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修道)와 ‘나만 모르는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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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11.28 조회5,760회 댓글0건본문
연구원 이호열
“일상 자신을 반성하여 과부족이 없는가를 살펴 고쳐 나갈 것”01
“수도(修道)라고 하는 것은 잘 지켜 나가면서 늘 반성하는 것이며, 잘못된 것이 있다면 이래서는 안 되겠다 해서 고쳐 나가는 것입니다.”02
깨진 바가지는 물이 새기 마련
인생을 살다 보면 많은 노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일을 이루지 못하거나 예상치 못한 방해를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극복해야 할 보이지 않는 겁액에 휩싸여 있기 때문입니다. 도전님께서는 “모든 일에 그 목적을 달성하려는 과정에는 반드시 장애가 있으니 이것을 겁액이라 하며, 겁액을 극복하고 나아가는 데 성공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03라고 하셨습니다.
겁액은 인과응보에 따른 업보 때문에 나타날 수도 있고, 전생의 원한이나 척 때문에 발생할 수도 있으며, 자신의 나쁜 습관이나 마음 씀의 문제 때문에 생겨날 수도 있습니다. 이 중에서 인과응보로 인한 업보나 전생의 원한 때문에 발생한 겁액은 상생의 마음으로 공덕을 쌓아 가면서 극복해 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나쁜 습관이나 마음 씀의 문제로 인해 생기는 문제는 나 자신의 내면적인 모습을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는다면 늘 업이나 척을 짓게 되므로 겁액에 휩싸인 상태를 쉽게 벗어나기 어렵게 될 것입니다.
똑같은 물을 마시고서 뱀은 독을 만들고, 소는 우유를 만드는 차이가 뭘까요? 뱀과 소의 성품이 달라 똑같은 천지의 기운을 받더라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그 결과물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사람도 마음 씀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주변 사람에게 덕을 미치느냐 해악을 끼치느냐가 달라지게 됩니다. 때로 우리는 나의 말과 행동의 결과가 상대방에게 불쾌감이나 상처를 주는데도 그것을 인지 못하고 지속적으로 척 짓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합니다. 이때 자신의 행동을 바로 보지 못하는 문제는 해원상생을 실천하고 수도함에 있어 중대한 장애요소가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고쳐지지 않는 자신의 습성 때문에 지속적으로 척 짓는 행위를 반복하게 되니까요.
또한, 자신의 성품을 바르게 고쳐 나가지 않는다면 큰 공덕을 쌓거나 복을 짓더라도 그 공덕이나 복록은 쉽게 소모되고 말 것입니다. 반대로 수도를 하면서 내면적인 성품을 바르게 닦아 나간다면 작은 공덕과 복록이라도 꾸준히 쌓여 궁극적 으로 큰 성공에 이르게 될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이처럼 ‘나의 나쁜 습성을 바르게 고쳐 나가는 것’이야말로 수도의 기본기를 튼튼히 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다.
자기를 반성하여 보지 않고 불만과 불평을 감정화하여 고집한다면 스스로 상극(相克)을 조장하는 것이다.04
위의 훈시 말씀 또한 불만, 불평을 하기 이전에 자신에 대한 반성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의미로 이해됩니다. 따라서 자신의 내면을 깊게 들여다보아야 하는데, 나쁜 태도가 바뀌지 않는다면 깨진 바가지에서 늘상 물이 새듯이 어디서나 척 짓는 행위를 자신도 모르게 저지르게 되어 척을 풀어야 하는 우리의 수도에서 ‘밑빠진 독에 물붓기’와 같은 모습을 벗어나기 힘들게 될 것입니다.
대개 그러한 습성은 내가 모르는 나의 단점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관점에서만 나를 돌이켜 본다면 아무리 반성을 해도 그 허물을 쉽게 발견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는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남들은 다 아는데 ‘나만 모르는 나’
심리학에서는 ‘네 가지의 나’가 있다고 말합니다. 미국의 심리학자인 조셉 루프트(Joseph Luft:1916-2014)와 해링턴 잉햄(Harrington Ingham:1914-1995)이 서로의 이름을 합친 "조하리의 창(Johari window)"05이라는 프레임을 만들었는데, 이는 나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내가 어떤 상태에 처해 있는지를 보여주고 인간관계 개선을 도와주는 유용한 도구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이를 응용하여 자신이라는 존재에 ‘네 가지의 자신’의 모습이 있다고 해석하기도 하는데,
위의 네 가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갈등의 상당부분이 나만 모르는 나의 영역(blind area)과 남이 모르는 나의 영역(hidden area) 때문이라 전제하며, 인간관계의 개선을 위해 자신을 타인에게 노출시키고 또 ‘나만 모르는 나’를 타인에 의해 알아가는 것, 그래서 공감과 이해의 폭을 넓혀가고자 하는 것이 이 ‘조하리의 창’의 활용방향입니다.
이 이론을 수도적인 측면에서 응용해 보자면 가장 주목해야 할 영역은 블라인드(blind) 영역인 ‘남들은 아는데 나만 모르는 나’의 영역입니다. 일반적으로 가정에서 아이들에게 자상하게 대화를 많이 하려고 시도하는 아빠의 모습이 정작 아이들에는 시시콜콜 간섭하고 따지는 모습으로 인식되기도 합니다. 종단이나 방면의 일을 하는 데 있어서도 남들이 다 아는 기본적인 정보가 부족한데도 자기 생각만 옳다고 믿고 지나치게 강한 주장을 하여 화합을 해치는 경우가 있고, 거친 말투로 주변 사람에게 불쾌감을 주어 위화감을 조성하고 수도인으로서의 품위를 떨어뜨리는데 정작 당사자는 그 사실에 문제의식을 가지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다가 타인과의 갈등 속에서 새로운 자신을 발견하면서 ‘나에게 이런 특징이 있다는데 정작 나는 모르고 있었구나. 다른 사람은 나를 이렇게 이해하고 있었구나.’라고 깨달아 이를 계기로 자신의 모습을 다시 보게 되고 앞으로 어떤 노력을 해야 할지 알게 됩니다.
깨진 바가지의 틈을 정밀하게 메우는 것이 개전(改悛)06의 수도라면 이는 나 자신의 모습을 바로 보는 데서 출발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수도를 통해 자성(自性)의 완성을 이루려면 내가 아는 나는 물론 내가 알지 못하는 나의 모습까지 바로 보아 고쳐 나가야 할 것입니다.
연운 체계, 나를 비추는 거울
우리 도에서 선각과 후각이라는 연운 체계가 바로 나의 모습을 제대로 고쳐 나가기 위한 구조로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요? 연운 체계 안의 선후각의 존재는 ‘나만 모르는 나’를 비추는 거울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도 위아래 음양으로 비추어 주니 얼마나 고마운 존재인가요.
선각께서 하시는 나에 대한 꾸중이야말로 ‘남들은 다 아는데 나만 모르는 나’에 대한 것일 수 있으며, 때로 후각들이 잘 통솔되지 않는 이유가 ‘내가 모르는 나’ 때문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보이지 않던 단점이 수도의 연운체계 속에서 발견되기도 하는데 선각과 나와의 관계에서 생기는 갈등이 그와 유사하게 후각과의 관계 속에서 발생하여 그때 내가 선각에게 잘못하고 있는 어떤 것들을 깨달아 알게 되기도 합니다. 따라서 선각과 후각이라는 거울에 비추어진 내 모습을 잘 관찰하여 나의 단점을 개선하고 상하의 관계를 부드럽게 화합으로 이끌어 가는 것이 수도의 중요한 측면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이해와 노력이 선행되어야 선후각 등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상황과 갈등 들을 내가 모르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 수도력으로 화(化)하는 계기로 이끌 수 있을 것입니다.
포덕사업에는 중찰인사가 내재되어 있어 흔히 우리는 이를 수도사업이라 말하기도 합니다. 연운 체계에 있어 후각들의 마음상태를 들여다보고 잘못된 점을 개선하도록 도와주는 것이 선각의 자세인 것이지 후각들의 마음자세나 내면적인 수도는 뒷전이고 그저 표면적인 사업성과에만 관심을 둔다면 그것이 과연 수도사업의 본질에 가까울까요?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바람직하지는 않습니다. 포덕사업은 내면적인 수도와 외형적인 사업이 함께 가야 할 두 바퀴의 수레와도 같습니다.
결국 수도란 자신의 과부족을 덜고 채워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으며, 이를 잘 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모습을 바로 보는 것이 전제되어야 할 것입니다. 자신의 모습 중 ‘나만 모르는 나의 모습’은 연운 체계를 통해 비추어지게 되므로 연운의 수도체계 속에서 자신을 잘 가다듬어 가다 보면 보이지 않던 삐뚤어진 성품을 고치고 바꿀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수도인으로서 자신만 모르는 단점을 계속 가지고 간다는 것은 참 슬픈 일입니다. 깨진 바가지에서는 늘 물이 새기 마련이니까요.
<대순회보> 18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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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대순진리회요람』, p.21.
02 도전님 훈시(1991. 10. 30)
03 『대순지침』, p.93.
04 『대순지침』, p.92.
05 위키피디아 참조
06 행실이나 태도의 잘못을 뉘우치고 마음을 바르게 고쳐먹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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