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창과 온화함의 상징 ‘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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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성호 작성일2019.02.25 조회5,275회 댓글0건본문
연구원 김성호
매서운 바람에 옷깃을 여미는 추운 겨울. 계절은 바뀌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새해를 맞아 집집이 새 달력을 걸며 새로운 다짐과 함께 저마다의 행복을 기원한다. 2019년은 육십갑자에서 기해년(己亥年)에 해당하며, 10천간(天干) 가운데 흙[土]과 황색[黃]을 의미하는 기(己) 자와 12지지(地支)에서 돼지를 뜻하는 해(亥) 자가 만나는 황금 돼지의 해이다.
육십갑자에서 을해(乙亥)·정해(丁亥)·기해(己亥)·신해(辛亥)·계해(癸亥) 순으로 돌아오는 돼지는 십이지 띠 동물 중 가장 마지막에 배열된 동물이며, 오행으로는 물[水], 방향으로는 북서북(北西北), 시간으로는 오후 9시에서 11시, 달로는 음력 10월을 상징한다.01
돼지는 생구(生口)로 불리는 소, 인간과 오랜 세월을 함께해 온 개와 더불어 인간과 정서적으로 가장 친근한 동물로 손꼽힌다. 그래서인지 많은 사람이 돼지 하면 뚱뚱하지만 늘 웃고 있는 듯한 밝고 온화한 이미지를 떠올린다. 돼지와 관련해 사람들의 마음속에 자리한 이미지는 고스란히 돼지의 상징성에도 반영되어 어미돼지가 드러누워 여러 마리의 새끼에게 온화하게 젖을 내어주는 모습은 가정적 온화함을 상징한다. 먹성이 좋아 먹을 때는 게걸스러워도 어미가 새끼에게 젖 먹일 때만큼은 주린 배를 채워주느라 여간해서는 꼼짝하지 않는다. 그뿐만 아니라 젖을 뗀 경우라도 어미와 새끼를 분리하지 않고 한 우리에 같이 두면 어미는 새끼부터 먹이느라 잘 먹지 않을 정도이다. 온화한 모습으로 살뜰히 새끼를 돌보는 돼지의 습성은 우리에게 조건없는 내리사랑과 자모지정(慈母之情)을 상기시킨다.
어미돼지가 모성애를 상징한다면 천방지축 날뛰는 새끼돼지는 우리가 생각지 못한 습성으로 뜻밖의 상징성이 부여되기도 한다. 다산(多産)의 상징인 만큼 돼지는 한배에서 여러 마리의 새끼를 낳는데 새끼 돼지들이 처음 어미 젖을 먹을 때는 돼지의 저돌성이 발휘되지만, 한 번 자리가 정해지면 반드시 그 자리에서만 젖을 먹는다. 서열을 지켜가며 질서정연하게 젖을 먹는 새끼돼지의 습성은 어울리진 않지만 이따금 질서정연함으로 받아들여지곤 한다.
그런가 하면 우리 선조들에게 돼지는 더불어 살기 위해 선(善)을 베푸는 상생 실천의 수단이었다. 실제로 선조들은 때때로 고을에서 생계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자립(自立)을 돕기 위한 수단으로 새끼돼지 한 마리를 나누어주는 관습이 있었다.02 단, 새끼돼지를 잘 키워 어미가 된 후 새끼를 낳게 되면 그중 한 마리를 다시 어려운 빈민층에 나누어주는 조건부였지만, 이는 이웃 화합과 상부상조의 정신으로 상생을 실천하며 남을 잘되게 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중국 남북조시대의 역사서인 『후한서(後漢書)』 「주섭황헌등전서(周燮黃憲等傳序)」에 기록된 고사에서 우리는 돼지의 또 다른 상징성을 찾을 수 있다. 후한 때 동한(東漢)의 관리였던 민공(閔貢)03이 나라의 녹(祿)을 뒤로하고 안읍(安邑)에 살 때, 그는 늙고 병든 데다 가난해 값싼 돼지 간 한 조각만으로 끼니를 해결했다. 그런데 정육점 주인이 그마저도 팔지 않으려 하자 민공의 사정을 알게 된 안읍 현령이 사람을 시켜 그가 돼지 간을 매일 사 먹을 수 있도록 배려했다. 이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민공은 “내가 어찌 먹는 것 때문에 누를 끼칠 수 있겠는가”라고 자탄하며 고을을 떠났다.04 민공의 처사 때문에 중국에서 돼지 간은 때때로 공공의 일과 사사로운 일을 명확히 구분하여 치우침 없이 공평하고 공정한 공사(公私)의 상징으로 회자된다.
돼지는 인간과 오랜 기간 함께하며 양식으로 길러진 가축인 데다 특별한 능력까지 갖춘 이로움 덕에 갑골문에도 새겨졌다. 대표적인 예로는 집 가(家) 자를 들 수 있다. 집 가(家)는 집 면(宀)과 돼지 시(豕) 자로 이루어진 글자로 이는 돼지가 오래전부터 가축화되었음을 알려준다.05
그런데 사실 그 이면에 숨은 진실은 돼지의 두꺼운 지방층에 있다. 맹독을 가진 뱀도 돼지 앞에서는 아무런 효력을 발휘하지 못할뿐더러 잡식성인 돼지는 뱀을 잘 먹기도 한다. 이러한 연유로 인류가 토굴 생활을 할 때부터 옛사람들은 깊은 밤에 뱀의 공격을 피하고자 돼지를 길렀다. 지금도 따뜻하면서 습해 뱀이 많이 나타나는 중국 남방지역에서는 옛 형태의 고상식 가옥을 지어 일 층에 돼지를 키우고, 이 층을 주거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06
인간을 위험으로부터 보호하며 복(福)의 대명사로 불리는 돼지는 새해의 대표적 민속놀이인 윷놀이와도 깊은 관련성을 가진다. 정월 초하루(음력 1월 1일)에 가족들과 윷놀이할 때, 우리는 연신 ‘도개걸윷모’를 외쳐가며 즐겁게 윷가락을 던진다. 윷놀이의 ‘도개걸윷모(돼지, 개, 양, 소, 말)’는 과거 부여(夫餘)의 관직명(마가, 우가, 저가, 구가)을 상징화한 것인데, 실제로 『삼국지(三國志)』 「위서동이전(魏書東夷傳)」 부여조에는 돼지를 벼슬 명으로 한 저가(猪可)라는 표현이 기록되어 있다.07
▲ 윷놀이 / 조선시대 김홍도
그런가 하면 몇몇 나라에서는 돼지에 부여된 또 다른 의미를 되새기며 새해를 맞이한다. 독일의 경우, 독일인들은 돼지를 안녕과 행복을 부르는 동물로 여겨 새해가 밝아오면 마지팬 피그(Marzipan pig)로 불리는 돼지 모양 빵과 쿠키를 즐겨 먹는다. 이탈리아와 미국에서도 새해에 돼지고기를 즐기는데, 이탈리아인들은 발톱이 그대로 드러난 통돼지에 포도주를 곁들이며, 미국인들도 종종 돼지를 행운의 상징으로 여겨 새해에 돼지고기를 먹는다.
세계인들이 특별한 날에 돼지에 부여한 상징성은 대부분 복을 부르는 초복(招福)과 관련된다. 우리 민속에서도 그 의미는 크게 다르지 않은데, 실제로 선조들은 예로부터 돼지를 길상(吉祥)의 동물로 여겨 재산이나 복의 근원으로 믿어왔다. 돼지가 복을 비롯해 재물과 관련된 연유는 다산의 생태적 특성과 더불어 농경사회에서 돼지가 가계의 기본적인 재원(財源)이었다는 점, 그리고 돼지를 뜻하는 한자 돈(豚)과 화폐의 돈[金] 발음이 같은 데서 생겨난 속신이다.08 때때로 한국인들이 돼지꿈을 금전적 행운과 길조(吉兆)로 여겨 복권을 구매하는 것도 이러한 속설에서 비롯된 것이다. 돼지 그림에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란 한자성어가 수식어처럼 따라다니는 것과 장사하는 사람들이 정월 첫 번째 해일(亥日)인 돼지날[상해일(上亥日)]에 첫 영업을 시작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이 밖에도 돼지는 나라의 창업 기원을 다룬 건국신화에서도 신통력을 지닌 영물(靈物)로 등장한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따르면 고구려 유리왕은 나라에서 하늘에 제물로 바치기 위해 기르던 돼지인 교시(郊豕)가 달아나자, 이를 뒤쫓다가 우연히 지세와 산세가 수려한 국내성을 발견하여 후에 수도를 이곳으로 옮기게 되었다고 한다.09 중국 후한의 사상가 왕충이 집필한 『논형(論衡)』에도 고구려 건국과 유사한 기록이 전해진다. 이에 따르면 부여를 건국한 동명왕은 왕의 시녀에게서 태어나 돼지우리에 버려졌지만, 돼지가 입김을 불어 넣어 죽지 않았다고 한다.10 장차 왕이 될 인물을 죽음으로부터 살려내고 나라의 수도까지 점지해 준 덕에 돼지는 신화 속에서 영물로 묘사되고 있다.
2019년 기해년(己亥年). 『설문해자(說文解字)』에 따르면 기해년을 상징하는 십간(十干)의 기(己)는 가운데를 뜻하며 만물이 돌아들어 모이는 형국을 상징한다.11 돼지를 뜻하는 해(亥) 또한 『한서(漢書)』 「율력지(律曆志)」에서는 “해(亥)에서 다 갖추어 갈무리 된다”고 표현하였고, 『석명(釋名)』 「석천(釋天)」에서는 “해(亥)는 핵(核)으로써 만물이 모두 견고한 씨앗을 이룬다”고 풀이하였다.12 이를테면 만물이 이뤄져 모두 견실해진다는 것이다.13
올해는 종단(宗團) 역사에서도 의미 있는 해이다. 2019년은 상제님께서 천지공사를 마치시고 화천(1909년 6월 24일)하신 지 110주년이 되는 해이자 도전님께서 상제님의 대순하신 유지(遺志)와 도주님의 유법(遺法)을 숭신하여 대순진리회를 창설(1969년 4월)하신 지 50주년이 되는 해이다. 돼지의 상징성에 남을 잘되게 하여 더불어 사는 상생심(相生心)을 비롯해 공명정대함 및 자모지정 등이 있는데, 이러한 상징성은 우리가 수도과정에서 추구하는 실천윤리와 무관하지 않다. 아울러 올해는 만물이 돌아들어 모이고 견고한 씨앗을 이루어 만사가 견실해지는 기해년인 만큼 모든 수도인은 각자의 마음에 심은 수도의 씨앗이 도통이라는 큰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한마음과 흔들리지 않는 정심(正心)으로 수도에 매진해야 할 것이다.
<대순회보 215호>
01 천진기, 『한국동물민속론』 (서울: 민속원, 2003), p.411 참고.
02 이규태, 『아리랑의 韓國學』 (서울: 기린원, 1992), p.45 참고.
03 「민공」, 네이버 지식백과: 산서(山西) 태원(太原) 사람으로 자는 중숙(仲叔)이다. 동한(東漢)의 관리이다. 집안이 가난했지만, 지조를 잘 지켰고, 성격이 조용하고 깨끗하여 공이 없는 녹을 받지 않았다. 그래서 절사(節士)로 불렸다.
04 허균, 『십이지의 문화사』 (경기도: 돌베개, 2010), p.74 참고.
05 정연학, 「중국의 돼지문화」, 『중앙민속학』 28 (2004), p.29 참고: 갑골문의 가(家)와 환(圂) 등은 돼지가 가축화되었음을 알려주는 글자이다.
06 같은 글, pp.29-34 참고; 「정해신장 돼지」, 문화콘텐츠닷컴; 「돼지 부작」, 문화콘텐츠닷컴.
07 김종대, 「돼지를 둘러싼 민속상징, 긍정과 부정의 모습」, 『중앙민속학』 13 (2008), pp.65-66 참고; 천진기, 앞의 책, p.417 참고; 「윷놀이」, 네이버 지식백과 참고.
08 같은 책, p.424 참고.
09 같은 책, pp.417-418 참고.
10 「우리 역사 속 돼지」, 네이버 지식백과 참고,
11 김만태, 「민속신앙을 읽는 부호, 십간(十干)ㆍ십이지(十二支)에 대한 근원적 고찰」, 『민족문화연구』 54 (2011), p.283.
12 허균, 앞의 책, pp.28-29 참고.
13 같은 글, p.2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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