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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방면 이재근 선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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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7.01.05 조회2,52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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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일 치성에 3일 도통이 크다.”라고 도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수도를 하다 보면 처음 입도할 때의 그 마음만 못한 것 같습니다. 성인(聖人)은 날이 갈수록 마음의 날이 서지만 소인(小人)은 오히려 무디어진다고 합니다. 이 말은 오래된 수도인일수록 잡념만 쌓여 도심이 약해질 수도 있다는 것을 경계한 말입니다. 도주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말씀도 하셨습니다. “내 도가 이루어질 때쯤이면 다 자기들이 진인(眞人)이라고 말할 것이다. 다 따라가고 남은 사람이 내 사람이다.”

  이번 호에는 청주방면 이재근 선감을 찾아뵈었다. 인터뷰 장소인 청주회관(서울특별시 광진구 중곡 2동 소재)에 도착하자 입구까지 나오셔서 반가이 맞이해 주셨다. 이재근 선감께서는 1934년 (음)6월 20일 생으로 1956년 (음)7월 17일 입도를 하셨으며, 1997년 (음)7월 6일에 교감 임명을, 2000년 (음)2월 2일에 선감 임명을 모셨다. 

 

  태극도 때에 입도를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입도할 당시 상황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저는 유교 집안에 태어나 어릴 때부터 한문 서당에 다녔습니다. 그러다가 6ㆍ25동란을 겪게 되었는데 이같은 난리를 피하기 위한 비법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집 근처에 있는 마곡사(충청남도 공주시 소재)에 인민군이 들어와 절을 뜯는 것을 보고 ‘불교에 도력이 없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저희 마을에 교회가 들어섰는데 그곳 목사가 하느님이 천지를 창조할 때 흙으로 인간을 빚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제가 『주역』에서 배웠던 음양의 이치와 도저히 맞지 않아 기독교도 그 해답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 후 스스로 비법을 찾아보려고 절친한 친구와 같이 여러 방법을 찾다가 육경신(六庚申)을 해보았습니다. 육경신은 1년에 간지가 경신(庚申)일이 되는 6번 동안 잠을 자지 않으면 영통(靈通)을 하는 수련법의 일종입니다. 그래서 근처 산에 올라가 굴을 판 다음 잠을 자지 않으려고 주문을 읊었습니다. 1경에서 4경까지는 했는데 5경 때에는 갑자기 굴 안의 불이 꺼져버리는 바람에 겁이 나서 하지 못했습니다. 그 이후 3년 동안 시도했지만 5경을 넘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중 대전에 사는 사촌이 태극도를 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 사촌을 미친 사람 취급을 했지만 그래도 태극도에는 어떤 진리가 있을까라는 궁금증은 있었습니다. 한번은 형이 저희 집에 왔을 때 도의 진리에 대해 물어봤더니 궁궁을을도하지(弓弓乙乙道下止)라고 하면서 궁궁을을은 태극의 모습이니 태극인 도 아래에 있어야 된다고 하면서 태극의 이치로 풀이를 했습니다. 그 설명을 듣고 결국 입도(道)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이 내용을 생질(甥姪)인 류석규, 류석구한테 이야기해보니 자기들도 같이 모시자고 했습니다.

  제가 입도를 한다고 하니 부모님께서는 반대를 하셨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사촌누님 집에서 생질 둘과 함께 입도 치성을 모시게 되었습니다. 치성을 모시는 날, 그날따라 몹시 더웠는데 모기 때문에도 고생했던 기억이 납니다.

 

  태극도에서 사업하실 때의 이야기를 잠시 해주시겠습니까?

  그 뒤 한 달쯤 지난 어느 날 조수호라는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당시 그는 태극도의 포령(지금의 선무에 해당)이었는데 저희 집에서 수임금(지금의 성금에 해당)을 모시고 갔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에는 황진규가 찾아왔습니다.

  저는 황진규에게 아예 초저녁부터 다음날 아침까지 도의 이치에 대해 꼬치꼬치 캐물었습니다. 황진규는 자기가 포덕을 해봤어도 이렇게 밤새 잠을 못 자게 하면서 끈질기게 진리에 대해 물어본 사람은 처음 봤다고 했습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뒤, “제가 어떻게 하면 도를 잘 닦을 수 있습니까?”라고 물어봤더니 포덕을 하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몇 사람을 포덕해야 하냐고 다시 물어보니 한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 이후부터 바로 포덕을 하려고 했는데 부모님께서 도 닦는 것을 반대하시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낮에는 농사일을 하고 밤에 몰래 포덕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에 저는 아버님에게 아침, 점심, 저녁 식사 때마다 입도를 하시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결국 제가 입도한 그 해 12월 4일에 아버님께서도 입도치성을 모시게 되었습니다.

  그 일이 있은 지 몇 달 뒤 1957년 2월 그믐에 온 가족이 감천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당시 감천에는 ㄱ,ㄴ,ㄷ,ㄹ,ㅁ,ㅂ,ㅅ … 등으로 방면 이름을 불렀습니다. 감천에 간 뒤에도 계속 포덕을 하여 포령 임명을 모실 호수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아직 나이도 젊고 가화가 되지 않아서 사양을 하고 대신 저의 후각인 류석규부터 임명을 모시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도 제가 포령 임명을 모실 호수가 되었지만 역시 저의 후각인 봉두현을 모시게 했습니다. 당시 저의 방면 포장(지금의 선감에 해당)이었던 김이연씨는 저를 청년포령이라고 해서 따로 임명을 내려주었습니다.

  당시 포덕을 많이 한 사람은 도주님을 뵐 수 있었는데 이를 “도주님 시안을 모신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때 뽑혀 감천도장 앞의 어느 집에 간 적이 있었습니다. 막상 가보니 저를 제외하고 전부 나이가 많은 분들이었습니다. 각 방면별로 오전에 모였었는데 다들 도주님을 뵙는다는 마음에 설레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 순서대로 인사를 올리러 들어갔는데 흰 도포에 흰 수염을 한, 풍채 좋은 사람이 베개에 비스듬히 누워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아무 영문도 모르고 그분이 도주님이신 줄만 알고 절을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오치국 포장이었습니다.

  다시 밖으로 나오라고 해서 따라 간 곳이 감천도장 안에 있는 대강전이었습니다. 1층에서 부복(伏)을 하고 있었는데 “거수.” 소리를 듣고 앞을 쳐다봤습니다. 체구가 왜소한 한 분이 나무의자에 앉아 계셨습니다. 무슨 말씀을 하셨는데 그 분의 목소리가 왕왕 울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알아듣지는 못했습니다. 나중에 저분이 누구시냐고 물어봤더니 바로 도주님이시라고 했습니다. 저는 도주님이 풍채가 좋은 분인 줄 알았는데 어찌 몸이 홀쭉하냐고 따졌습니다. 그랬더니 진인(眞人)은 서면호안용성(鼠面虎眼龍聲)이라는 비결을 들어보지 못했냐고 물어보더군요. 그래서 안다고 했더니 그 분이 도주님을 뵈올 때 쥐의 얼굴에 호랑이의 눈, 용의 소리가 아니냐고 묻더군요. 그리고 또 다른 비결에 나오는 학목구등, 즉 학의 목에 거북이의 등이라는 설명도 해주었습니다.

  그때 저는 단지 겉모습으로만 도주님을 판단한 것에 대해 사과를 하고 ‘정말 도주님이 진인이 맞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수도에 좀 더 매진하게 되신 계기가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당시 태극도가 있는 부산 감천으로 가려고 하면 한 푼도 없이 가야만 도를 받들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도에 모든 것을 매진하기 위한 조건이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임원들 몰래 돈을 들고 가서 직조공장을 차려 운영을 했었습니다. 공장에서 사용되는 실은 대부분 일제였는데 하필 그 시기가 자유당 시절 일제불매운동을 할 때였습니다. 국가에서 팔지 못하게 하니 값이 갑자기 치솟아 실을 살 수가 없었습니다. 계속 적자가 나더니 결국 사업을 접어야만 했습니다. 아버님께서 돌아가신 이후부터는 제가 5형제를 책임져야 했는데 이렇게 되니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그때 너무 힘들었던 나머지 영도다리에서 뛰어내려 죽으려고 했습니다.

  영도다리로 가려고 자갈치 시장을 지나는데 팔, 다리가 없는 사람이 땅바닥에 누워 기어오면서 돈을 달라고 하더군요. 이왕 죽는 마당에 다 주고 나니 불현듯 ‘저 사람은 저런 몸으로도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하는데 나는 몸도 성하고 도를 닦고 있는데 죽어야 하나? 이게 아닌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막상 영도다리에 서 있다 보니 다리에 적혀있는 “죽는 힘을 다해 삶을 구하고자 하면 못 살리 없다.”는 글귀가 눈에 확 들어왔습니다. 그 순간 다시 마음을 고쳐먹고 그 글귀대로 꼭 하겠노라고 다짐했습니다.

 

 지금까지 수도하시면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으리라 봅니다.

  아무래도 도주님께서 화천하실 당시인 것 같습니다. 도주님께서 1957년 동짓날부터 시학 공부를 돌리셨는데 1958년 3월 6일 도주님께서 화천하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모든 도인들이 도주님 재세 시에 도통이 난다면서 포덕을 했었는데 막상 이 일을 당하고 보니 저에게도 청천벽력과 같은 일이었습니다. 나중에는 제 앞의 도인들이 누가 도통을 주냐고 하면서 저의 집으로 몰려오기도 했습니다. 참 난감했습니다. 그래서 비결을 잘 풀던 김연무 포령한테 가서 따져보니 청실기주향무기주(靑失其柱香無其柱)라는 내용을 이야기 하더군요. 푸를 청자에 기둥을 빼니 3월이요, 향기 향자에 기둥을 빼니 6일이 되니 이날을 도주님께서 화천하신 날로 풀었습니다.

  도주님께서는 화천하시기 전에 명령공포라고 해서 모든 수도인들에게 전하신 내용이 있었습니다. “서러워마라. 서러워마라. 나 없다고 서러워 하지마라. 지기금지사월래(至氣今至四月來)가 명년(明年)인가 했더니 이제 보니 금년(今年)이다. 나는 간다. 너는 총도전(總都典)이다. 모든 일을 도전 영(令)에 의해 해 나가면 다시 만날 날이 있다. 앞에 있으니 알 것이며, 뒤에 있으니 알겠느냐. 내가 찾아야 알 것이다.”

  이 일이 있은 이후 한동안 모든 도인들이 도전님을 도주님 받들듯이 했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포장들이 도전님 험담하는 것을 제가 우연하게 듣게 되었습니다. 이후 도전님을 따르는 쪽과 배신한 쪽으로 해서 나뉘게 되었습니다.

  도전님께서는 1967년 태극도 감천도장에 있는 북문 앞에 회관을 완성하시면서 “이제 뱃머리는 돌렸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배는 만선(滿船)이 되면 뜨는 거야.”라는 말씀을 하실 때 저희들은 이제 도통이 열리나보다 생각을 했었습니다. 당시 대강전은 서쪽으로 향했는데 다 짓고 보니 도장 전체가 배의 형상이 된 것입니다. 6월 24일 치성을 모시고 도전님께서 출궁을 하신 이후에야 도전님께서 하신 말씀의 의미를 알게 되었습니다.

 

  감천에서 서울로 올라오셔서 다시 사업을 하시게 되었겠군요.

  1969년 어느 날 저녁에 도장을 짓기 위해 힘 좀 쓰는 사람 7명을 뽑는다고 해서 제가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도착한 곳이 지금의 아차산인데 밭으로 용도를 바꾸기 위해 나무를 베어야 했습니다. 나중에 추가로 30여 명이 더 올라왔었는데 그 뒤 도전님께서 납시었습니다.

  우선 양계장을 빌려 작업숙소로 만든 다음 작업에 필요한 리어카, 삽, 곡괭이를 구입했습니다. 이렇게 작업은 일체 손으로 했습니다. 그러다가 간혹 힘이 들 때 저도 모르게 “큰 고기는 다 가고 송사리만 남았다.”고 푸념을 해버렸습니다. 그때 뒤에서 도전님께서 우연히 듣고 계셨는지 저에게 “따라온 것이 큰데 너희가 송사리냐.”라고 위로의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한번은 곡괭이로 땅을 파는데 지반(地盤)이 암반이라서 도저히 쉽게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근처 주택공사(住宅公社)현장은 뻥! 뻥! 폭파를 해서 땅을 파고 있었습니다. 도전님께서는 작업하던 도인들에게 “우리도 저렇게 작업을 하는 것이 어떠냐.”라고 물어보시길래 “저희들이 정성을 들여 직접 파겠습니다.”라고 말씀을 올린 적이 있었습니다. 이에 도전님께서는 “그래. 맞아. 신명을 모시는 장소이기 때문에 폭음소리가 나면 안 돼지. 사회 사람들이 우리를 보면 쑥맥이라고 할 것이야. 그래도 정성스럽게 해야 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도전님께 계속 도장작업을 하기 위해 감천에 가서 집을 팔고 다시 서울로 올라오겠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부산 감천에 가서 다 정리하고 보니 올라갈 여비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그 후 당시 충주방면 도인인 김원호를 통해 집 한 칸을 얻게 되었습니다. 저는 도장 일을 하고 있던 터라 내자가 메리야스 공장에 다니면서 생계를 꾸려 나갔습니다. 동생들도 다 직업을 구해서 살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군복무를 하고 있던 남동생은 제대하고 나서 감천에 있던 집이 없어져버린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주위에 물어물어 한참이후에야 서울에 올라온 적이 있었습니다.

 제가 서울에 올라올 당시 답십리에는 포덕했었던 도인들이 70여 호가 있었는데 이 호수로 다시 사업을 시작해 497호가 되었습니다.

 

  큰 고비를 겪어 오시면서 임원들에게 어떠한 마음가짐을 가져야 할지에 대해 말씀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제가 태극도 때의 일을 겪으면서 분명하게 깨달았던 것은 어떠한 어려움이 나한테 다가오더라도 항상 참된 마음을 지니고 있다면 올바르게 갈 길이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을 지니기 위해서는 항상 양위 상제님의 말씀을 믿고 도의 진리에 맞춰 평상시에 수도를 해야만 합니다. 다시 한번 더 말씀드리지만, 주위 환경이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자신의 마음을 바르게 해서 의리(義理)를 세워야 합니다.

 

  현재 여주본부도장에서 수호가 돌아가고 있습니다. 어떠한 마음으로 수호를 서야 할까요?

  지금 도장이 평온해 보여도 수호는 운수가 올 때까지 서야 합니다. 저는 수호를 서면서 상호 간에 화합 단결을 이루어나가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말로 하기는 쉬워 보여도 막상 실천으로 옮기기는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서로 뭉쳐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우선 상대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누구는 입도를 먼저 했다, 누구는 임명을 먼저 모셨다라고 내세우는 것은 상대를 자기의 입장에서만 대하고 평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럴 때 수도인이지만 사람인 이상 서로 마음이 섭섭하게 됩니다. 상제님께서 말씀하신 해원상생은 각자가 마음에 맺혀 있었던 것을 서로 풀어 화합해 나가는 것입니다. 내 자신이 먼저 상대방에 대해 마음을 열고 그 사람의 입장이 되어 이해할 때 자연스럽게 서로 하나가 됩니다. 그래서 서로 마음을 열고 예로써 대한다면 화합이 안 될래야 안 될 수가 없습니다.

 

  사정위원장으로 재직하고 계십니다. 사정위원장으로서 당부 말씀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사정위원회는 방면에서 수도생활 중 시시비비로 인한 민원이 올라올 때 그 내용을 세밀히 살펴서 무마할 수 있는 일은 무마시키고, 중대한 문제는 징계위원회에 올리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일은 징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문제점을 인식해 바르게 바꾸어 나가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먼저 방면 임원이 개혁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개혁이라는 것은 도전님께서 정해주신 『대순지침』에 맞추어 자신을 뒤돌아보고 고쳐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도(道)의 맛이 쓴지 단지 사람들은 느끼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그 진리를 알고 나면 도를 닦지 말라고 해도 닦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도에 대한 진리를 알고자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합니다. 상제님의 도를 닦는 수도인들은 항상 도의 진리를 바르게 알고서 그대로 실천해 나가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대순회보》 78호, 「도인탐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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