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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수를 시켜 우암을 불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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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06.21 조회5,49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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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위원 김영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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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제께서 동곡에 머무실 때 그 동리의 주막집 주인 김 사명(金士明)은 그의 아들 성옥(成玉)이 급병으로 죽은 것을 한나절이 넘도록 살리려고 무진 애를 썼으나 도저히 살 가망이 보이지 않자 아이의 어머니가 죽은 아들을 업고 동곡 약방으로 찾아왔도다. 상제께서 미리 아시고 “약방의 운이 비색하여 죽은 자를 업고 오는도다”고 말씀하시니라. 성옥의 모는 시체를 상제 앞에 눕히고 눈물을 흘리면서 살려주시기를 애원하므로 상제께서 웃으시며 죽은 아이를 무릎 위에 눕히고 배를 밀어 내리시며 허공을 향하여 “미수(眉叟)를 시켜 우암(尤菴)을 불러라”고 외치고 침을 흘려 죽은 아이의 입에 넣어 주시니 그 아이는 곧 항문으로부터 시추물을 쏟고 소리를 치며 깨어나니라. 그리고 그 아이는 미음을 받아 마시고 나서 걸어서 제 집으로 돌아가니라.(제생 1장 9절)

 

 

상제님께서 동곡에 머물고 계실 때의 일이다. 죽은 성옥의 배를 밀어 내리고, 침을 흘려 그의 입에 넣어 주시자, 성옥은 항문으로부터 시추물01을 쏟고 깨어났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상제님께서는 허공을 향하여 “미수를 시켜 우암을 불러라”고 외치셨다.

 

왜 우암 송시열(1607∼1689)의 신(神)을 부르셨을까? 우암은 이이의 학통을 계승하여 기호학파의 주류를 이루었던 주자학의 대가이다. 인조반정(1623년) 이후, 서인의 영수(領袖: 우두머리)로서 남인과의 당쟁을 이끌었던 그는 83세인 숙종 15년(1689), 희빈 장씨의 아들의 세자 책봉에 반대하는 상소문을 올리게 된다. 이로 인해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국문(鞫問)02을 받기 위해 서울로 압송되던 중, 6월 3일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생애를 마감한다. 그런데 야사에 따르면 이때 사약 한 사발로는 숨을 거두지 않아 세 사발이나 먹였으며, 그래도 여의치 않자 항문을 틀어막아 약이 새지 못하도록 하였다고 한다.03 즉 우암은 죽을 때 항문이 막힌 상태였다.

 

 

김 송환이 사후 일을 여쭈어 물으니 상제께서 가라사대 “사람에게 혼과 백이 있나니 사람이 죽으면 혼은 하늘에 올라가 신이 되어 후손들의 제사를 받다가 사대(四代)를 넘긴 후로 영도 되고 선도 되니라. 백은 땅으로 돌아가서 사대가 지나면 귀가 되니라” 하셨도다.(교법 1장 50절)

 

인간이 죽으면 혼(魂)은 하늘로 올라가서 신(神)이 되고, 백(魄)은 땅으로 돌아가 사대(四代)가 지나면 귀(鬼)가 된다. 죽기 전에는 혼과 백이 결합하여 작용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항문이 막힌 상태로 죽은 우암의 혼과 백의 기(氣)는 그것(항문의 막힘)에 상응하는 상태였다고 할 수 있다. 현상과 기는 표리(表裏)로서 함께 작용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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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로사 강당

 

죽는 순간, 혼은 그때의 기운을 그대로 갖고 하늘로 가 신(神)이 된다. 백이 전환된 귀도 그때의 기운을 갖고 땅에 존재한다. 어떤 사람이 원한을 품고 죽으면, 혼과 백은 그 감정을 갖고 천계(天界)와 지계(地界)로 가게 되는 것이다. 즉 원한이 천계(天界)와 지계(地界)를 채우게 된 것은 이러한 경로를 통해서이다. 우암의 신(神)도 항문이 막힌 상태의 기운을 그대로 갖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성옥을 살릴 때 이와 유사한 상태에 있는 우암의 신을 그 몸에 응하게 하여 항문이 막힌 상태의 기운을 풀어주신 것이다.

 

그런데 왜 우암의 신(神)을 부르는 데 미수 허목(1595∼1682)의 신(神)을 시키셨을까? 미수는 사상적으로 이황(李滉)·정구(鄭逑)의 학통을 이어받아 이익(李瀷)에게 전해줌으로써 남인의 선구이자, 남인 실학파의 기반이 된 인물이다. 그는 특히 예송논쟁(禮訟論爭)에서 우암과 첨예하게 대립하였다. 효종이 승하하자 그의 계모(인조의 계비)인 조대비(趙大妃)의 복상(服喪) 기간이 문제가 되었던 기해예송(1659)과 효종의 비 인선왕후가 죽자 다시 조대비의 복상 기간 문제가 제기된 갑인예송(1674)의 정치적 갈등이 있었는데, 그 중심에 미수와 우암이 있었던 것이다. 예송논쟁은 단순히 예법에 관한 논쟁이 아니었다. 남인의 왕권 중심과 서인의 신권 중심의 정치 지향의 차이가 근본적인 원인이었다. 상제님께서는 우암의 막힌 기운을 풀어주는 데 그와 정적(政敵) 관계였던 미수를 동참시킴으로써 둘 사이의 원한이 풀리도록 하신 것이 아닐까. 미수는 우암을 도우면서 감정이 풀리고, 우암은 도움을 받았기에 감정이 풀리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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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미수와 우암의 갈등과 대립은 곧 남인과 서인의 당쟁에 다름 아니다. 우암이 죽은 후에도 두 당파는 서로 혼인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의복도 달리할 정도로 적대감을 갖고 있었다. 곧 둘 사이의 화해는 당쟁으로 인해 쌓인 수많은 사람들의 원(冤)의 고를 푸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04

 

요컨대 상제님께서는 성옥을 살리면서 우암의 막힌 기운도 풀어주시고, 우암과 미수의 원한관계도 해소하셨다고 할 수 있다.

 

 

 

01 시추물은 막혀 있던 내장이 뚫리면서 항문에서 쏟아지는 몸속의 부패된 액체이다.

02 국문은 국청(鞠廳)에서 형장(刑杖)을 가하여 중죄인(重罪人)을 신문하던 일로서 임금의 명령이 필요하였다.

03 김동필, 『정읍의 전설』, (정읍: 정읍문화원, 2001). (김태용, 「허미수와 송우암의 해원에 관하여」, 《대순회보》 70호, p.110. 재인용.)

04 김태용, 「허미수와 송우암의 해원에 관하여」, 《대순회보》 70호, p.110.

 

 

<대순회보 19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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