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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을 셋이라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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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11.26 조회5,37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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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위원 박병만 

 

  언어는 의사소통을 위한 인간의 위대한 창작물이다. 그렇지만 언어생활 속에서 그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하기 어려워 곤혹스럽거나 잘못 이해하여 어려움에 처하기도 한다. 누구나 가끔 이러한 일을 경험하였을 것이다. 사람 사이의 직접적인 대화에서 생긴 경우는 다시 그 의미를 물어보면 쉽게 해결될 수 있는 노릇이지만, 책이나 문서 상에서 비롯된 문제는 상당히 난감하다. 특히 수백 년 아니 수천 년의 세월을 사이에 두고 이 시대의 우리가 만나는 고전(古典)이나 경전(經典)은 더더욱 그렇다.01 나 자신도 오랫동안 수도생활을 하고 있지만, 상제님·도주님·도전님의 말씀 중에서 여전히 ‘그 의미가 이렇구나!’ 하고 단정하지 못하는 구절들이 있다.
  그중 하나가 『대순진리회요람』의 ‘신(信)’에 대한 설명인 다음의 구절이다.

  

   … 하나를 둘이라 않고 셋을 셋이라 않고 저것을 이것이라 않고 앞을 뒤라 안하며 … 

 

물론 그 의미를 잘 깨달아 수도생활에서 실천하고 있는 훌륭한 도인들도 많이 있겠지만, 이 문장 해석의 난해함에 대해선 대부분의 도인이 공감할 것이다. ‘하나를 둘이라 하지 않고’와 ‘저것을 이것이라 않고’, 그리고 ‘앞을 뒤라 안하며’의 의미는 쉽게 이해가 된다. 하나는 하나이고 둘은 둘이며, 저것이 이것일 수 없고, 앞은 앞이지 뒤가 될 수 없으니까! 그런데 ‘셋을 셋이라 않는다’는 도대체 무슨 의미란 말인가? 여러 가지로 참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말씀이다.
  이러한 문장과 같은 명제(命題)를 논리학에서는 ‘역설(逆說: Paradox)’이라고 한다. 논리학자들 사이에 통용되는 대표적인 역설이 ‘에피메니데스(Epimenides)의 역설’이다. 에피메니데스02가 “크레타(Creta) 섬의 사람들은 모두 거짓말쟁이다.”라고 말한 데서 유래한다. 크레타는 그리스(Greece) 남동쪽 지중해에 있는 큰 섬으로 해상무역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주민 대부분이 장사꾼들이었다. 당시 이들이 상거래 시에 이익에 집착하여 진실과 동떨어진 말을 많이 했기 때문에 이것을 좀 과장해서 이렇게 말했던 것 같다. 그런데 문제는 에피메니데스 본인도 정작 크레타 섬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만약 이 말이 참이라면 자신도 크레타 섬 사람이므로 역시 거짓말쟁이가 된다. 거짓말쟁이 에피메니데스가 한 말 또한 거짓말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이 말은 거짓이 된다. 에피메니데스 스스로 모순에 빠진 셈이다.
  이외에도 여러 형태의 역설이 있지만, 일상에서 우리가 쉽게 접하는 예를 들어보면 쉽게 이해가 갈 것이다. 담벼락에 써놓은 “낙서금지”의 경우, 자신이 쓴 ‘낙서금지’라는 문구는 낙서가 아닌가? 이것을 자가당착(自家撞着)이라고 한다. 또 아이들이 교실에서 떠들고 있을 때 누군가가 “떠들지 마!”라고 소리쳤다. 그럼 자기는 떠든 게 아닌가? 흔히 불교에서 쓰는 말로 “불립문자(不立文字)”라는 어휘가 있다. 깨달음은 문자로써 세울(표현할) 수 없다는 의미의 말인데, 이것 역시 ‘불립문자’라는 어휘 자체가 이미 문자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이러한 역설들은 모두 자가당착에 빠지게 된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서 살펴보면, ‘셋을 셋이라 않고’는 스스로가 스스로를 부정하는 말이 되어 모순에 빠진다. ‘셋’을 셋이라고 먼저 규정하고 다시 그 셋이 ‘셋이 아니다.’라고 전제가 되는 규정을 부정하고 있기 때문에 형식적으로 자기모순을 초래하고 있다. 따라서 자가당착에 빠져 역설이 된다. 그렇다면 이 ‘셋을 셋이라 않고’라는 구절의 말씀은 논리적 모순이 있기 때문에 아무런 의미나 가치가 없는 문장일까?
  우리는 앞서 예로 든 ‘낙서금지’, ‘떠들지 마!’, ‘불립문자’ 등의 언어를 일상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형식이나 내용에 모순이 있지만, 이 모순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전하고자 하는 의도를 언어로써 표현할 때 이것은 역설이 된다. 이러한 역설적 언사(言辭)들을 아무 문제없이 사용하며 서로 소통하고 있다. 이것은 인간의 언어생활이 형식이나 논리적으로 잘 갖추어진 채로 항상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언어는 그 말한 사람이 자신의 말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의미의 전달에 일차적인 목표가 있다.
  언어에 대한 올바른 해석과 관련한 맹자(孟子)의 유명한 말이 있다.

  

  시를 해설하는 사람은 ‘글자 하나하나’(文)에 구애되어 ‘문장 전체의 의미’(辭)를 해쳐서는 안 되고,  문장 전체의 의미를 파악했다고 해서 그 문장을 통해 표현하고자 하는 ‘작가의 뜻’(志)을 해쳐서도 아니 된다. (해설하는 사람이) ‘절실한 의도’(意)를 가지고 작가의 뜻을 헤아려 하나로 맞추고자 하면 비로소 그 시의 (온전한) 해설이 이루어진다.03

  

  맹자는 비록 시(詩)의 올바른 해설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모든 언어의 이해에 해당하는 이야기일 것이다. 맹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글자 한 자 한 자보다 문장 전체의 의미가 중요하고, 그 의미보다 작가의 뜻(또는 의도)이 더욱 중요한 요소라는 것이다. 이러한 맹자의 말대로라면 ‘신(信)’의 참다운 의미를 우리 도인에게 간곡하게 전하고자 하신 ‘도전님의 뜻’에서 그 해답을 찾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셋을 셋이라 않고’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수년 전에 『논어』를 읽다가 이 구절과 관련하여 마음에 와 닿는 내용이 있었다. 여러 학자의 해석(주석)을 참고하며 나름대로 그 의미를 깊이 생각했던 부분이었다. 인간의 정직성과 관련한 것인데, ‘셋을 셋이라 않고’의 의미와 상당한 연관성이 있어 보였다.

 

  섭공이 공자에게 말했다. “우리 당(黨)에 아주 곧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아버지가 양(羊)을 훔치자, 아들이 이것을 증언하였습니다.”

  

  이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우리 당의 곧은 자는 이와 다릅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 숨겨주고, 아들은 아버지를 위해 숨겨주니, 곧음은 이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04

  

  섭공(葉公)은 당시 초(楚)나라 ‘섭(葉)’이라는 현(縣)을 다스리던 현장(縣長)이며, ‘당(黨)’은 주(周)나라 때 행정 구역의 하나로 500여 가구가 사는 마을을 일컫는다. 섭공이 다스리던 지역에 무슨 이유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양을 훔친 사람이 있었다. 이러한 사실을 그의 아들이 증언해서 아버지가 구속되었다는 내용이다. 이처럼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 비록 자신의 아버지라 할지라도 사실 그대로 말하는 것이 정직함이라고 섭공은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공자는 아버지나 아들이 처벌받을 만한 죄를 범했다손 치더라도 아버지는 자식을 위해 숨겨주고, 자식은 아버지를 위해 숨겨주는 그 속에 정직함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똑같은 하나의 사실에 대해 섭공과 공자의 이해방식이 다르다. 흔히 법을 중심으로 사회를 다스려야 한다는 법가(法家)와 개인의 도덕성에 의존하여 사회를 이끌어야 한다는 유가(儒家)의 입장을 잘 보여주는 대화이기도 하다. 
  누구나 한 번쯤은 살다가 이러한 경우를 겪을 수 있다. 예를 들면, 자식이 회사 공금을 횡령한 사실을 알았을 때 어느 부모가 냉정하게 선뜻 경찰서로 달려갈 수 있겠는가? 아마도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최선의 방법을 찾아 해결해 나갈 것이다. 이것을 ‘그때(상황)에 맞는 가장 적절한 행위’, 즉 ‘시중(時中)’이라고 한다. 인간의 도덕성은 법률 조항처럼 정해진 규칙이 없다. 상황에 따라 그리고 부모와 자식 간이냐, 친구 사이냐, 아니면 그저 남이냐 등의 인간관계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곧, 상황 상황에 맞는 ‘시중성(時中性)’이 있는 것이다.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여 얻는 것보다 소중한 그 무엇이 있다는 의미다. 공자는 바로 이 점을 일깨우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셋을 셋이라 않고’에서 전하고자 하신 도전님의 뜻은 무엇일까? 비록 지금까지 참고될 만한 여러 논의를 전개해 왔지만, 단정하여 결론 내리기 어려운 문제인 것 같다. 왜냐하면 도전님의 뜻을 어떻게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다만 ‘셋을 셋이라 하는 것보다 우리가 지켜야 할 고귀한 그 무엇이 있는 경우에 셋은 셋이 아닐 수 있다는 시중성을 띤 의미’가 아닐까 미루어 추측할 뿐이다. 어디까지나 이것도 하나의 해석일 뿐, 여기에 치우치지 않기를 바란다. 고정된 하나의 해석은 우리 자신의 깨달음을 하나의 고정된 틀 속에 묶어버릴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문제는 우리가 고민하고 노력하는 속에서 각자가 깨달아야 할 몫인 것 같다.

<대순회보> 17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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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고전이나 경전 해석상의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학문체계를 동아시아 전통에서는 주석학(註釋學), 서양에서는 해석학(解釋學: Hermeneutics)이라고 한다. 그렇다고 이러한 학문체계가 그 텍스트(Text: 책)의 문장 하나하나의 의미를 온전하게 해석하게 해주지는 않는다. 이 해석학적 방법론을 통해 그 온전한 본래의 의미에 가깝게 독자가 이해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줄 뿐이다.
02 기원전 6세기 경 그리스의 예언자이며 시인으로서 현인(賢人)이었다.
03 『맹자』, 「만장」 상4: “說詩者, 不以文害辭, 不以辭害志. 以意逆志, 是爲得之.”
04  『논어』, 「자로」 18: “葉公語孔子曰, ‘吾黨有直躬者, 其父攘羊, 而子證之.’ 孔子曰, ‘吾黨之直者異於是, 父爲子隱, 子爲父隱. 直在其中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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