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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화의 모델이 되기까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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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성귀순 작성일2018.02.14 조회3,57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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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으로 겁액을 겪다

 

옛 어른분들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살 만하면 몸이 아프거나 돌아가신다는 분들이 종종 있어서 안타까울 때가 있다.”

남편이 직장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돈 걱정은 안 했습니다. 그런데 제 몸이 아프기 시작했습니다. 병원, 한방에 침, 경락, 뼈 맞추기, 봉침, 민간요법, 식품 등. 제가 알고 있는 것은 다해 보았습니다. 완치되지 않았습니다. 수도를 열심히 해서 푸는 방법뿐이라는 생각이 들 때쯤 연수가 나왔습니다. 오랜만에 후각 선사랑 연수를 가게 되어 신나게 금강산 토성수련도장에 연수를 갔습니다. 그때가 차선감 임명을 모시고 3~4개월쯤 지났을 때인 것 같습니다. 연수 이튿날 오죽헌 답사하고 경포대 답사 중에 어슬어슬 춥기 시작했습니다. 차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 차 안에서 눈앞이 점점 흐려졌습니다. ‘정신이 없어지는 것 같아. 내가 왜 이러지? 이 정도는 참을 수 있어.’ 옆에 앉아 있는 선사에게 괜찮다고 큰소리를 치면서 도장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날따라 식당청소 당번이 우리 조였습니다.

 

연수 온 첫날부터 아파서 청소도 못 한다고 말을 할 수는 없었습니다. 눈앞이 흐려지면 정신을 차리고 또 정신을 차리고. 아무리 생각해도 건강 상태가 정상은 아닌 것 같았습니다. 수반 선사를 따라 주방으로 청소하러 갔습니다. 혹 무슨 일이 있으면, 선사라도 옆에 있으면 마음이 놓일 것 같았습니다. 식당 바닥을 솔로 싹싹 문질러 닦고 있는데 앞이 보였다가 안 보였다가 했습니다. 그래도 끝까지 참고 남 몰래 마무리를 하고 혼자 샤워실로 갔습니다. 목욕을 하고 나면 괜찮아질까? 조금 정신이 드는 것 같아 숙소에 들어와서 그대로 누워 잤습니다. 정신을 차려보니, 조장분과 수반 선사, 방면 식구들이 모두 저를 바라보면서 정신이 드는지 물어보았습니다. 저는 왜 그러고 있는지, 제가 정신을 잃어버렸는지도 몰랐습니다. 선사는 계속해서 물수건을 번갈아가면서 제 이마에 올리고 있었습니다.

 

“차선감요, 괜찮습니까?”

“응”

“내일 병원에 가보셔야겠습니다.”

“내 몸이 갑자기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요.”

연수생들과 같이 움직이지 못하고, 전 결국 병원에 가고 말았습니다. 가벼운 감기라고 생각했는데, 신우신염이라는 진단이 나왔습니다.

“병원에 입원해야 합니다. 쉽게 보면 안 됩니다.”

이러한 의사진단이 나왔는데도 몸살감기라고 우기면서 해열제와 간단한 약을 받고 돌아오려고 하는 모습을 보며 의사선생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열이 안 내리면 바로 병원에 오세요. 소견서 가지고 종합병원에 가셔서 입원하셔야 합니다.”

“네.”

 

속으로 괜찮아질 텐데, 뭐 저리 걱정을 하시나 생각했습니다만, 이튿날 또 병원을 찾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주사를 맞고 소견서를 가지고 도장으로 돌아왔습니다. 강사분께서는 집으로 내려가라고 했습니다. 저는 연수 마치기 전에는 못 내려간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연수 마치기 전에는 절대 안 내려간다고 강하게 부정을 하니까, 어쩔 수 없이 그냥 있으라고 했습니다. 저는 연수자 숙소에서 누워만 있었습니다. 감사하게도 식당에서 잣죽을 매일같이 끓여 주셨습니다.

 

 

넷째 날에 겨우겨우 정신을 차리고 통일전망대를 따라갔습니다. 괜찮을 것 같아서 갔는데, 또 고열이 올랐습니다. 이빨 부딪히는 소리와 신음에 기사분께서 히터를 틀어 주셨습니다. 그 큰 차 안이 숨이 막힐 정도인데도 나는 여전히 춥다고 떨고 있었습니다. 도장으로 돌아와 바로 눕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마지막 날까지 잘 버티다가 나오는 봉심은 드렸습니다. 도장 출발하는 날 새벽에 강의실에 모였습니다. 죄송스러워 고개도 못 들고 있는 제게, 강사 한 분께서 다가오시며 말했습니다.

 

“너무 미안해하지 않아도 됩니다. 누구나 겁액이 있습니다. 조상님의 겁액이 아니면 이생에 와서 내가 지은 업일 수도 있으니, 잘 참고 견뎌내면 됩니다.”

그 말씀을 듣는 순간 두 줄기의 눈물이 주르륵 쏟아졌습니다. 너무나 고맙고 감사했습니다.

지방에서 연락을 받은 남편은 대구까지 나를 데리러 왔습니다. 걸음도 제대로 걷지 못하는 저를 보고 놀라고 말았습니다.

“아니 이렇게 되도록 집에 오질 않고 뭐 하고 있었나요?”

 

속초병원에 입원하지 않았다고 화를 냈지만, 말도 못하는 저를 보고 말문이 막혀 정신없이 차를 몰고 포항으로 내려와 병원으로 바로 갔습니다. 실신한 사람처럼 축 처져서 남편과 선사가 겨우 부축해 검사를 했습니다. 결과는 급성 신우신염과 급성 폐렴이었습니다. 두 종류 모두 고열을 동반하는 병이니 계속 실신을 했다가 정신이 들었다가 했나 봅니다. 의사는 안 죽고 살아온 것이 기적이라고 했습니다.

 

“급성신우신염은 빨리 치료하지 않으면 목숨이 위험합니다.”

입원해서 치료를 하는데, 하루 이틀 시간이 지나도 차도는커녕 아프기만 더 했습니다. 밤새 기침과 온몸의 열 때문에 사경을 헤맸습니다. 저는 너무 아파서 ‘상제님 저를 데리고 가십시오. 지금까지 아픈 고통만 해도 참기가 힘들었는데, 이제는 살고 싶지도 않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저는 큰 병이 아닌데도 ‘이렇게 아플 수가 있나?’라고 생각했습니다. 밤낮으로 아프니, 사람 꼴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얼마나 몰골이 망가져 버렸으면 병문안 오는 사람들이 나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차선감이 왜 이렇게 되셨나요?”

 

저는 입도 못 떼고 눈으로만 인사를 했습니다. 제가 흐트러진 모습을 한 번도 보인 적이 없었기에 놀랄 만도 했습니다. 입원 후 4일째 되는 날이었습니다. 정신이 조금 들었는데 번뜩 시학공부 생각이 났습니다. 이틀 있으면 공부를 가야 하는데 큰일 났다 싶었습니다. 의사 선생님께 퇴원을 시켜달라고 했습니다.

“무슨 말씀이세요? 지금 이 상태로 퇴원하면 죽어요. 저 의사면허 취소시킬 일 있으세요?”

 

의사는 화를 내면서 가버렸습니다. 공부 가야 된다는 생각에 아픈 것도 잊어버렸습니다. 회진 오신 의사를 잡고 애원을 했습니다.

“제발 좀 보내주세요. 제가 평생을 걸고 한 공부라서 꼭 가야 합니다.”

“그렇게 중요한 공부라서 가야 하지만 열이 내리지 않는데 어떻게 갑니까? 이대로 나가면 죽어요. 열이라도 내리면 생각이라도 해보지요.”

그런데 이때부터 신기하게도 열이 조금씩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의사는 걱정은 되지만, 워낙 간절히 애원하니까, 가퇴원을 시켜주었습니다.

“의사 목숨 걸고 해주는 거니까, 마치고 바로 돌아오시고 약은 꼬박꼬박 잘 챙겨 드세요.”

“네, 알겠습니다.”

 

저는 연수에서 5일 동안 사경을 헤매며 참고 왔습니다. 그런데 병원에 와서 또 5일 만에 치료도 제대로 하지도 않고 시학공부를 갔습니다. 밥을 먹지도 못하고 병원에서 죽만 먹다가 공부를 갔으니, 아무 힘도 없었습니다. 죽어도 공부는 한다는 마음을 먹고 상제님께 간절히 심고를 드렸습니다. 공부반에서는 비상 아닌 비상상태였습니다. 연수 때부터 아파서 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왔다고 했습니다. 공부반 사람들 모두 저를 위해 또 우리 반 공부가 무사히 마칠 수 있도록 한마음으로 기도했습니다. 저는 모든 에너지를 모아 공부를 무사히 마쳤습니다. 나 때문에 공부반에 조금이라도 피해가 가면 안 되기에 혼신을 다했습니다.

남편이 걱정이 가득 실린 얼굴로 데리러 왔습니다. 마누라가 죽을 것 같으니,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겠지요. 저는 혼자 서지도 앉지도 못했습니다. 이틀 후에 초강식도 참여해야 했습니다. 병원에 바로 입원하러 가야 하는데 남편보고 집으로 바로 가자고 했습니다. 병원부터 가야 한다는 남편과 실랑이를 하였습니다.

 

“그럼 이틀 후에 초강식을 가야 하는데 어떻게 또 가퇴원을 부탁합니까? 병원에서 나를 뭐라고 하겠습니까? 미쳤다고, 돌았다고 하지 않겠어요?”

 

종교가 대순진리회라고 병원차트에 기록까지 해 두었는데, 우리 대순을 욕 먹일 수 없었습니다. 가퇴원 이후에 사실 저는 병원에서 준 약을 한 첩도 안 먹었습니다. 식사도 못 했지만, 시학공부 기간이라 약을 먹지 않았습니다. 집에 와서도 약은 물론이고 밥도 제대로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남편은 제가 먹어봤으면 하는 음식들을 다 싸서 왔지만, 겨우 몇 숟갈 먹고는 먹질 못했습니다. 참 다행인 것은 그때 남편의 휴가 기간이었습니다. 평소에는 직장 때문에 치성참석이나 도장참배를 자주 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 방면 회관치성도 있고 해서, 그 기간에 휴가를 냈습니다. 수반들과 같이 치성을 참석하려고 계획이 세워져 있을 때였습니다. 나 혼자 밥도 못 먹고 혼자 누워있어도 남편과 수반들은 치성참석을 보냈습니다. 같이 다녀오라고 했을 때 남편이 못 간다고 했습니다.

 

“아픈 당신을 혼자 두고 어떻게 갈 수가 있습니까?”

“나를 살리고 싶으면 다녀오세요.”

그 와중에 치성참석을 다 시켰습니다.

“제가 죽을 것 같았으면 벌써 상제님께서 데리고 가셨겠죠. 다녀올 때까지 살아있을 테니, 정성이나 잘 드리고 오세요. 아버님 어머님 만나 뵙고요. 인사 잘 드리고 오십시오.”

 

이틀 후에 초강식을 하러 여주본부도장에 갔습니다. 제 인생에서 최저의 몸 상태였습니다. 모든 것이 고갈되어 버린 것 같았습니다. 거죽만 남아 푹 내려앉으면 없어져 버릴 것 같은 몸으로, 어금니 꽉 물고 간신이 버티고 있었습니다. 강식을 하려고 신생활관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습니다. 밥을 먹는데 밥알이 돌이 되어 입안에서 굴러 다녔습니다. 목에 넘어가질 않았습니다. 뱉어 내지도 못하고 억지로 넘기려 하는데 눈물이 났습니다. 초강식을 하려면 억지로라도 먹어야 했습니다. 눈물을 머금고 자갈 같은 밥알을 삼켰습니다. 강식시간은 다가와서 연습을 하는데 주문소리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주문을 잘해야 강식을 하는 것인데, 본전에 올라가서 잘할 수 있을까? 말소리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강식은 시작되었고 상제님 앞에 앉아서 강식을 했습니다. 주문소리가 나질 않았습니다.

 

몸으로 겁액을 겪다(2)

 

저는 순간 ‘상제님 살려주세요!’라며 마음속으로 외쳤습니다. 그 순간 눈물과 함께 주문 소리가 터져 나왔습니다. 무사히 초강식을 마치고, 숭도문을 나서는데 다리에 힘이 풀리면서 앞이 안 보였습니다. 공부반 선사들이 부축해서 방으로 왔습니다. 제가 위험할 것 같으니까. 병원으로 가자고 태워준다고 했습니다. ‘갈까’ 하고 생각도 했습니다. 그런데 내일이 본부성이라, 임원분들이 모두 도장으로 오시는데, 인사는 드리고 내려가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날 밤 실신하듯이 누워서 잠을 청했습니다. 그런데 비몽사몽간에 하얀 가운을 입은 남자 의사와 여자 의사가 찾아와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을 수술하기 시작했습니다. 뼈 사이사이에 있는 이물질 모두 끌어내는 작업을 하는데 기계와 뼈가 부딪치는 싹싹거리는 소리가 제 귀에 들렸습니다. 저는 너무 힘이 들어 신음을 냈습니다. 옆에서 자고 있던 선사들이 신음소리에 놀라 잠을 깼는지 저를 깨웠습니다.

“차선감요. 괜찮습니까? 지금이라도 병원에 갑시다.”

저는 신명 시료를 받는 중이라는 생각에 눈을 감고, 개미 같은 목소리로

“괜찮습니다. 미안합니다. 주무세요.”

라는 말만 반복했습니다.

 

낮 1시가 되도록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임원분들께 인사드리고 대구까지 회관 버스를 타고 갔습니다. 숨이 붙어있다는 것이 신기했습니다. 먹지 못하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면서 숨은 쉬고 있으니까요. 2박 3일 후에 병원에 돌아온다고 약속하고 가퇴원해서 6일 만에야 병원에 돌아갔습니다. 그것도 다 죽어가는 환자가 되어서 갔으니, 의사 선생님이 화를 냈습니다.

 

“나도 의사 면허증 평생 걸고 땄어요. 이제 와서 무슨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하실 건가요? 급하니 검사부터 해봅시다.”

남편과 선사는 걱정과 긴장이 교체되는 눈빛으로 저를 부축해서 검사하러 갔습니다. 결과를 기다리고 있으면서, 많이 나빠지지 않았기를 기도했습니다. 호명을 받고 들어가 의사 선생님과 함께 검사 결과를 보게 되었습니다.

 

“가퇴원했을 때 약은 꼬박꼬박 잘 먹었어요?”

“네”

늦게 왔다고 야단치는 바람에 거짓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실은 약을 한 첩도 먹지 않았습니다. 약이 너무 독해서 밥을 못 먹었기 때문에 도저히 빈속에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검사 결과지를 자세히 보던 의사 선생님께서 눈을 크게 뜨면서 놀라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참 이상하네. 사람은 다 죽어 가는데.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우리 세 사람을 컴퓨터 앞으로 불러서 검사 결과를 보라고 했습니다.

 

“정상입니다. 다 나았습니다.”

남편, 선사, 의사 선생님까지 네 사람이 확인했습니다. 우리도 놀라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습니다. 저는 어제밤, 신명 의사 생각이 났습니다.

‘분명하다. 신명께서 시료를 하신 것이 맞아.’

의사 선생님은 어젯밤 꿈속의 신명 의사와 똑같은 말을 제게 건넸습니다.

“특별히 좋은 영양제를 처방해 드리겠습니다. 식사 많이 하시고 몸조리 잘하시면 됩니다.”

 

연수 5일의 고통, 병원 입원 5일 고통, 시학공부·초강식까지 5일 고통, 약도 먹지도 않은 상태에 식사도 못 하고 초죽음이 되었던 것입니다. 15일 동안 오직 상제님을 믿고, 가고 오고 한 것뿐인데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집으로 돌아와서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이 침대에 누워있는데. 연수강사께서 해 주신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미안해하지 않아도 됩니다. 누구나 겁액은 다 있습니다. 잘 참고 이겨내시면 됩니다.”

그때 그 따뜻한 말씀이 생각나면서, ‘겁액’에 대한 『대순지침』의 한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3절 겁액(劫厄)을 극복하라

 

(가) 모든 일에 그 목적을 달성하려는 과정에는 반드시 장애가 있으니 이것을 겁액이라 한다.

(나) 겁액을 극복하고 나아가는 데 성공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다) “함지사지이후(陷之死地而後)에 생(生)하고, 치지망지이후(置之亡地而後)에 존(存)한다.”는 옛사람들의 말이 있음과 같이 복(福)은 곧 복마(伏魔)로 풀이함은 화복(禍福)이란 말과 대등할 것이다.

(라) 많은 사람들은 이 겁액에 굴복하여 자포자기(自暴自棄)하는데서 탈선이 되어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중도에서 앞길을 막아버리는 사례가 많다.

(마) 신명공판(神明公判)이란 운수를 받는 자리에 가서 있는 것이 아니고 수도과정에서 먼저 받게 되므로, 상제께서도 “나는 해마(解魔)를 위주하므로 나를 따르는 자는 먼저 복마(伏魔)의 발동이 있으리니 복마의 발동을 잘 견디어야 해원하리라.”고 타이르셨으니 깊이 명심하라.

 

가, 나, 다, 라 어느 것 하나 뺄 수가 없이 가슴을 치며 제게 와 닿았습니다. 수도 과정에 최고로 힘든 일이며, 최고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하기까지 꼭 명심하고 기억해야 할 것은 ‘겁액’입니다. 조상의 겁액은 그래도 참을 만한 것입니다. 이생에서 지은 겁액은 더 무섭고 힘이 든다는 것을 뼈를 깎는 고통을 통해 저는 경험했습니다. 저는 신명께서 시료를 해 주시지 않았다면 겁액을 극복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신명이 도와주셨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겁액을 이겨내고 새로운 꿈을 꾸다

 

몸조리기간이 6개월이나 지나서야 원기회복이 되었습니다. 상제님의 덕화에 어떻게 보답을 해야 하나? 죽을 때까지 갚아도 부족할 덕화를 많이 받아서 더 많은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포덕사업이 옛날처럼 잘 되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고민하다가 생각한 끝에 앞으로 전 세계로 나가 포덕사업을 하고 지도를 해야 할 때가 올 터인데 그러려면 더 배워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대학에 들어갈 자격이 없었습니다. 고등학교 졸업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대학은 내게 꿈 같은 일이었습니다.

 

그 후 2013년 3월에 수강을 갔는데, 대순종학과에 검정고시 졸업생도 자격이 된다고 들었습니다. 앞으로 수도인들이 공부를 많이 해야 된다는 말씀을 듣는 순간, 저도 가고 싶었습니다. ‘기회는 왔다. 검정고시에 합격만 되면 된다.’ 집에 와서 남편에게 대학에 가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남편은 제가 일단 검정고시에 합격만 하면 보내주겠다는 약속을 하였습니다.

 

혼자서는 안 될 것 같아서 학원에 등록했습니다. 8월에 고시가 있고 시험 기간은 3개월 남았기 때문에, 원장이 2014년 4월에 있는 고시에 응시하면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2014년에는 대학을 못 가는 것이네. 그래서 저는 학원장에게 8월에 합격을 해서 14년도에 꼭 대학을 가고 싶다고 했습니다. 원장은 불가능하다고 했습니다. 8과목을 다하려면 6개월 정도 시간이 걸린다고 했습니다.

“고등학교 3년간 하는 공부를, 3개월 만에? 30년 넘게 쓰지 않았던 머리로 쉽지는 않아요.”

 

저는 일단 시작해 보자며 시간 나는 대로 야간·주간을 번갈아 가며 학원에 다녔습니다. 그렇지만 빠지는 시간도 많고 하니, 공부가 연결이 안 되고 이해도 잘 안 되었습니다. 이래서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한 달간 두문불출하면서 밤낮으로 문제를 풀며 공부를 하고 검정고시에 응시했습니다. 양위 상제님, 도전님 전에 합격만 되게 해달라고 빌고 또 빌었습니다. 회관에서는 한 달간 제가 안 보인다고 어디 갔는지 다들 궁금해 하였습니다.

 

검정고시 준비한다는 말은 차마 못 했습니다. 떨어지면 창피하기도 하고 사람들은 제가 고등학교 졸업 안 한 것도 몰랐으니까요. 검정고시를 치고 합격할 것 같다고 하니, 남편이 믿지 않았습니다. 20일 후에 발표하는 날, 남편이랑 같이 발표를 보러 갔습니다. 합격 통지를 받았습니다. 그때서야 믿고 수고했다고 하면서, ‘우리 마누라 머리 좋네.’ 하며 칭찬을 했습니다. 저는 마음속으로 상제님, 도전님께 감사 인사를 드렸습니다.

 

‘양위 상제님, 도전님 감사합니다.’

합격증 받고, 바로 성적증명서를 떼고, 바로 대학입학 수시모집에 응시했습니다. 고시학원장이 너무 좋아서 흥분된 목소리로 축하를 해 주었습니다.

“성귀순 씨 합격했습니다. 축하합니다. 야~ 정말 대단하십니다.”

저는 이렇게 50이 넘은 나이에 어렵게 대진대학교 대순종학과를 가게 되었습니다. 제게는 정말 꿈같은 일이었습니다. 3번째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화평의 길> 영화에서 대원종에 대한 대사가 떠오릅니다.

“구천상제님께서 창생들이 걸어갈 수 있도록 이미 조화하여 놓으신 큰 길이 있다. 이것은 세계의 대도이다.”

“그 길은 하늘을 향한 길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땅 위에 마련된 길이다.”

“신명들도 사람들과 함께 걷는 지상의 길이다.”

“마음먹으면 실현되고 나타나는 길이다.”

대순진리회에서 수도하면 마음먹은 대로 실현되기 때문에 정말 마음을 잘 먹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훈회·수칙대로 마음먹고 생활하면, 우리의 모든 원을 풀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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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화의 모델이 되다

 

대학 진학 후 중학교 1학년 딸을 두고 가족을 떠나 기숙사 생활을 한 지 1년 6개월이 지났습니다. 이런 생활은 남편의 허락과 도움 없이는 할 수 없습니다. 올여름 방학 때, 선감께서 연수를 갈 수 있는지 연락이 왔습니다. 오랜만에 나온 연수라서 가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일이 생겼습니다. 하필이면 5개월 전에 남편이 여름 휴가를 잡은 날과 같은 날짜였습니다.

 

선감께 휴가 날이 겹쳐서 연수를 못 간다는 말씀을 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혼자 고민을 하다가 주위에 수도하시는 여러 분께 여쭤보니까.

 

가족하고 떨어져 있는 사람이 함께 여행을 가야지 연수는 다른 사람 보내라고 합니다. 이 사람 저 사람 여쭤 봐도 제 마음과 같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기도를 모셔보고 결정한다는 마음으로 기도를 모셨습니다. 저의 마음은 연수를 가는 쪽으로 결정이 났습니다. 그러나 남편하고 의논해야 바로 된 결정이 나니까 남편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그런데 남편은 생각지도 않은 대답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신이 그렇게 해야 한다면 그렇게 하세요. 같이 연수 갑시다.”

저는 너무 행복했습니다. 그때서야 선감께 연락을 드렸습니다.

남편이 마침 그때 휴가라서 효경이 데리고 같이 연수를 가야 할 것 같습니다. 선감께서 오랜만에 가족끼리 만나는데 그래도 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한 교령은 수호서고 효경이는 책 좋아하는데 도장에서 오랜만에 쉬면서 책보라고 하면 될 것 같아요.”

“그러면 더 잘 됐다.”

“오후에 답사 같이 갈 수 있는지, 주선감께 말씀드려보고 허락하시면, 연수답사도 같이 갈 생각입니다. 자가용 몰고 연수차 뒤에 따라오라고 하면 될 것 같아요. 한 교령도 효경이도 자연스럽게 교화도 듣고, 구경도 하고요.”

“정말 잘 됐다. 성 교정은 차선감이 같이 가서 데리고 다니면서, 교화도 하고 도를 잘 깨달을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으니, 더 좋다.”

 

제가 연수를 가기로 결정을 하게 된 것은, 몇 가지 이유에서였습니다. 성 교정은 우리 언니입니다. 형부가 16년째 병원에 계시기 때문에 몸이 자유롭지 못합니다. 연수를 처음 가기에 교화도 해 주고, 더 잘 깨달을 수 있도록 도와줄 좋은 기회였습니다. 또 다른 이유는 남편이랑 딸 효경이 때문입니다. 저는 학교에서 매달 치성참석, 시학공부 다니면서 도장을 자주 가지만, 남편과 딸은 직장을 다니고, 학생 신분이라 도장참배, 치성참석을 못하고 있었습니다. 저만 하는 것 같아 미안했습니다. 그들에게도 상제님을 뵙고 조상님을 뵙게 해 주는 것이 저의 도리라고 생각되었습니다. 자주 찾아뵙지 못하니, ‘시부모님은 저보다 남편과 손녀가 더 보고 싶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저희는 매번 휴가철이 되면 다 함께 도장에 와서 상제님 뵌 후 하루 정도 있다가 휴가를 갔습니다. 이번처럼 5박 6일 계속 같이 도장에 있기로 한 것은 처음 있는 일입니다.

 

우리 가족은 울산에 가서 언니인 성 교정을 태우고, 본부도장으로 갔습니다. 초강식을 하고 연수를 가야 해서 하루 전날에 갔습니다. 남편과 언니는 주일기도를 모시고, 저는 초강식에 참석했습니다. 저는 너무 감사하고 행복했습니다. 가족이 모두 상제님 품 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연수 잘 다녀올 수 있도록 심고도 드렸습니다.

 

우리는 토성수련도장에 도착했습니다. 가족하고 같이 연수를 왔다고 사무실에 신고했습니다. 도장에서 반갑게 맞아 주셨습니다. 들어가는 봉심을 올리고 능소에 도전님께 인사드리고 나서 주선감께 우리 가족이 연수에 오게 된 동기를 말씀드렸습니다. 선감께서 기뻐하시면서, 7시 기도 모시고 가족 모두 얼굴 좀 보자며, 사무실로 오라고 하셨습니다. 남편이랑 딸이랑 성 교정과 선감사무실에서 만나 인사를 드렸습니다. 따뜻하게 우리를 반겨 주시면서 내일 연수차를 따라오라고 허락을 해 주셨습니다. 연수반 사람들은 이상한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기도 하고 말을 걸기도 했습니다. 선감께서는 계속해서 우리 가족을 챙겨 주시고 맛있는 것도 하루에 2가지씩 연수반 전체에 다 사 주셨습니다. 딸에게도 맛있는 과자를 따로 사 주시고, 입장료도 모두 제공해 주셨습니다. 제가 황송해서 어쩔 줄 몰라 하면, 선감께서는 영감 잘 챙기라고 더 챙겨 주셨습니다. 하루 이틀 지나면서 연수생들은 우리 가족을 챙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부러워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도 저런 사람 만나자.”

“남편 데리고 연수 오자.”

“진짜 좋겠다.”

“야수와 미녀 같다.”

딸을 보고

“요즘 학생이 어떻게 여길 따라 왔지?”

“몇 날 며칠 잘도 따라 다니네.”

“남편은 하루 오고 안 따라올 줄 알았는데 끝까지 잘도 따라 다니네.”

“어떻게 저런 사람 만났어요? 부러워요.”

등등 많은 얘기를 들었는데 다 생각이 안 납니다.

 

연수반은 2명이 부족한 88명이었는데, 남편과 딸까지 포함해서 90명이 채워지게 된 것입니다. 선감께서는 가화의 중요성에 대해 교화를 해 주셨습니다.

“가화가 수도의 기본입니다. 가화가 되어야 큰 공을 거둘 수 있습니다.”

 

성 교정은 높은 선감께서 너무 잘 해주신다며 감사드린다고 했습니다. 선감께서 우리 부부에게 잘해 주시는 것은 부부가 착하게 열심히 하니까, 대우를 받는다고 하면서 성 교정도 부러워했습니다. 5박 6일 동안 토성도장 안에서는 소문이 나서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하며 살피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저는 휴가를 안 가고 연수를 와서 이런 대우를 받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선감께서는 연수를 마치고 떠나올 때까지 우리를 챙겨 주셨습니다. 다녀온 이후 같이 연수받은 분들이 방면으로 내려가셔서, 우리 가족을 가화의 모델로 삼아 많은 교화를 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양위 상제님, 도전님 품 안에서 우리 가족은 대우를 받았습니다. 도장에서 공부 잘하고, 잘 먹고, 잘 쉬고 온 것만으로도 너무나 감사하게 생각하는데, 지방에까지 소문이 퍼져서 칭찬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너무나 감사합니다. 앞으로 더 잘해야 되겠다는 생각에 책임감이 더 깊어졌습니다. 수도인으로서 모범이 되는 가정이 되도록 더욱 열심히 정진하겠습니다. 

 완(完)

 

<대순회보 17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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