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심과 사심의 사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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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05.02 조회5,069회 댓글0건본문
연구위원 김태윤
‘도심(道心)’이라는 단어는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다. 다른 도인으로부터 “도심 있다”고 듣게 되면 내심 흐뭇하다가도 “도심 없다”는 소리에는 왠지 모르게 불쾌하니 말이다. 도심 없다는 평가와 동시에 나는 도에 대한 믿음이 없고 사심(私心)이 있는 사람으로 인식된다. 사심이 부정적으로 각인되다 보니 그런 평가를 들으면 예민해질 수밖에 없다. 도심의 부재가 사심으로 여겨진다고 보면 두 마음이 동시에 존재할 수 없다는 느낌을 준다.
수도인이면 누구나 도심으로 충만하기를 꿈꾼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도심을 지향하고 사심을 지양할까? 현실의 나는 지금 당장 육체 보존을 위해서라도 숨 쉬고 영양분을 채워야 한다. 무의식적 차원에서 몸이 먼저 반응하다 보니 나의 욕구가 과해져 물질이라는 환경에 끌려가면 마음은 나의 몸에 갇혀버리게 된다. 물질을 좇아 숨 가쁘게 달려간 마음이 어느 순간 지칠 때, 그제야 자신의 몸에만 충실했던 마음을 엿보게 된다. 이제 시선을 나 외의 타자에게 두면서 다양한 가치를 접하고 소통하다 보면 모든 사람과 공감할 수 있는 마음을 체험한다. 아직 한쪽 발은 나의 욕구에 적을 두고 있지만 잠시나마 나를 넘고 싶은 욕구가 생겨난다. 나 자신이 더 넓고 가치 있는 마음을 본 이상 그 마음을 간직하고 싶기 때문이다.
대순진리회에서 ‘도(道)’가 상제님의 대순하신 진리라고 본다면 상제님을 믿고 천지공사(天地公事)를 받드는 마음을 도심이라고 불러도 되지 않을까 싶다. 천지공사가 개인, 조직 그리고 한 국가만의 이익을 뛰어넘어 천지를 대상으로 진행되다 보니 개체 이익과 관련된 사사(私事)가 아닌 공적 성격을 띤다. 공사(公事), 즉 공적인 일을 받든다는 것은 상제님의 도가 모든 사람을 위한 도라는 점을 인식하고 나 자신도 사리사욕이 없는 무사지공한 공적인 마음을 지녀야 함을 요구한다. 상제님의 도를 받들고자 하는 도심을 지니면서 나의 욕심을 넘어 설 수 있게 된다.
우리는 남 잘 되게 하기 위해 수도한다. 남 잘되게 하려는 마음은 어머니가 자식을 위하는 자모지정(慈母之情)과도 같아 그 상대가 온전히 잘되기를 바라는 진심을 의미한다. 상대에게 이익을 바라는 마음에서 잘되게 해주었거나 상대가 나에게 보답하지 않아 서운한 마음이 생겼다면 도심으로 포장한 사심으로 전락해 버린다. 도심은 나의 이익을 넘어 보편성을 확보하면서 상대를 진심으로 대할 때 싹튼다.
『대순지침』에는 사(私)는 인심(人心)이요 공(公)은 도심(道心)이니 도심이 지극하면 사심이 일어날 수 없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도심을 지니는 순간 자신만의 이익이 아닌 누구에게나 이로움을 제공하는 공적인 마음을 지니게 된다. 이러한 도심은 체계를 바르게 확립하게 하고 도인이 서로 믿고 변하지 않으며 단결하도록 만든다. 나만의 이익이 아닌 전체를 위하는 마음이 공유되기 때문이다.
어제의 사심도 지금 여기서 마음먹기에 따라 도심으로 바뀔 수 있다. 사심과 도심의 영역은 지금 나의 판단과 실천으로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나의 사욕을 극복하고 모두를 위한 도심을 지니고자 할 때 우리 자신은 인망에 오르고 신망에 오를 것이다. 자! 이제 사심에 둔 한쪽 발을 과감하게 들어 도심에 둔 다른 발에 모아 보자. 그제야 나는 ‘나’라는 벽을 넘어 도심이 밝게 빛나는 곳에 서 있음을 보게 될 것이다.
<대순회보 19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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