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의 미(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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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주소연 작성일2020.07.20 조회5,194회 댓글0건본문
연구원 주소연
동양화는 ‘여백의 미’가 핵심이다. 여백은 대상의 형체보다는 그것이 담고 있는 내용을 표현하는 방법으로 내면을 중시하는 동양적 사고를 반영한다. 대상에 대한 표현을 간결히 하고 여백을 강조하여 오히려 더욱 심오하고 풍부한 내용을 전달한다. 여백은 또한 여유의 공간으로 보는 이에게도 감정과 생각을 허용한다. 비어있어서 미완인 것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더욱 공간이 확대되고 내용도 충실해지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빈 여백의 공간으로 인해 형체가 더욱 생동적으로 드러난다. 이처럼 비어있는 것은 다른 무언가를 위한 공간으로 쓰일 수 있다.01
붓으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것은 빈 도화지가 있기 때문이며, 집이 집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은 집 내부에 빈 곳이 있기 때문이다. 이미 그림으로 꽉 찬 도화지에는 아무것도 그릴 수 없고, 머무를 공간이 없는 집은 아무리 외관이 화려할지라도 더 이상 집이라고 할 수 없다. 무언가 비어있다는 것은 새로운 무언가를 채울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의미한다.
서구화된 현대의 물질문명 사회는 화면을 가득 채운 그림처럼 수많은 말과 형체로 가득 차 자유로운 정신과 마음이 거할 곳이 없어진 듯하다. 자연의 공간은 수익을 내기 위한 건물로 채워지고 천연자원은 끊임없이 고갈되면서 숨 쉴 곳이 사라지고 있다. 사람들은 돈과 성공이라는 목표를 위해 살아가면서 자기만의 생각보다는 다른 사람들이 가는 길을 따라가는 경우가 많다. 모든 것이 규격화되고 정형화된 세상, 무언가 비어있는 공간이나 조용한 침묵의 시간을 잘 견디지 못하는 현대사회는 마치 24시간 네온사인 불빛이 환하게 켜진 도심의 풍경처럼 보인다. 여백이 없는 사회인 것이다.
비어있어서 쓰임이 되는 여백은 회화에서뿐만 아니라 우리의 마음가짐과 수행에서도 필요할듯하다. 그릇이 무언가로 채워지면 더 이상 쓰임이 될 수 없다. 그릇은 내용물을 버리고 비울 때 그 소용을 다시 회복한다. 상제님께서 “허물이 있거든 다 자신의 마음속으로 풀라. 만일 다 풀지 않고 남겨두면 몸과 운명을 그르치니라.(교법 2장 16절)”고 하셨듯이, 자기 반성을 통해 마음속의 허물을 풀고 우리 운명을 새롭게 변화시킬 수 있다. 또한, 수칙에 “일상 자신을 반성하여 과부족이 없는가를 살펴 고쳐나갈 것”이라고 하셨으니, 자기반성은 과거의 잘못된 언행을 뉘우치고 바로 잡아 마음속의 허물을 깨끗이 비우는 일이기도 하다.
비워진다는 것은 새로운 가능성으로 충만해지는 것이다. 여백이 단순히 빈 곳이 아니라 오히려 더 많은 포용성을 갖듯이 반성을 통해 비워진 마음을 감사와 사랑으로 채울 수 있다. 이렇게 비우고 버리는 반성의 활동을 통해 우리는 매일 새로워지고 더 많은 감사와 사랑을 담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닐까.
잠시 일상을 멈추고 가만히 자신을 반성하는 여백의 시간은 겉으로 보면 아무것도 안 하고 퇴보하는 듯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높이뛰기 선수가 도움닫기를 하기 위해 뒤로 물러서듯이 한 발짝 뒤로 가는 것은 두 발짝 더 앞으로 가기 위한 준비일 것이다. 더 나은 내가 되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자신을 충전하는 여백의 시간을 가져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01 김기주, 『동양화의 공간개념고찰 Ⅱ』 (서울: 공간, 1980), p.122 참고; 김수옥, 「의재와 심산작품의 여백미 고찰」, 경기대학교 조형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2, p.8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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