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에서 나오는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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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12.01 조회5,412회 댓글0건본문
연구원 강대성
종도들의 음양 도수를 끝내신 상제께서 이번에는 후천 五만 년 첫 공사를 행하시려고 어느 날 박 공우에게 “깊이 생각하여 중대한 것을 들어 말하라” 하시니라. 공우가 지식이 없다고 사양하다가 문득 생각이 떠올라 아뢰기를 “선천에는 청춘과부가 수절한다 하여 공방에서 쓸쓸히 늙어 일생을 헛되게 보내는 것이 불가하오니 후천에서는 이 폐단을 고쳐 젊은 과부는 젊은 홀아비를, 늙은 과부는 늙은 홀아비를 각각 가려서 친족과 친구들을 청하고 공식으로 예를 갖추어 개가케 하는 것이 옳을 줄로 아나이다”고 여쭈니 상제께서 “네가 아니면 이 공사를 처결하지 못할 것이므로 너에게 맡겼더니 잘 처결하였노라”고 이르시고 “이 결정의 공사가 五만 년을 가리라”고 말씀하셨도다. (공사 2장 17절)
우리가 흔히 생각을 표현할 때 ‘생각이 들다’ 혹은 ‘생각이 난다’라고 한다. 실생활에서 일반적으로 어떤 외부 환경에 의해서 어떤 느낌이 들 때 ‘생각이 들다’라고 하는 반면에 자기 내부로부터 생각이 나올 때는 ‘생각이 난다’라고 표현한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생각’을 사람이 머리를 써서 사물을 헤아리고 판단하는 작용의 의미로 제시하고 있다. 말하자면 생각은 이성적 판단 작용 때문에 나오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공사 2장 17절에 “공우가 지식이 없다고 사양하다가 문득 생각이 떠올라…”라고 표현되어 있다. 이성적 혹은 논리적 사유에 의해 표현된 것이 아닌 부지불식간에 떠오른 생각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공우는 지식이 없다고 사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을 ‘생각’의 사전적 의미에 대입하여 보면 공우는 머리를 써서 사물을 헤아리고 판단하여 자기 생각을 말한 것이 된다. 지식이 없어 사양하던 사람이 갑자기 머리를 써서 사물을 헤아리고 판단했다고 보기에는 어딘지 앞뒤가 맞지 않는다. 공우의 생각은 ‘문득 떠올라’라고 하였듯이 이성적, 논리적 판단이 아닌 다른 무엇인가로부터 어떤 정보를 받은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머리가 아닌 그 무엇인가의 작용을 받은 것으로 유추해 볼 수 있다.
『전경』에 “생각에서 생각이 나오나니라.”(교법 2장 53절)에서 보듯이 상제님께서는 생각이 나온다라고 하셨다. 들어온다가 아닌 나온다, 즉 나는 생각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나오는 그 생각은 어디서 나왔냐는 것이다. 다음의 『전경』 성구를 참조해 보면 “악장제거 무비초 호취간래 총시화(惡將除去無非草 好取看來總是花)라. 말은 마음의 외침이고 행실은 마음의 자취로다.”(교법 1장 11절)라고 하셨다. 말이란 생각의 표현이다. 보통 우리의 생각은 말이나 글, 그리고 행동으로 표현된다. 말이 마음의 외침이라는 것은 마음이 던져주는 어떤 생각을 이어받아 그것을 말이란 수단으로 표현했다고 할 수 있다. 즉, 말을 하게끔 원인 제공을 한 생각은 바로 마음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다. 『대순진리회요람』에 “마음은 일신(一身)을 주관(主管)하며 전체(全體)를 통솔(統率) 이용(理用)하나니, 그러므로 일신(一身)을 생각하고 염려(念慮)하고 움직이고 가만히 있게 하는 것은 오직 마음에 있는 바라”01라고 되어 있다. 모든 것이 마음에 있다면 있고 없다면 없는 것이므로 모두 마음에 달려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진다.
결론적으로 생각도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대순진리회요람』에 마음에는 양심(良心)과 사심(私心) 두 가지가 있다고 제시되어 있다.02 양심과 사심의 두 가지가 혼재되어 있어서 사람의 마음은 통일되어 있지 않은 상태이다. 본래 인성(人性)의 본질은 양심이라고 하였다. 양심에서 나오는 생각과 사심에서 나오는 생각은 엄연히 다를 수밖에 없다. 각각에서 나온 생각이 표현되는 양상도 사뭇 다르다. 사심에 의해 나온 생각은 도리에 어긋나는 말과 행동으로 표현되기 때문이다.
「포유문」에 나의 “심령을 구하여”라는 표현과 『대순진리회요람』에 “심령을 통일하여”라는 표현이 나온다.03 여기서 통일된 심령의 상태는 사심에 의해 가려진 마음 안의 영(靈)이 온전히 드러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우리가 구하고자 하는 통일된 심령이자 진실하고 순결한 본연의 양심자리가 되는 것이다. 우리말에 영감(靈感)이란 용어가 있다. ‘영감을 받았다’, ‘영감이 쏟아져 나온다.’라고 표현한다. 영감의 사전적 의미는 “신령스러운 예감이나 느낌”, “창조적인 일의 계기가 되는 기발한 착상이나 자극”이다. 영은 무형무적(無形無跡)하고, 무성무취(無聲無臭)하지만 그렇다고 그 존재를 부인할 수 없다. 상제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일을 있는 말로 만들면 아무리 천지가 부수려고 할지라도 부수지 못할 것이고 없는 말로 꾸미면 부서질 때 여지가 없나니라.”(교운 1장 36절)는 성구를 보아도 알 수 있다. 영감은 하나의 생각인데 그 생각은 마음에서 나오며 그 마음의 작용은 바로 마음 안에 있는 영이 전하는 메시지를 감지하여 생각한 것이라고 유추해 볼 수 있다. 생각에서 생각이 나온다고 하였을 경우 ‘생각에서’의 생각은 온전히 통일된 본연의 양심 자리인 심령의 생각이란 의미로도 볼 수 있다.
따라서 영감은 외부에서 들어오는 어떤 정보를 우리의 감각기관이 받아들여 이성적 사고를 통해 판단하는 생각이 아니라 내부에서 나오는 생각, 즉 ‘나는 생각’이라 할 수 있다.
앞서 공사 2장 17절에 공우도 문득 한 생각이 떠오른 것을 가지고 상제님께 말씀드렸다. 상제님께서 그의 의견을 따라 공사를 보셨고 잘한 일이라고 하셨다. 이때 공우의 생각이 사심에서 나왔다면 상제님께서 공사를 잘 처결하였다고 칭찬하실 리 만무하다. 왜 우리 대순진리에서는 양심을 얘기하고 무자기(無自欺)를 말하며 심령을 구하라고 하는지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생각이 인생의 가치관과 무관하다고 보지 않기 때문이다.
현대사회는 외부의 끊임없는 정보에 자극을 받으며 살고 있다. 정보의 증대가 지식의 발달로 이어지고 그것이 우리 생활을 행복하고 편안하게 해준다는 신념을 지니고 있다. 과연 그러한지 생각해 보면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무수한 정보의 홍수로 인해 혼란스러운 나머지 가치관의 부재 속에 살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인간의 삶에서 무엇이 중요한가를 잘 모른 채 기본적으로 지켜야 할 인간의 도리가 무너져 가고 있다. 물질은 풍부하지만 정신적으로 빈곤함을 느끼는 이 시대에 무엇보다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물음에 대답해줄 수 있는 새로운 가치관이 나왔으니 그것이 바로 ‘대순진리’이다. “도주님께서 포유하신 인도에 따르라”04는 도전님의 말씀은 현시대에 올바른 가치관을 정립하는 길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위에 열거된 현시대의 문제점들은 공통적으로 양심의 부재에서 기인한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외부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내면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그 답은 바로 도주님께서 「포유문」에서 말씀하신 심령을 구하는 것이다. 도주님의 포유하신 인도에 따라서 나의 심기(心氣)를 바르게 하고, 나의 의리(義理)를 세우며, 나의 심령(心靈)을 구하여 상제님의 임의(任意)에 맡기는 것이다.
<대순회보> 18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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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대순진리회요람』, p.16.
02 『대순진리회요람』, pp.18~19 참조.
03 상동.
04 『대순지침』, pp.90~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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