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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천 방면 윤영준 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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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7.01.19 조회2,79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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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전님 분부를 받들어 30여 년 동안 공사에 이바지하면서 순전히 공사만 생각하고 왔어요. 그렇기에 보람이라고 하기 보다는 “일심을 가지면 안 되는 일이 없나니라.”는 상제님의 말씀처럼, 전 순전히 일심으로 도전님 분부를 받들고 공사만 하면 된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한편으로는 하찮은 이 몸이 이렇게 도전님 가까이서 도장 공사에 참여를 하게 되었다는 것이 감개무량할 따름입니다.

  윤영준 보정은 태극도 시절 감천도장을 시작으로, 대순진리회 중곡도장과 여주본부도장(봉강전)에 이르기까지 30년 넘게 도전님의 명을 받들어 목수 일을 맡아 왔다. 실로 우리 도장 건축물에 있어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산증인이다. 오늘 한 평생을 도장 건조에 몸 바쳐 온 윤영준 보정과의 인터뷰를 가졌다. 그는 (음)1924년 6월 29일생으로, (음)1956년 12월 4일에 입도(入道)하셨고, 2002년 3월 16일에 보정 임명을 모셨다.

 

입도하게 된 계기를 말씀해주십시오.


  예전부터 도(道)를 닦아야겠다는 생각을 자주 갖곤 했었습니다. 틈틈이 일하면서 불가(佛家)의 수행(修行) 같은 것에 관심도 많이 가져 보았죠. 그러다가 제가 몸담고 있는 건설회사의 사장이 하루는 저를 보고 “자네 도 좀 닦아 보겠나?”라고 하시데요. 전 의아해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삶의 빛을 찾은 느낌이 문득 들어 “도 닦으면 어떻게 됩니까?”라고 반문하였죠. “도통(道通)하는 걸세.”라는 그 사장의 대답이었습니다.

  간단명료하면서도 막연한 답변이었지만, 저로서는 한 평생 꼭 이루고 싶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사장에게 신앙의 대상이 누구인지, 수행 방법이 어떤 것인지, 어떻게 하면 도통을 받을 수 있는지 등등 수많은 궁금한 점들을 물어보고 재차 알아보았답니다. 그 속에서 입도식을 올리면 도통 받을 수 있는 길이 보인다는 말에 병신년(丙申年) 섣달 초나흘(음 1956년 12월 4일)에 경기도 포천에서 입도를 하였습니다. 그러고 보니 도에 입문한지도 벌써 53년이 지났군요.

  입도 후로는 만수도인 모두가 그러하겠지만, 저 역시 도통을 삶의 최고 목적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서 수도에 진심갈력하였습니다. 그래서 다니는 회사를 그만두면서까지 선각에게 다양한 교화도 듣고, 기도도 모시고, 틈이 나면 포덕사업도 해 보면서 하루하루 열정적인 시간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도전님께서 목수 일을 보라는 분부가 계셔서 이때부터 다시 전직(前職) 일을 도에서 하게 되었습니다.

 

태극도 당시 감천도장을 세우던 과정을 들려주십시오.


  1961년 도전님의 분부를 받들어 부산 감천도장 목수 직무를 맡게 되었습니다. 이곳 감천 터는 좌측에 천마산과 우측에 옥녀봉이 자리하고 있어, 산 위에서 내려다보면 배 형상을 띠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배는 앞뒤가 똑같이 뾰족한 상태여서 가야 할 방향이 뚜렷하게 정해지지 않은 채 물에 떠 있는 형국입니다.

  그땐 도가 성(盛)하지 않아 총무부 사무실 조차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도전님께서는 남문 쪽에 총무부 사무실을 짓고, 법학관·대강전·진양원·수진각·호장실을 증축 및 보수하라는 분부를 내리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회관을 북문 쪽에 영화관처럼 길게 나열하는 방식으로 새로이 세우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도전님의 분부를 받들면서 느낀 점은 이미 모든 일들을 알고 계신 분 같았습니다. 각각의 건물 터를 닦아 기초를 다지는 데에도 일일이 세세하게 설명해 주셨으며, 아무렇게나 지시하시는 것처럼 보여도 막상 그 자리에 건물을 세우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안성맞춤인 자리가 완성되었답니다. 그리고 감천도장의 건물 증축 및 신축이 끝난 후, 아래는 뱃머리처럼 뾰족하고 위로 갈수록 넓어지는 형상의 도장이 만들어졌답니다.

  바로 감천도장이 배와 똑같은 형상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산 위에 올라가 이 광경을 지켜보던 저는 내심 ‘정말 대인은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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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도전님께서는 이에 관해서, “내가 감천도장을 의도적으로 배 형상을 만들려 했던 것은 아니었어. 어떻게 짓다보니까 배가 된 것이지”라는 말씀이셨습니다. 전 무슨 의미가 담겨 있는지 몰라, “예, 그렇습니까?”라고만 답변을 드렸지요. 또 말씀하시길 “처음 이 뱃머리는 저 북문 쪽에 있었지. 그런데 지금에 와서 회관을 지으면서 뱃머리는 감천항으로 향하게 된 것이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침내 배의 방향이 정해진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뿐만 아니라, 도전님께서는 생계의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수도에 전념하고 있는 도인들을 많이 걱정하셨답니다. 그래서 남쪽 출입문 부근에다가 “여기 이발소를 만들고 도인들한테는 반액만 받게 해 주어라.”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북쪽 출입문 아래 능선 길 위에다가는 “점포를 만들어 어려운 형편에 처한 도인들을 먹고 살게끔 하여라.”는 분부를 내리시면서, 계단식 형태로 점포 4~5동을 도장 양쪽 길가에 만들게 하셨습니다.

  그 무렵 포장(선감)ㆍ호장(교감)들은 도전님을 불신하고 뜻을 따르지 않기 시작했습니다. 도전님께서는 신축된 회관에서 첫 총회를 여시면서, 단합과 융합하자는 훈시를 하셨습니다. 더욱이 이 자리는 임원뿐만 아니라 선사 · 교정까지도 참석하였습니다. 하지만 도전님께서는 여간해서 낙루(落淚)를 안하시는데, 눈물을 떨구셨습니다. 불신과 배신으로 인해 그러신 것이 아니라, 만수도인 모두를 데려가지 못해 서러워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며칠 후 도전님께서 출궁하셨다는 소문이 감천도장 내에 자자했습니다. 그 순간 전 정신이 번쩍 들면서, 단 걸음에 천마산을 올라 감천도장을 내려다보았습니다. 배는 감천항을 향해있었고, 도장 주변 계단식 점포들의 지붕이 너울을 펼치고 있는 형상이었습니다. 마치 배가 움직이면 주위의 너울이 출렁이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 광경을 보면서 전 무릎을 탁 치며 도전님께서 지금껏 분부를 하신 것에 대해 미약하나마 그 뜻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제 배가 떠난다는 것을요.

  그렇지만 이제 도전님을 언제 또 뵐런지 큰 낙심을 하게 되었답니다. 며칠 동안 집에 들어 앉아 곰곰이 생각해보니, 도전님께서 출궁(出宮)하신 것과 뱃머리가 형성되어 이제 항해하게 된 것에는 큰 뜻이 담겨져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 답은 지금에 와서야 느꼈지만, 배가 서해바다에서 인천 앞바다 지나 한강으로, 한강으로 해서 중곡동으로 오게 된 것입니다.

 

수리사(修理寺)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주십시오.


  도전님께서는 감천에서 출궁하신 후, 서울 부암동으로 상경하셨습니다. 그런 후 지방에 있던 몇몇 선사·교정을 불러 들였습니다. 그때 저도 포함이 되어 도전님을 뵈러 올라갔답니다. 정말이지 두 번 다시 못 뵙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다시 뵙게 되자 눈물이 앞을 가렸습니다. 무언가 말은 드려야 했지만, 하염없이 눈물만이 내렸습니다. 도전님께서는 따뜻하게 우리를 맞이해 주셨죠. 그리고 그때 최봉건 교정의 이종 사촌 동생인 수원 경찰서장 안내로 안양 수리사(修理寺)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여기 주지(住持)의 성씨(姓氏)가 심(沈)씨였는데, 처음 도전님을 뵈니 보통 분 같지 않더랍니다. 그래서 꼭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사용하면서, 깍듯이 받들어 모셨습니다. 도전님께서는 주지에게 방 하나를 빌려달라고 해서 기거(寄居)를 하시게 된 것입니다.

  하루는 주지가 도전님께 여기서 이러시지 마시고 절 내의 빈 터를 하나 드릴 테니 꾸며서 공부하시라고 했습니다. 그 터는 주지가 서울에 내로라하는 갑부가 팔라고 해도 내놓지 않던 땅이었는데, 그런 땅을 도전님께 그냥 드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도전님께서는 이곳에 거처를 만들라는 분부를 저에게 내리셨습니다. 곧바로 토담을 쌓고, 흙벽돌로 방 2칸에 부엌 하나 해서 집을 지었답니다. 그렇게 해놓자 그날 저녁, 도전님께서는 치성을 올리셨어요. 하지만 그 이튿날 내려가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에 전 크게 낙심을 했습니다. 그때 도전님께서는 “뭘 그래. 나중에 다시 부를 터이니 내려가 있어라.”고 하셨습니다. 한편으로는 많은 아쉬움이 남았지만, 분부를 저버릴 수 없기에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다들 내려간 이튿날부터 도전님께서는 49일 공부에 들어가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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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9년 중곡동에 도장 착공 때, 수리사 주지가 도전님께 새로이 대웅전을 세워 줄 것을 간청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도전님께서는 이를 승낙하고, 저를 대동하여 수리사로 떠났습니다. 나무도 순전히 산에서 베어다가 쓰고 사올 건 사오고 해서 건물을 올렸습니다. 이때에도 도전님께서는 세세하게 분부를 내리셨습니다. 작업은 기둥과 기둥 사이를 9자 간격으로해서 시작되었습니다. 한옥건물 치고는 꽤 큰 편에 속하죠. 그래서 건물을 지주할 기둥작업에 들어갔습니다. 하루는 아침 일찍 도전님께서 저를 부르시면서 “지금 기둥 사이를 10자 간격으로 늘릴 수 있느냐?”라고 물어보시는 것입니다. 터 주변을 재차 확인해보니 1자쯤은 여유가 있어 보여, “예. 10자로 할 수 있겠습니다.”라고 답변 드렸습니다. “그럼 10자로 작업하여라.”고 하셨어요. 기둥의 마름질이 끝나고 밖에다 말려놓고 이제 터를 잡아서 조립을 해야 되는데, 도전님께서 터를 이리 저리 둘러보시더니 여기다가 이걸 기준으로 해서 10자를 띄우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도전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그대로 했습니다. 10자만큼 먹줄을 띄운 그곳에 땅을 파보니까 예전 수리사 대웅전 주춧돌이 나오더라고요. 이상하다 싶어서 기둥이 들어가야 할 다른 구덩이도 파헤치니 또 나오는 것이에요. 모두 12개가 발견되면서, 이를 지켜보던 주지와 우리는 탄복이 절로 나왔습니다. 도전님께서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계셨던 것 같았어요. 알려주신 12군데에 오차 없이 그 자리에서 주춧돌이 발견되었으니 말입니다. 누구보다 이 광경에 탄복한 사람이 이 절의 주지였습니다. 펄펄 뛰면서 안채로 들어가 옛날 대웅전 자리(신라시대의 대웅전)를 찾았노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자리에다 그대로 대웅전을 지었습니다.

  도전님께서는 모른척하시면서 “보통 그런 거야. 뭐 그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것이지.”라는 말씀만 계셨습니다. 그러다 제가 분부하신 것에서 어긋나게 작업해 나가면 당장 뜯어 고치라고 하셨어요. 반면 지시하신 대로 해놓으면, “이쪽에 조금 틀려도 그런 거고, 저쪽에 조금 틀릴 수도 있는 거야.”라는 종잡을 수 없는 말씀을 하시곤 하셨답니다. 정말이지 30년 넘게 도전님 가까이서 받들어 모셔도 종잡지 못했어요. 어떨 때에는 평범한 말씀을 하시고, 어떤 때는 벼락같은 말씀을 하시고, 대인의 행차는 종잡을 수 없다는 것을 이때 느꼈답니다.

 

중곡도장과 여주본부도장 건물을 지을 당시 과정을 알려주십시오.


  수리사에서 49일 공부를 마치신 도전님께서는 어느날 부암동에 오셔서 전(全)노인·연천의 안(安)교감 그리고 공주의 류선감 이렇게 세 사람을 서울에 보내어 도장 터를 알아보라는 분부를 내리셨습니다. 세 사람은 서울에 명성이 자자한 곳을 다니면서 보고를 드렸지만, 도전님께서는 탐탁치 않게 생각하셨습니다. 그러다 중곡동을 가보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곳에 당도해 주변 경관을 살펴본 전(全)노인은 과연 도장이 들어서도 전혀 손색이 없어 보였습니다. 그 길로 돌아와 보고를 드렸죠. 도전님께서는 보고를 들으신 후, “맞다! 그 자리다. 그곳을 빠른 시일 내로 구입하도록 하여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곳 땅주인은 뜻밖에 젊은 남자 대학생이었습니다. 땅 거래도 어렵지 않게 계약을 하게 되었답니다. 구입 후, 중곡동 터를 닦기 시작했습니다. 1969년도의 일입니다. 이때에 도전님께서 저를 부르셔서 부산에 있던 집을 정리하라고 하셔서 서울에 정착을 하였습니다.

  이곳이 명당이라고는 하지만, 사람의 손이 가야 명당다운 명당이 되는 것입니다. 중곡동도 당시 개발이 덜된 야산이었는데, 사람의 손길이 닿자 점차 좋은 명당의 모습이 갖춰졌습니다. 처음에는 손수레 10여 대와 큰 해머 10개 등과 몇몇 안 되는 인원을 동원해서 순전히 사람의 손으로 그 터를 닦은 것입니다. 물론 중장비를 이용해서 하면 쉽게 끝날 일이지만, 그때에는 인원도 공사비도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었습니다. 더욱이 중곡도장이 자리할 산은 전체적으로 바위로 뒤덮인 곳입니다. 그러다보니 얼마 안 되는 공구들도 하나 둘씩 부러져 대장간에서 몇 번이나 수리해 터를 닦았습니다. 이렇게 밤낮으로 사람 손을 빌어 그 큰 바위들을 깨어보았지만, 완전히 깨지는 못했어요. 이를 지켜보시던 도전님께서 “그냥 터를 여기다 잡아라.”라고 하셨어요.

  한편으로는 중곡도장을 순전히 수제비 먹고 지었어요. 그 시절 쌀 구경은 쉽게 못했답니다. 돈이 턱없이 부족했어요. 지금처럼 많은 도인들이 없다보니 지방에서는 한 푼 생기면 한 푼 가져다드리고 두 푼 생기면 두 푼 갖다드리는 실정이었습니다.

  더구나 올라온 돈들은 모두 공사 물품을 구입하는 데 들어갔습니다. 그렇다고 그 돈을 갖고서 한 물품만을 구입하는 데 모두 사용해 버리면 난리가 났어요. 도전님께서는 “골고루 구입해라. 한 가지만 사서 한 가지만 하면 다른 것은 손 놓지 않겠느냐.”고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매번 돈이 들어오면, 일정한 돈에 여러 물품을 똑같이 구입해서 중곡도장을 세웠답니다. 그런 상황인데, 수제비도 감지덕지였죠. 그리고 빈 터에다 얇은 베니어판만을 서로 붙여 숙소로 사용하였습니다. 당연히 난방은 생각도 못했죠. 그렇게 터를 한창 닦을 무렵, 이른 아침 공사에 참여하는 일꾼들이 일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머물던 숙소 옆 텃밭이 인분을 쌓아 메운 곳이라는 것입니다. 식당을 맡고 있는 아주머니께서 이 텃밭에 열무를 가꾸어 밥상을 차린 것입니다. 일꾼들이야 다른 먹을 것이 없었기에 차려주는 대로 맛있게 먹었죠. 그것도 모자라 이제 겨우 숨을 내쉴 정도의 열무까지 뽑아서 먹었답니다. 아니나 다를까 다음날 아침 모든 일꾼들이 식은땀을 흘리며 일어나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도전님께서는 이 보고를 받으시고, 직접 숙소로 김내수 아주머니와 동행하여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급히 몇몇 화장실을 다니시면서 손수 구더기를 잡아 구워서 일꾼에게 먹이셨답니다. 인분에 의한 채독증은 화장실의 구더기가 좋다고 들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일꾼들은 다시 공사에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1970년도에 중곡도장을 완공하고서, 이번에는 여주로 가자고 하셨습니다. 여주본부도장의 터는 천하명당이라고 들은 것 같습니다. 도장이 들어설 산을 봉제봉이라고 하는데, 봉황을 뜻합니다. 여주본부도장 공사는 중곡도장에 비해서 인원과 물자 상황이 좀 나았습니다. 그래도 모든 도인들은 사람의 손이 미치지 못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손수 터를 닦았습니다. 또한 밖의 사회인처럼 좋은 환경은 아니었는데도, 모두들 열심히 도전님의 분부를 받들어 모셨습니다. 그러다 지금의 봉강전이 완공되면서, 제 몸이 안 좋아져 집에서 한동안 치료를 받았습니다. 시간이 지나자 기력이 회복된 것 같아서 다시 여주본부도장에 가서 도전님을 뵈었습니다.

  도전님께서는 “그래, 잘 왔어. 일 좀 해 보아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대순회관의 기초골조를 세웠습니다. 하지만 한번 나빠진 몸은 더 이상 좋아지지 않아 다시금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그 뒤로 포천도장과 대진대학교 그리고 금상산 토성수련도장 공사에 참여를 못해 지금까지도 가슴 속 깊이 죄송스러움과 아쉬움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대순회보> 8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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