승이 되고 나의 잘못을 지적하여 바른길로 갈수 있도록 도움을 청하고 싶다.

 

큰일을 이루기 위해 힘을 주십사

하느님에게 기도했더니

겸손을 배우라고 연약함을 주셨다

 

많은 일을 해낼 수 있는 건강을 구했는데

보다 가치 있는 일 하라고 병을 주셨다

 

행복해 지고 싶어 부유함을 구했더니

지혜로워지라고 가난을 주셨다

 

세상 사람들의 칭찬을 받고자 성공을 구했더니

뽐내지 말라고 실패를 주셨다

 

삶을 누릴 수 있는 모든 걸 갖게 해달라고 기도했더니

모든 걸 누릴 수 있는 삶 그 자체를 선물로 주셨다

 

구한 것 하나도 주시지 않았지만

내 소원 모두 들어 주셨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못하는 삶이었지만

내 맘속에 진작에 표현 못한 기도는 모두 들어 주셨다

 

나는 가장 많은 축복을 받은 사람이다

 

 

‘사람은 누구나 원하는 일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일을 그르치고 힘들어하며 절망 속에서 수없이 떠오르는 생각, 그 속에서 소중한 삶의 의미를 깨달을 수가 있을 것만 같다.’

 

수도하기 전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제가 좋아하고 의미가 있는 내용의 글이기에 실어봅니다.

 

 

 

주요경력

 

ㆍ2003년 6월 - 대통령 의전행사 EXCO CONVENTION CANTER 지역혁신박람회 조리기획팀장

ㆍ2003년 8월 - DEAGU UNIVERSIADE MAIN PRESSC CENTER 조리기획팀장

ㆍ2004년 7월 - World Remnant Conference 조리팀장

ㆍ2005년 8월 - APEC AMC Businese Forum( 세계 중소기업 장관회의) 조리기획팀장

ㆍ2005년 04월 - UCLG ASPAC CONGRESS(세계지방자치단체연합 아태지부) 조리기획팀장

ㆍ2006년 3월 - PATA(세계 관광총회 및 투어 엑스포)

ㆍ2006년 8월 - International Meeting on Information display Confernce

* 그 외 세계 정치 경제 문화 세미나 및 국제행사 다수에 참여한바 있음

 

 

<대순회보 10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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