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자삼우(益者三友) 손자삼우(損者三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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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7.02.03 조회5,675회 댓글0건본문
연구위원 박영수
우리는 수도생활을 하면서 수도의 목적과 자신의 인생의 목적이 일치하는지를 되돌아보아야 한다. 수도의 목적이 도통이라면 우리의 인생의 목적 또한 도통이 되어야 한다. 수도의 목적과 인생의 목적을 일치시켜 나가는 수도생활에서 “익자삼우 손자삼우”의 개념을 생각해 보고 자기 자신의 수도생활을 성찰해보는 계기로 삼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전경』 교운 1장 66절에 상제님께서 종필하신 「현무경」의 내용이 나오는데 그 첫 구절이 “益者三友(익자삼우) 損者三友(손자삼우)”로 시작한다. “익자삼우 손자삼우”는 『논어』 「계씨편」01에 나오는 글로 벗을 사귀는데 있어서 이로운 벗이 셋이고 해로운 벗이 셋인데, 정직하고 심성이 바른 벗(友直), 신용 있고 이해심이 많은 벗(友諒), 박학다문(博學多聞)하여 학식과 견문이 넓은 벗(友多聞)이 익자삼우요, 남의 비위를 잘 맞춰 아첨하는 벗(友便僻), 마음이 유약하고 줏대가 없는 벗(友善柔), 말만 잘하고 실속이 없는 이 손자삼우라 하였다.
「현무경」에 익자삼우와 손자삼우가 있는 것은 사람들이 사회생활을 하는데 있어서나 수도를 행함에 있어서, 사람 속에서 인간관계를 형성하는데서 자신의 영적 성장과 자아실현에 도움을 주는 사람이 있고 어려움을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경계하기 위함이 아닌가 한다.
익자와 손자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개념이다. 이 사람에게 익자가 되는 사람이 저 사람에게는 손자가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니 익자와 손자를 문자 그대로 파악하여 사람을 평가하고 판단하는 잣대로 사용하여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익자와 손자라는 개념을 알고 있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 사이에는 인간관계를 형성하는 지침을 알고 있는 것과 모르는 것과 같은 차이가 있는 것이니, 이 개념은 올바른 인간관계를 형성하는 데 유용한 준거가 될 것이다.
위에서 공자께서 규정한 것과 같이 이런 사람이 익자요 저런 사람은 손자라는 식의 견해는 일견 유용한 면이 있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익자와 손자에 대한 준거는 더욱 심도 있게 고려해 보아야 한다. 이런 면에서 익자와 손자를 가르는 기준은 각자 인생의 핵심 목적에 복무하는 사람인가 아닌가 하는 것으로 분별하여야 한다. 각자 인생의 핵심목적이 그 준거이다.
인생을 궁극적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여정으로 볼 때, 그 여정에서 맺어지는 인간관계에는 궁극적 인간관계가 있고 일시적 인간관계가 있다. 궁극적 인간관계는 각자의 핵심 인생목표를 달성하는 과정에 지속적으로 유지해야 하는 관계이다. 이것은 반드시 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인생 여정의 단계에 맞게 여러 사람으로 교체되기도 하지만 그 인생목표를 달성하는 과정에 이로움을 준다는 측면은 변하지 않는다.
일시적 인간관계란 핵심목표를 달성하는 과정에는 수많은 지엽적인 목표가 있을 것인데 그 단계적 목표를 달성하는 과정에 서로 도움을 주고 협력하는 관계이다. 병서에서 전술적 목표가 전략적 목표에 복무하여야 하듯이 일시적 인간관계는 궁극적 인간관계에 복무하여야 한다.
이러한 논거를 가지고 어떤 사람이 우리가 수도하는 데 도움이 되는 사람이고 어떤 사람이 수도에 어려움을 주는 사람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기준을 타인에게 적용하여 다른 수도인을 판단하고 심판하는 기준으로 삼는 것은 옳지 않다. 우리는 서로 배우고 가르치는 수도인의 입장으로 있는 만큼 우선 나 자신을 선책(善責)하고 성찰하는 규준으로 삼아야 하며, 다른 사람의 부족한 모습에도 나 자신이 바른 모습으로 모범을 보임으로써 계도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익자삼우’는 먼저 인생의 궁극적 목표가 동일한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아무리 많이 사귀어도 손해가 없다. 궁극적 목표를 달성할 때까지는 끝까지 같이 갈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은 지극한 성·경·신으로 실천 수도하는 사람이다. ‘익자삼우’는 또한 박람박식한 사람이다.
인생의 궁극적 목표가 동일한 사람이란 우리의 수도의 목적이 도통에 있는 만큼, 자신의 인생의 핵심목표를 도통의 완성에 두고 실천 수도하는 사람이다. 수도인이라면 누구나 인생의 목표를 도통에 뜻을 두고 수도생활을 하겠지만 개중에는 수도의 목적과 인생의 목표를 확고히 일치시키지 못하고 기연미연(其然未然)하면서 수도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그러므로 수도의 목적이 자신의 인생관으로 확고히 정립된 사람을 벗하는 것이 이로울 것이다.
상제님께서는 후천의 복록과 수명이 성ㆍ경ㆍ신에 달려 있으며 생사판단도 성ㆍ경ㆍ신에 달려 있다고 하셨다. 성경신은 우리가 수도하는 여정에 있어서 핵심요체이다. 그러므로 성ㆍ경ㆍ신이 없는 수도는 수도가 아니다. 인사(人事)에는 신심(信心)을 바탕으로 하고 몸으로 공경하고 마음으로 정성을 다하여 실천 수도하는 사람이야말로 우리 수도인들의 귀감이다. 이런 사람과 가까이 하는 것도 진실로 이로울 것이다.
『전경』에 가장 두려운 것이 박람박식(博覽博識)02이라 하셨다. 인간이 세상에 윤회를 반복하는 것도 많은 경험과 지혜를 쌓기 위한 것이 아니겠는가. 어떤 사람이 다문박식(多聞博識)하여 고견원려(高見遠慮)의 지혜를 가지고 있다면 이런 사람과 가까이 하는 것은 나의 인식의 지평을 확장하는 데 이로움이 있을 것이다.
그럼 ‘손자삼우’는 어떤 사람이겠는가? 우선 기연미연하면서 도에 대한 믿음이 없어 궁극적인 목표가 뚜렷하지 않은 사람이다. 다음은 도의 체계와 질서를 문란하게 하는 사람이다. ‘손자삼우’는 또한 인간으로서 도인으로서 갖추어야 하는 예의를 모르거나 예의가 없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과 길게 교류하면 관계에서 일시적인 달콤함은 있을지 모르나 수도생활에는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 더 심하면 그런 무도함에 물들어 자신도 헤어 나오지 못하는 일이 발생할 수 있다.
『대순지침』에 “수도자가 믿음이 부실하면 결과적으로 난법난도자가 된다.”는 말씀이 있다. 난법난도자가 되는 것은 결국 도에 대한 믿음이 부실한데서 온다는 말씀이다. 믿음은 기대하는바 목적에 도달토록 성지우성(誠之又誠)하고 나아가고 또 나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되므로, 믿음이 부실한 사람을 벗하면 수도의 목적을 완성하는데 이롭지 못하다.
『대순지침』에는 또한 “체계질서를 올바르게 세워나가는 것이 도를 닦는 것”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므로 도의 체계와 질서를 문란하게 하는 사람은 대순의 도를 닦는다고 볼 수 없다. 수도 없이 운수와 도통은 없는 것이니 이런 자와 벗하는 것은 역시 이롭지 못할 것이다.
예는 인간으로서 지켜야 하는 기본도리이다. 식물도 꽃이 피지 않으면 그 자리에 결실을 맺지 못하듯 사람도 예가 없으면 수도의 결실을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전경』에 “吉花開吉實(길화개길실) 凶花開凶實(흉화개흉실)03”이라 하셨다. 꽃을 보면 결실을 알 수 있듯이 사람도 그가 행하는 예의범절의 유무로 수도의 완성을 예견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인사도리에서 예의는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수도생활에 있어서도 체계질서는 예로써 지키는 것이다. 예가 아닌 것은 비례(非禮)라 하고 예가 없는 것을 무례(無禮)라 하며, 적절한 예를 갖추지 못함을 결례(缺禮)라 하고 예에서 벗어난 것을 실례(失禮)라 한다. 시속에 ‘예가 아니면 듣지도 말고 예가 아니면 보지도 말며, 예가 아니면 말하지도 말고 예가 아니면 행하지도 말라!’ 하였듯이 인사도리에 적중한 예를 지켜나가야 한다. 무례한 것은 무도리(無道理)한 것이니 예를 모르거나 예가 없는 사람과 벗하는 것은 이롭지 못하다.
수도의 목적은 도통이다. 우리는 익자삼우와 손자삼우를 분별하는 데 있어서도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규준으로 삼을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수도의 목적을 이루는 데 도움을 주는 사람인지 어려움을 주는 사람인지를 규준으로 삼아야 한다. 자기 자신이 익자삼우가 되어야 한다. 정직하고 믿음이 있고 박람박식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나뿐만이 아니라 주위의 사람들도 잘 되게 하는 상생대도(相生大道)를 실천할 수 있기 때문이다.
__주__
01 孔子曰, “益者三友, 損者三友. 友直, 友諒, 友多聞, 益矣. 友便僻, 友善柔, 損矣.” 『論語』 「季氏篇」
02 교운 2장 24절.
03 행록 5장 38절.
《대순회보》 11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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