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와 신경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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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정현 작성일2018.12.11 조회5,578회 댓글0건본문
강덕8방면 선감 박정현
들어가는 말
논쟁을 해 본 일이 있는가? “안 해봤으면 말을 하지 마”라는 코미디 대사처럼 내 일이 아닐 땐 강 건너 불구경이지만, 어느 순간 내 일이라고 인식해서 한 발자국 들어서는 순간 신세계가 펼쳐진다.
논쟁이란 적극적 토론으로 어떠한 특별한 쟁점을 두고 주장을 펼치며 논박을 주고받는 의사소통행위이다. 특정한 문제에 대한 토론자들의 입장이 비슷한 방향성을 가지고 다양한 제안들과 대안을 검토할 때는 논의라고 하지만, 서로 다른 입장에서 근본적인 수정을 요할 때는 논쟁이 된다. 서구사회에 비해 유교적 폐습이 남아있는 우리나라의 교육현실에서는 논쟁문화가 거의 없다시피 하고 따로 교육이 필요할 정도이다 보니, 토론 중에 사람들의 이해관계마저 얽혀버리면 난장판이 되어 버리는 경우가 다반사다.
21세기는 산업사회에서 지식정보화사회로 전환하고 있고, 의학발달에 따라 고령인구와 성인인구가 증가하였다. 이에 따라 인간의 삶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과 관심이 높아지고 있으며, 정보의 교류속도와 교환범위도 빨라지며 확대되고 있다. 이러한 때에 민주적이지도 못한 대화와 소통의 습관은 ‘구슬도 꿰어야 보배’라고 교환정보의 질적 수준을 떠나서 후진적이고 발전을 저해하는 행위가 될 수도 있다.
그래서 ‘너 자신을 알라’며 강호의 숱한 세객(說客)들을 산파술(産婆術) 한 초식으로 평정했던 소크라테스의 논쟁들 중의 하나를 현대의 신경과학적인 면으로 조금 교차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산파술인 문답(問答)법이라는 것도 ‘너 자신을 알라’는 요결을 주었다면 결국 자신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으로 연결될 것이고, 종단의 목적 중에 무자기(無自欺)와 조금은 일맥상통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이다. 그리고 신경과학적인 측면으로 조금 접근해 보고자 하는 것은 과학적 근거에 조금이라도 더 가까운 신경과학을 선택하는 것이 다양한 관점들이 ‘배가 산으로 가는 것’을 줄이지 않을까 싶기 때문이다.
대화와 논쟁은 심리(心理)와 떨어질 수 없는데 심리학은 정신분석의 무의식이나 인본주의의 자아실현동기와 같이 과학적 증명이 어렵다는 약점을 가지고 있다. 그나마 행동주의01에서는 과학적으로 접근을 시도하였고, 현대의 신경과학에서는 뇌파도(EEG)나 기능성자기공명영상(fMRI) 등으로 사람의 생각이나 감정에 따른 뇌의 활성화와 변화를 이미지로도 알 수 있게 해준다. 신경과학은 앞으로도 더욱 발전하여 지난 축적된 자료를 뒤엎는 발견이 나올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휴대용 ‘fMRI’기기를 만들어 타임머신을 타고 가서 소크라테스에게 씌워놓고 논쟁을 시킬 수도 없으니 다만 그럴 것이다 정도로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소통은 무엇일까?
소크라테스가 소피스트들과 대중들에게 문답법으로 ‘무지(無知)의 지(知)’를 각성(覺性)하게 하고 참된 선의 이치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실천지(實踐知)를 역설하고 다니다 사람들에게 원한을 사서 고소를 당해 사형될 정도로 당시 아테네의 시대적 환경이 좋지 않았다.
먼저 당시 아테네의 시대환경부터 둘러보면, 페르시아전쟁(기원전 492~448)에서 결국 아테네가 승전하자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해군동맹인 델로스동맹에서 맹주로 추대되었다. 그에 따라 민주적이던 아테네가 제국화 되면서, 전통적인 그리스의 정신이었던 정치적 연대와 공존 그리고 문화적 연대마저 차츰 붕괴되었다. 그 후 펠레폰네소스전쟁(기원전 431)에서 아테네가 스파르타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을 하자, 스파르타의 장군 뤼산드로스는 아테네의 민주제를 없애고 유력인사 30인을 내세워 참주제를 실시하고 플라톤의 친척이자 소크라테스의 제자인 크리티아스를 내세워 독재체제를 세운다.
적군에 무조건 항복으로 얻은 지위인 아테네 30인의 참주들은 그들의 무능한 리더십을 불법행위를 자행하여 채우려 하였고, 이런 공포정치에 대항하는 무고한 시민들을 사형시켰다. 소크라테스가 이러한 30인 참주들의 악행을 비판하자, 그들은 법률에 ‘언어의 기술을 가르치는 것을 금하는’ 조항을 넣기도 한다. 이렇게 아테네는 부패와 질병으로 급격히 몰락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민주제는 얼마 후 회복되었지만 아테네 내부에는 이미 사조직화된 귀족들 간의 분열과 야합의 권력다툼과 정변으로 끊임없는 혼란이 일고 있었다. 또한 당시 지식인을 대표하던 소피스트들은 자신들의 언변지식이나 응변(應辯)의 수사적 기술을 기득권층인 소수귀족들에게 팔거나 상품화하여 고용되었고 이런 것이 지혜와 덕이라며 권력에 영합하였다.
이런 와중에 어떤 것이 진정한 지혜와 덕인지 궁금했던 소크라테스의 동료 카이레폰이 델포이의 아폴로신전에서 ‘소크라테스보다 더 현명한 사람이 있는지?’를 물었고, 전혀 예상치도 않은 ‘없다’라는 신탁을 얻게 된 것이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현명하다고 생각한 적이 전혀 없었으므로 자신보다 지혜롭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면서 신탁의 진위를 가려보고자 하였다. 그렇게 아테네에서 각 방면의 전문가라고 말해지는 사람들을 직접 찾아가 대화를 해보니 그들이 실제로는 현명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소크라테스는 최소한 자신이 모른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모르고 있다는 것조차 알지 못했던 것이다. 다음 (ㄱ)~(ㅂ)까지는 그 논쟁들 중의 하나로서 플라톤의 『국가』에 나오는 트라쉬마코스와의 논쟁을 줄인 일부이다.
(ㄱ) 어느 날, 일부 소피스트들이 제시한 정의관이 소크라테스에게 논파되었다. 듣고만 있던 트라쉬마코스가 소크라테스에게 ‘질문만 하지 말고, 주장을 내보여라.’라고 하며 ‘정의란 강자(强者)02의 이익’이라고 주장한다. 즉, 강자의 법은 강자의 이익을 보호하고 도모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고 오직 힘으로 자기의 권리를 만들어내며 그것이 곧 법이자 정의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강자도 실수를 저질러 자신에게도 불이익이 되는 법을 정할 수도 있고, 때로는 강자의 이익이 아닌 것을 행하는 것이 정의가 될 수 있다고 한다.
(ㄴ) 그러자 트라쉬마코스는 자신이 말한 강자는 ‘실수하지 않는 선에서의 강자의 이익’이라고 말하여 처음 단계의 힘의 강자뿐만 아니라 실수가 없게 만드는 지식과 기술을 부가한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모든 기술이란 기술 자체나 기술을 구사하는 자신의 이익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그 기술의 고유한 특성대상 쪽으로 향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래서 강자가 기술이 있다면 강자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쓰는 것이 아니라 그 기술 대상인 약자나 민중의 이익을 향해 기술을 쓰게 된다고 한다.
(ㄷ) 트라쉬마코스는 이렇게 자신의 전제가 논파되자, 양치기는 고용된 자신의 이익과 양떼의 주인의 이익을 위해 일하듯이 타인의 이익을 도모하는 일은 약자나 피지배자가 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즉, 타자의 선, 남 좋은 일을 도모하는 정의로운 자는 자기 이익만을 위한 부정의한 강자에게 뒤처지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그는 이런 ‘부정의한 강자의 행위는 정의’라는 주장을 계속한다.
(ㄹ) 이에 소크라테스는 트라쉬마코스가 양치기를 돈벌이 꾼으로 전락시켰음을 주지시키며 강자의 기술은 철저한 강자일수록 그 기술의 지배대상인 약자의 이익에 관계되는 것이고, 강자는 강자의 이익을 그 기술로써 스스로 도모하지 않으며, 다만 강자에게 그 지배대상에 의한 보수가 주어질 뿐이라고 말한다. 이 보수는 불가피한 것으로 타인의 이익을 철저히 도모하는 일은 강자에게도 힘든 일이므로 보수를 주는 것을 강요해서라도 그 역할을 하도록 해야 한다고 말한다.
(ㅁ) 이렇게 정의는 강자의 이익일 뿐이라는 주장은 논파되었으나 트라쉬마코스는 부정의가 정의나 지혜와 덕보다 우월하고 강하며 행복을 가져다준다고 주장한다. 정의란 순박하고 마음 착한 것에 귀속시키고 부정의란 분별 있는 술수라고 한다. 즉 분별있는 술수가 지혜라고 본 것이다. 이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악기를 조율하는 것을 예로 들며 절대음감을 가지고 있는 음악가는 다른 음악가가 절대음감으로 악기를 조율하면 그를 능가하려 하지 않으나, 부족한 음악가가 악기의 조율을 틀리게 할 때는 그를 능가하도록 나선다는 것을 말한다. 이에 트라쉬마코스는 부정의한 사람은 상대방에 관계없이 누구에게나 그를 능가하려고 한다는 것을 말하자, 소크라테스는 다시 음악과 의술을 예로 들며 지혜 있는 자는 월등하며 다른 비슷한 사람을 능가하려 하지 않고, 지혜 없는 사람은 열악하며 누구든지 능가하려 한다고 논변한다.
(ㅂ) 결국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을 논파한 소크라테스는 그러나 변한 게 없다고 토로한다. 논박의 결과와 관계없이 트라쉬마코스의 입장은 여전히 고집스럽게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행복에 대한 입장에 대해 그저 자신의 주장만 집착하고 있는 트라쉬마코스에게 논리적인 대화나 문답법 형식은 그 아집을 깨는 데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소크라테스는 논리적 토론과 입증으로 소피스트들을 논파했지만, 실천지로 안내하지 못하고 ‘정의와 행복’이란 정보의 인식과 소통에서 결국 평행선이 되고 말았다.
그러면 이 논쟁에 대해서 뇌의 전체부위에 대한 각각의 접근보다는 신경과학적으로 전두엽과 대뇌변연계로 줄여서 보고자 하는 이유는, 오랜 세월 페르시아와 스파르타 그리고 각 귀족 간의 전쟁이 많아서 아테네 사회상황이 혼란하고 불안하였으므로, 공포와 희로애락의 감정을 주관하는 부위인 대뇌변연계와 상대적으로 이성적 합리적 이상적인 추구와 종교성을 대표하는 부위인 전두엽이 아테네 사람들의 뇌에서 가장 활성화되기 쉬웠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이다. 신경과학에서 전두엽에 대한 특징은 미래에 대한 예측이나 고도의 이성적 판단과 연산, 집중력, 전체적이거나 종합적 종교적 생각을 할 때 앞머리 쪽 대뇌피질의 전두엽이 활성화 된다고 한다. 그리고 대뇌변연계(편도체, 해마)의 특징은 공포와 희로애락의 감정을 느낄 때 활성화되며 그중에 편도체는 공황장애와도 관련 있다고 한다. 대뇌변연계를 파충류로 보면 대뇌피질이 별로 없는 악어의 뇌를 연상하면 쉬운데, 후각이 민감하고 공격욕 등 약육강식의 동물적 생존본능이 강하며 감정을 주관한다. 그리고 해마는 새로운 단기기억을 장기기억으로 저장한다.
위의 논쟁에서 소크라테스는 전두엽을 활성화한 대화를 주로 했다고 볼 수 있다. 당시의 아테네는 30인 참주의 불법행위를 앞세우고 묵인하여 아테네 스스로의 자멸을 바라는 스파르타의 통치와 권력화한 기득권층과 그들과 야합한 수준의 정치가 있을 뿐이었다. 이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전두엽의 특징인 투철한 사명감과 책임감 그리고 논리적 이성적인 면으로 사회적 약자에 대한 문제까지 전체적으로 접근하며, (ㅂ)과 같이 그 해결의 질적 변화인 실천지까지 기대한다는 점에서 전두엽을 주로 활용한 대화였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소크라테스가 전두엽의 특징인 전체적이고 통솔적인 생각으로 ‘너 자신을 알라’며 이권에 야합한 소피스트들과 아테네 시민들을 논파하며 무지(無知)를 반성케 하고 자각(自覺)시켜 건강한 아테네로 거듭나게 하려는 시도는 독특한 주장정도를 넘어서, 젊은이를 타락시킨다는 죄목을 줄 만큼 기득권을 위협하는 것으로 부각되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호가호위(狐假虎威)03라고 신(神)의 권위를 왜곡하고 도용한 기득권 챙기기에 불과한 그들에게 스스로 양심을 돌아보게 한 일이 신성모독이란 죄목 또한 연루하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위 두 가지 죄목에 대한 완벽한 변론에도 2차 투표 끝에 사형을 선고받은 후, 주변사람들은 목숨을 연명할 길을 안내하지만 재난을 피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버리고 독배를 마신 것은, 진흙탕 같은 권모술수의 분쟁을 끝내고 정의와 행복으로 가는 길은 사람들이 각자 자신들의 마음을 반성하게 하는 것이라고 당시 아테네 사람들의 마음에 호소하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마치 『전경』에 일도분재만방심(一刀分在萬方心)04이란 말씀처럼 말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의 죽음의 의미는 그의 제자들 중에 몇 명이 참주였거나 또는 다른 몇 명이 스파르타와 의견을 같이 해서 미움을 샀다거나, 문답법으로 아고라(agora)를 휘젓고 다니며 물어보고 다녀서 원한을 샀다거나 하는 대뇌변연계의 감정적인 면으로만 말할 수 없다. 그리고 그는 전두엽의 특징인 종교적, 전체적, 이상적인 개념을 ‘정의와 행복’이라고 생각할 가능성이 큰 것이다.
이에 반해 트라쉬마코스는 자신의 주장이 소크라테스에게 논파되었음에도, 이성적으로 변화하지 못하고 생존의 아집을 가지는 것을 볼 때, 감정뇌라고 불리는 대뇌변연계인 편도체가 주로 활성화된 대화를 했다고 볼 수 있다. 즉 전두엽이 『전경』에 남을 먼저하고 후에 자신을 생각하는(先彼而後己) 쪽이라면, 대뇌변연계의 편도체는 ‘나 먼저 살고 봐야’라는 이기적 생존본능의 경향성을 가지고 있다. 트라쉬마코스가 아테네의 오랜 전쟁 속에서 공포의 감정과 암투의 장기 기억들로 인해 대뇌변연계가 활성화되어 생존본능을 강하게 갖기 쉬웠다면, 그 본능에 따라 오히려 소크라테스를 이상주의자로 평가하며 위험하게 보고 공격하며 논쟁을 통한 질적 변화에 동의하지 않고 이기적이고 현실지향적인 길을 택하게 된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즉 손과 혀가 즐겁고 감정적으로 욕구에 충만한 현실이 정의와 행복이라고 생각할 가능성이 크다고 보이는 것이다.
이렇게 소크라테스의 트라쉬마코스와의 논쟁에서 ‘정의와 행복’에 대해 인식차이가 생기는 이유는 신경과학적인 측면으로 볼 때 대뇌변연계와 대뇌피질인 전두엽으로 뇌의 활성화된 부분이 대화할 때 서로 다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즉 인사(人事) 문제는 환경 적응방식 면에서 서로 간에 뇌의 작용의 차이에 따라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으로 보면 인류의 문화는 환경적응방식의 차이가 관련한 대뇌피질의 문화라고도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따라서 논쟁을 넘어서는 진정한 소통이란, 신경과학의 측면에서 보면 살아온 환경 등에 따라 사고방식의 한계와 차이점으로 뇌가 활성화 되는 부분이 서로 다를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할 수도 있다. ‘너 자신을 알라’는 삶의 총체적 질문은 자각(自覺)과 반성이 마음에서 우러나오듯이 무자기(無自欺)와 일맥상통하고 전두엽을 활성화하는 말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종단의 목적 중에 그 시작인 무자기의 현실화는 인간 내부의 모순과 갈등을 쉬게 할 뿐만 아니라 온갖 외부적인 상극의 쟁투들 또한 스스로 해소하게 하는 첩경이 되어 세계개벽(世界開闢)까지 가능케 하는 인간으로서의 출발점인 것이다.
동양에서도 불교의 선문답인 ‘1700공안의 화두’를 볼 때도 화두 집중에 의한 전두엽 활성화가 있으며, 선(仙)에도 전두엽에 가까운 양 미간사이의 ‘상단전(上丹田)’이 있다. 유교의 『대학』에는 ‘격물치지(格物致知)’에서 ‘평천하(平天下)’로 마음에서 시작하여 천하사(天下事)까지의 확장성을 말하였고, 『전경』에는 “오직 마음을 볼 뿐이로다.”05와 ‘무자기06’ 그리고 ‘천용지용인용 통제어심(天用地用人用統在於心)’07이라는 구절이 있다. 이렇게 시간과 공간은 달라도 마음에 대한 내용과 그 확장성 면에서 비슷한 공통점이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나오는 말
21세기는 정보화시대이나 효율적이지 못한 면이 있다. 지식과 정보격차가 세상사에 빈부귀천을 달라지게 하기도 하며, 정보의 바다이자 쓰레기장인 인터넷부터 첩보전 등 정보의 편차로 인해 많은 일이 벌어지는 세상이다 보니, 그 정보격차와 소통의 부재는 ‘악으로 먹고 사는 세상’을 낳기 쉽고 상극적인 원과 한을 갖게 하는 또 하나의 원인이 될 수 있다.
후천이 원한이 없는 세상이 된다면 아마도 그 세상은 정보가 효율적으로 소통되고 공유된 상태도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대순진리회요람』의 취지에 “삼계를 투명하고 곡진이해에 무소불능하나니”라는 말씀처럼 정보의 효율화가 완전히 되어 소위 ‘앉아서 천리 밖, 서서 구만리’라고 누구나 신안(神眼) 정도의 수준에서 정보를 투명하게 알게 되는, 지금 세상과는 천양지차인 세상이 아닐까 싶다. 그렇게 높은 수준의 정보가 보편화 일반화 된다면 무자기를 통해 자신을 속이지 않는 것이 소통의 지름길이 될 것이다. 더 나아가 뇌와 사회, 천지인신(天地人神)까지 무자기의 연관성을 가지고 적절하게 진실이 현실화 될 때, 전뇌(全腦)적인 인간으로서 진정한 소통을 할 수 있을 것이며, 정신이 개벽(開闢)된 세상을 향해 방향성을 갖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거짓과 왜곡이 통하지 않는 세상, 불법과 탐욕이 통하지 않도록 투명하게 보이는 그 세상은, 정보 격차 없이 모두가 효율적으로 정보를 알고 있으므로 그 연관성을 종합하여 상생(相生)적으로 만들어내는 창의적인 세상이기도 할 것이다. 말 그대로, ‘선(善)으로 먹고 사는 세상’인 것이다.
<대순회보> 142호
참고문헌
『전경』
『대순지침』
『대순진리회요람』
플라톤 ; 왕학수 옮김,『소크라테스의 변명 국가 향연』, 동서문화사, 2007.
Dale Purves, George J. Augustine, David Fitzpatrick 공저 ; 김상정 외 옮김, 『신경과학』, 월드사이언스, 2007.
Elkhonon Goldberg ; 김인명 옮김,『내 안의 CEO, 전두엽』,시그마프레스,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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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심리학의 대상을 의식(意識)에 두지 않고, 사람 및 동물의 객관적 행동에 두는 입장으로 내관(內觀)을 배척하고 오직 자극과 반응의 관계, 그리고 그 관계로 구성되는 체계만을 다룬다. 1913년 J.B. 웟슨이 주장한 이후 미국 심리학의 중요한 조류가 되었다. [출처] 두산백과
02 트라쉬마코스와의 논쟁에서 강자(强者)의 의미는 스파르타와 그의 죽음에 직간접으로 영향을 끼쳤던 30인 참주들이라고 볼 수 있다.
03 전한(前漢) 시대의 유향(劉向)이 편찬한 『전국책(戰國策)』「초책(楚策)」에 나오는 말로 ‘여우가 호랑이의 위세를 빌리다.’는 뜻으로, 남의 권세를 빌려 허세를 부림을 비유한다.(출처: 두산백과)
04 예시 37절. 민 영환(閔泳煥, 1861~1905)이 을사늑약(乙巳勒約: 1905년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하여 강제로 체결한 조약. 고종의 날인이 없는 한일대표의 참여 하에 억지로 맺은 조약이므로 무효이다.)에 항거하여 자결함으로써, 그 마음이 민족 수호(守護)와 독립의 의지를 만방(萬方)에 호소한 것이다.
05 교법 2장 10절 참조.
06 교운 2장 32절.
07 행록 3장 4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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