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식은 사람의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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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11.28 조회5,313회 댓글0건본문
연구원 이공균
도장을 나서는 길, 스쳐 지나가는 길목 곳곳에는 영산홍이 화사하게 피어있고 멀지 않은 논밭에는 푸른 새싹들이 돋아난다. 겨울 사이 심심했던 풍경이 초록색으로 화사하게 새 단장을 할 즈음, 보이지 않는 곳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이 있다. 모내기를 준비하는 사람들. 도장에서도 볍씨를 뿌리고 모종을 확보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인다. 그렇게 모내기는 신록(新綠)의 풍경을 아름답게 물들여 간다.
식물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에서 사람들에게 많은 것을 베풀어 준다.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꽃은 벌에게 꿀을 제공하고 나무는 공기를 정화하고 열매를 맺으며 썩어서는 땅을 기름지게 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인간이 많은 것을 소비할 때 식물은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러나 나무가 있던 자리에 아스팔트가 깔리고 매연을 내뿜는 자동차가 달린다. 공장이 들어서고 빌딩이 높게 세워지면서 꽃과 나무가 설 자리가 점점 없어져 간다. 인간의 편리성이 높아지는 반면, 식물의 은혜로움에는 점점 소홀해지고 있는 것처럼 세상의 흐름은 자연과 멀어지고 인간의 개인적인 삶과 순간의 이익에 따라 흘러간다. 사람들은 상생(相生)의 도리(道理)를 외치지만 세상은 아직 그렇지 못한 게 현실이다.
우리는 해결하기 힘든 문제에 직면했을 때, 간혹 그 해답을 고전에서 찾아보곤 한다. 《대순회보》 152호에 실린 「고수레에서 상생을 생각하다」의 내용과 같이 고수레에서 나타나는 상생의 의미가 대순사상에서 나타나는 천·지·인 삼계(三界)의 원한을 풀어 모두 잘 살 수 있다고 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을 갖는다는 내용과 같이 말이다. 고수레가 인간의 관점에서 상생을 배우고 실천하는 내용이라면 이 글에서는 논의 환경을 예를 들어 자연과 인간의 상호관계 속에서 ‘이해’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을 알아보려 한다.
4월이 되면 농촌에서는 논에 물을 대고 볍씨를 뿌린다. 모의 잎이 5~7장으로 자라는 5월이면 모내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논의 흙을 갈아엎고 물을 댄 뒤 써레질01을 하고 모를 옮겨 심는다. 이때 논에는 물뱀, 올챙이, 벼메뚜기, 거미, 벼멸구, 물방개, 논우렁이, 미꾸라지, 피 등 수많은 생물이 자리 잡고 살아가게 된다. 또한, 이들을 먹기 위해 백로, 까치, 제비, 뜸부기 등의 조류들이 모여 자연스럽게 새로운 생태계를 만든다. 말 그대로 논 위에서 자연이 자연스럽게 형성되어 가는 것이다. 이러한 자연환경은 벼에 해로운 것들을 막아줌으로써 생태계를 파괴하며 인간에게도 해로운 농약 같은 처방을 할 필요가 없게 한다. 그뿐만 아니라 논이 빗물을 가두는 구실을 해 홍수의 피해가 완화되고 빗물이 지하로 스며들어 지하수를 저장하며, 벼가 광합성을 일으키고 산소를 증가시켜 공기를 맑게 해줌으로써 인간에게도 적지 않은 혜택을 안겨준다. 논이 자연을 품고 인간에게 그 혜택을 베푸는 것이다. 이는 서로 잘 어울려 모순됨이나 어긋남이 없다는 뜻의 ‘조화(調和)롭다’라는 말이 부합하는 현상이며,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배워야 할 자연에 대한 이해이다.
옛말에 “곡식은 사람의 발소리를 들으며 자란다”는 말이 있다. 작물을 걱정하고 돌보는 사람의 마음을 식물도 알고 있다는 뜻일 것이다. 논의 일도 사람이 나서야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결코 사람의 일방적인 행사로 이루어질 수는 없다는 의미로 다가오는 말이다. 논은 인간에게 곡식이라는 결실을 보게 해준다. 결국, 인간의 이익을 위해서 하는 일이지만 논이 품은 자연에 대한 이해와 인위적이지 않은 상호관계 속에서 더 큰 혜택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논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인간이 식물을, 더 나아가 자연을 이해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해는 욕심 없이 대상의 모든 것을 포용하는 오롯한 마음가짐인데 필자는 이것이 곧 ‘상생(相生)’의 첫걸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1981년, 도전님께서 임원 모내기 행사를 직접 지시하신 이유가 이러한 교훈의 가르침을 담고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보며 부족한 글을 마무리한다.
<대순회보> 182호
참고문헌
김준호, 『논의 동식물』, 웅진,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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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써레로 논바닥을 평평하게 고르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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