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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의 발자취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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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다현 작성일2018.04.16 조회5,99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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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4 방면 평도인 강다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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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중근(安重根, 1879~1910) 의사의 하얼빈 의거 101주년 기념일인 2010.10.26일 설치된 안중근 의사 동상(남산 안중근 의사 기념관 입구)

 

대진대학교 대순종학과 4학년에 재학 중인 필자는 대진대학교에서 진행하는 중국 유학 프로그램인 DUCC(Daejin University China Campus)를 통해 4개월간 하얼빈사범대학교(哈尔滨师范大学)01에 유학을 다녀왔다. 대진대학교는 하얼빈과 쑤저우 두 곳에 캠퍼스가 있다. 4개월간의 중국 유학을 하얼빈사범대학교로 선택한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 번째는 하얼빈이 중국 내에서도 표준어를 구사하는 지역으로 유명하여 중국어를 배우고자 하는 유학생들이 많이 찾는 곳이기 때문이다. 다른 한 가지는 이곳이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저격한 역사적 장소라는 점이다. 안중근 의사의 발자취가 고스란히 담겨있는 하얼빈은 필자가 유학 오기 직전 한국의 한 예능 프로그램[1박 2일]에서도 특집으로 소개된 바 있다. 평소에도 하얼빈에 관심이 있었지만, 대중매체를 통해 안중근 의사의 유적지를 접한 것은 하얼빈에 소재한 대학교를 더 눈여겨보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래서인지 유학생활에서 공부 이외에 가장 기억에 남았던 일은 안중근 의사 관련 행적지를 답사한 것이다. 4개월 남짓 이곳에 머물면서 필자는 틈틈이 안중근 의사의 관련 행적지인 하얼빈역, 뤼순감옥, 조린공원 등을 찾아다녔다. 안중근 의사의 유적지는 독립운동가였던 안중근 의사의 활약상과 조국을 위해 헌신하고자 했던 그의 비장한 마음이 고스란히 담긴 뜻깊은 장소였다. 안중근에 관한 내용은 『전경』에서도 찾을 수 있다.

 

상제께서 하루는 대흥리에 계셨는데 안 내성으로 하여금 곤봉으로 마룻장을 치라 하시며 가라사대 “이제 병고에 빠진 인류를 건지려면 일등박문이 필요하고 이등박문이 불필요하게 되었느니라” 하셨는데 그 뒤 이등박문(伊藤博文)이 할빈 역에서 안 중근(安重根) 의사(義士)에게 암살되었도다.(행록 5장 5절).

 

위에 인용된 『전경』 내용에 따르면 상제님께서는 이등박문을 없애기 위해 천지 공사에 안중근을 쓰셨음을 확인할 수 있다. 안중근 의사는 대순진리회 수도인에게도 의미 있는 인물이기에 그의 발자취가 담긴 하얼빈을 답사하는 것은 당시의 역사적 사실을 현장감 있게 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으로 생각한다. 글의 전개는 답사한 내용을 수기 형태로 작성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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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얼빈역(哈尔滨站)

 

3월 26일. 이날은 안중근 의사가 뤼순감옥에서 서거한 106주년이 되는 뜻깊은 날이었다. 마침 수업이 없는 토요일이어서 함께 유학 온 대진대학교 친구 두 명과 함께 택시를 타고 15분 가량 달려 하얼빈역에 도착했다. 유동인구가 많은 하얼빈역은 안중근 의사 기념관이 있는 곳이다. 이곳은 지난 2013년 박근혜 전 대통령이 중국에 방문했을 때 시진핑 주석에게 “하얼빈역에 안중근 의사를 추모하는 작은 비석 하나를 세워달라”는 부탁이 시발점이 되어 설립된 곳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요청에 중국 정부는 안중근 의사가 한중 양 국민에게 존경받는 역사적 인물이기에 의미 있는 기념관을 건립하겠다고 답변했고, 2014년 1월 19일 개관하였다. 하얼빈역 입구 옆쪽에 소재한 안중근 의사 기념관은 귀빈 대합실을 고쳐 만든 200㎡ 규모의 작은 기념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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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구에는 안중근 의사 기념관이라고 현판이 내걸려 있고 그 위쪽에는 시계가 오전 9시 30분을 가리키고 있다. 106년 전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역사적인 시간이다. 시계는 당시의 역사적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오전 9시 30분에 멈춰 있었고, 우리는 한참동안 시계를 바라보다 기념관 내부로 발길을 돌렸다. 입구에 들어서자 간단한 검문 절차를 거쳐야 기념관 내부를 관람할 수 있었다. 기념관 초입에는 안중근 의사의 유묵 서예작 여러 점과 그의 동상이 전시되어 있었다. 기념관에 있는 안중근 관련 자료들은 중국어와 한국어로 자세히 적혀 있어 천천히 돌아가면서 자세히 읽어볼 수 있었다.

 

안중근 의사와 관련된 각종 자료와 이토 히로부미에 대한 자료도 볼 수 있었다. 한쪽 벽면에는 1909년 10월 22일 밤 9시 하얼빈역에서 안중근 의사가 내리던 순간부터 의거일과 뤼순감옥 압송 전인 10월 30일까지의 과정이 사진과 함께 설명되어 있었다. 또 다른 벽에는 “안중근 이토 히로부미를 격살하다(安重根擊殺伊藤博文)”라는 제목의 대형 수묵화가 걸려 있었는데 저격 당시의 장면이 생생하게 그려져 매우 인상적이었다.

 

그런가 하면 기념관 중앙 끝 대형 유리벽에는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향해 총을 쏜 장소를 세모 모양으로, 이토 히로부미가 피격된 장소를 사각형으로 표시해 놓았다. 특별한 형태로 각 장소를 특징 지어둔 대형 유리 벽면 위쪽에는 “안중근 이토 히로부미 격살 사건 발생지/1909년 10월 26일 (安重根擊殺伊藤博文事件發生地 1909.10.26)”라고 적힌 안내 표지판이 걸려 있었다.

기념관에는 한국인 이외에도 현지 중국인과 외국인들의 모습도 보였다. 자국민의 처지가 아닌 외국인의 시선으로 안중근 기념관을 관람하는 사람들은 이곳에서 어떤 생각과 감명을 받았을지 궁금하기도 했다. 106년이라는 한 세기가 지나 책으로만 접했던 역사적 장소를 직접 답사하고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기념관을 나서기 전에 방명록을 작성하면서 한국인뿐만 아니라 많은 중국인이 이곳을 방문한 기록을 볼 수 있었다. 기념관을 모두 관람한 후 입구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아쉽지만, 다음 장소로 발걸음을 돌렸다. 역사적 현장인 기차역 안에도 들어가 보고 싶었지만, 기차표를 끊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어 아쉬웠다. 멀리서나마 총성이 울린 그 자리를 바라보니 가슴이 먹먹해졌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중국인들이 기차를 타기 위해 바쁘게 지나가는 모습만 보였다.

 

 

대련 뤼순감옥(大连 旅顺监狱)

 

대진대 DUCC 학생들은 한 학기에 한 번 사비를 들여 단체 여행을 간다. 원래 가려고 했던 베이징 여행지가 취소되면서 좋은 조건의 대련 패키지 자유 여행을 가게 되었다. 자유롭게 여행지를 정해 다니는 여행이어서 마지막 날인 5월 10일 뤼순감옥을 방문하게 되었다. 일전에 하얼빈역에 다녀온 후 기회가 된다면 뤼순감옥도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차에 단체 여행지로 뤼순감옥을 답사하게 된 것이다.

 

하얼빈에서 국내선 비행기를 타고 대련까지 약 1시간 반 정도 시간이 소요되었다. 대련(大连)은 중국 랴오닝 성(遼寧省) 랴오둥 반도(遼東半島) 남단에 위치한 해변 도시로 아시아 최대 성해 광장을 비롯해 200여 개의 광장이 있다. 이층 버스를 타고 대련 시내를 구경했는데 그때 보았던 잘 꾸며진 조경과 아름다운 풍경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2박 3일간의 일정 중에서 뤼순감옥 답사는 마지막날 관광버스를 전세해 대진대 교학팀 부장님과 선생님들과 함께 가게 되었다. 뤼순감옥으로 가기 위해서는 대련 시내에서도 버스로 한 시간 정도 가야 했다. 차 안에서 대련 풍경을 바라보았다. 나는 차 안에 편히 앉아 뤼순감옥으로 가는 중인데 그 당시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에서 대련으로 이송 수감될 때 안 의사의 비장한 심정은 어땠을지 잠깐이나마 마음속으로 떠올려보았다.

 

뤼순감옥은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 저격 후 144일 동안 갇혀 있다가 3월 26일 사형을 당한 장소이다. 수용 규모는 275실로 약 이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공간이지만 실제로는 약 20,000명이 수감된 장소라고 한다. 뤼순감옥에 들어서자 적색의 높은 벽들이 눈에 들어왔다. 입구에서 소지품과 간단한 검문 절차를 거치고 검문소를 통과하니 뤼순감옥에 조선족 안내원이 우리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안내원은 한국어로 뤼순감옥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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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에 들어선 순간 어둡고 고요한 느낌이 들었다. 첫 번째 방문장소는 서부 검시실이었다. 이곳은 공장으로 가는 통로인데, 과거에 수감자들은 이곳에서 아침저녁으로 옷을 벗고 검사를 받았다고 한다. 실제 그 당시에 입었던 수감자들의 죄수복이 진열되어 있었다. 검시실 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니 좁은 복도가 보였다. 볕이 잘 들지 않는 어둡고 으슥한 분위기에 양쪽에는 쇠로 된 철장 문으로 된 감방들이 보였다. 안내원의 말에 따르면 당시 수감자들은 비좁은 방에서 최대 8명이 함께 생활하며 겨울에는 이불도 없이 보냈다고 한다.

 

좁은 골방 같은 곳에서 생활하는 것만으로도 힘들었을 텐데 배식마저 등급을 나누어 차등을 두었다고 하니 가슴이 먹먹해졌다. 당시 뤼순감옥에서는 배식의 양을 1등급부터 7등급으로 나뉘어 처음 이곳에 수감될 경우 4등급으로 배식을 받다가 일을 잘하면 점차 등급을 올려 밥양을 늘려주고 일을 하지 못하면 등급을 내려 밥양을 줄였다고 한다. 1등급은 50g의 양으로 사람이 먹을 수 없는 동물들이 먹는 죽 같은 음식을 줬다고 한다.

 

다음으로 우리 일행은 뤼순감옥 내 사형장을 방문하게 되었다. 그곳의 광경은 차마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잔인하고 참혹했다. 사형집행은 천장에 매달린 밧줄을 목에 걸고 사형을 집행한 다음 사형자의 시신을 반으로 접어 나무통에 시신을 떨어트린 다음 수감자들이 집적 땅에 묻었다고 한다. 실제로 그때 사용한 나무통 안에 사형수의 유골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 당시 시신이 묻힌 장소에는 이리떼가 자주 출몰했었다고 한다.

 

뤼순감옥에서 형장으로 사라진 수많은 목숨이 감옥 주변 야산에 묻혔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숙연해졌다. 이곳에는 안중근 의사를 기념하기 위한 장소들이 많았다. 가장 먼저 안중근 의사가 수감생활을 했던 당직실 옆 독방이 눈에 들어왔다. 독방 앞에는 중국어, 영어, 한국어, 일본어 4개 국어로 ‘조선 애국지사 안중근을 구금했던 감방’이라고 황금색 표지판이 걸려 있었고, 관련 내용이 기재되어 있었다. 쇠 철장 사이로 안중근 의사가 사용했던 1인실 침대와 책걸상, 그리고 유묵(遺墨) 200여 점을 남기면서 사용했던 먹과 벼루, 붓 등이 보였다.

 

이곳에서 그는 동양의 평화를 위해 『동양평화론』을 작성 도중 완성하지 못하고 사형당했다.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아주 잘 보존되어 있어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함께 간 대진대 학생뿐만 아니라 중국 관광객들에게도 그 장소는 특별해 보였다. 많은 사람이 그 방을 보기위해 기다리고 있었고, 핸드폰으로 안중근 의사의 흔적을 카메라에 담기에 바빴다.

 

다음으로 우리 일행은 안중근 의사가 의로운 죽음을 맞이한 사형장을 관람했다. 안중근 의사는 다른 사형수와 달리 뤼순감옥에서 사형을 당할 때 유일하게 의자에 앉아 사형을 당했다. 다른 사형수와 사형 방법이 달랐던 까닭은 당시 안중근 의사의 사형을 집행한 교도관들이 안중근 의사를 존경하여 배려한 것이라고 한다. 교수형에 사용된 밧줄과 의자도 잘 보존되어 있었고, 의자 위에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가 직접 지은 수의를 입고 찍은 사진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 이 액자 속 모습이 안중근 의사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사형장 안 분위기는 어두웠는데 특히 안중근 의사 사진 주변에는 조명이 더해져 엄숙하면서도 경건한 마음이 들었다. 앞쪽에는 꽃들이 진열되어 추모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사형장 주변 한쪽 벽면에는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안중근이 순국한 곳’이라는 안내문이 걸려 있었다. 그리고 ‘분도 어머니에게 부치는 글’ ‘어머니의 전상서’ ‘최후의 유언’ 등 사형선고 후 안중근 의사의 마음을 엿볼 수 있는 글귀들이 벽에 걸려 있었다. 글귀 중 “어머니의 전상서”는 자식의 목숨보다 조국과 민족을 먼저 생각하여 의로운 죽음을 택하라는 어머니의 결연한 의지를 엿볼 수 있었다. 안중근과 그 어머니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느낄 수 있었던 사형장을 지나 안내원을 따라 우리 일행이 찾아간 장소는 “뤼순감옥의 국제 지사실”이었다. 이곳에는 안중근 의사를 비롯해 신채호, 이화영 등 우리나라 독립운동가들의 부스가 설치되어 있어 그들의 활동과 업적을 자세하게 알 수 있었다.

 

독립운동가로 일생을 바친 그의 삶에 매료되어 정신없이 기념관을 둘러보다 보니 어느덧 기념관의 마지막 장소인 ‘안중근 의사 추모관’에 도착해 있었다. 중국 땅에 안중근 의사 추모관이 있다는 것이 놀랍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한국인이라는 것이 자랑스러웠다. 추모관 입구 정중앙에는 안중근 의사의 기념 동상이 자리하고 있었다. 우리 일행이 이곳을 방문했을 때가 안중근 의사 서거 106주년이었기에 이를 기념하기 위한 대형 현수막도 걸려 있었다. 현수막 주변에는 형형색색 아름다운 꽃들이 장식돼 안중근 의사의 동상을 한층 더 빛나게 했다. 추모관 내 양쪽 벽면에는 안중근 의사가 뤼순감옥에서 남긴 유묵 필사본도 여러 점 전시되어 있었다. 지금도 매년 이곳에서 안중근 의사의 추모식이 열린다고 한다.

 

살아생전 안중근 의사의 사상과 정신은 당시 일본 교도관들도 그 정신을 높이 사 존경하였다고 한다. 사후에도 한국뿐만 아니라 먼 이국인 중국에서도 추모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것을 보면 한중 양국에서 한 시대의 획을 그은 특별한 인물임에 틀림없었다. 텔레비전에서 볼 때와 달리 직접 이곳을 방문하니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뤼순감옥 방문을 마치고 뤼순감옥 정문 벤치에 앉아 잠시 그의 삶과 이곳에서 생활하던 수감자들의 삶을 되돌아보았다.

 

필자가 이곳을 방문한 날은 무척 날씨가 좋은 푸른 5월이었다. 감옥에서 안중근 의사를 비롯해 수많은 수감자가 빛을 보지 못하고 어둡고 답답한 감옥에서 인권을 무시당한 채 처형당했을 것이다. 비참하게 사라져 간 수많은 사형수를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웠지만, 지금이라도 그들의 삶에 경의를 표하고 넋을 기리기 위해 사람들이 찾는다는 것에 감사했다. 특히 한국이 아닌 중국에서 안중근의 역사적 행적을 답사하고 그 현장에서 값진 경험을 했다는 것에 다시 한번 감사한다.

 

 

하얼빈 조린공원(哈尔滨兆麟公園)

 

한국에 돌아가기 전에 꼭 한번 가보고 싶었던 곳이 조린공원이었다. 미리 이곳을 방문하기 위해서 전날에 가는 길을 알아두었다. 6월 12일 일요일 아침 8시에 기숙사에서 나와서 102번 버스를 타고 40분 가량 버스를 타고 갔다. 내리는 장소를 몰라 중국인의 도움을 받아 내렸다. 마침 내리는 장소를 물어봤던 분도 나와 같은 곳에 내려 나를 조린공원까지 데려다주었다. 이 공원은 1900년에 조성된 하얼빈 최초의 공원이다. 설립될 때 원래 이름은 도리(道理)공원이었다가 1946년 조린(兆麟)공원으로 이름이 바뀌게 되었다. 중국의 항일 운동가인 이조린(李兆麟, 1910~1946) 장군을 기념하기 위해 공원에 이(李) 장군의 유해를 안장하고 이름이 바뀌었다고 한다. 조린공원에서는 매년 세계적인 겨울 축제 빙등제가 열린다고 한다. 공원에 들어서니 푸른 6월을 맞아 각양각색의 꽃들이 심겨 있었다. 주말을 맞이하여 가족과 휴식을 취하기 위해 이곳을 찾은 사람들이 많았다. 공원 내에서는 중국 전통공연도 펼쳐지고 놀이공원도 있어 큰 음악 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시끌벅적한 가운데 모두가 활기차게 생활하고 있었다. 지금은 하얼빈 사람들의 휴식처로 이용되고 있지만 조린공원은 우리에게 조금은 특별한 장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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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공원은 안중근 의사가 1909년 10월 23일 거사 3일 전에 동지인 우덕순, 유동하와 함께 마지막 사진을 찍고 결의를 다진 후 구체적인 거사를 계획한 역사적인 장소다. 이 장소의 의미를 알고 찾아온 나는 그 당시 거사를 앞둔 안중근 의사와 동지들의 비장한 마음을 느껴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안중근 의사를 기념하기 위해 하얼빈시에서는 이곳에 비석을 세웠다. 그 비석을 찾기 위해 공원 관계자에게 사진을 보여주며 물어봤는데 한국 발음으로 “안중근”이라고 말하면서 안내를 해주어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설명을 듣고 그곳을 찾기 위해 공원 중간쯤에 다다르자 높이 1m의 화강암 비석이 눈에 들어왔다. 비석 앞면에는 “청초당(靑草塘)”, 뒷면은 “연지(硯池)”라고 새겨져 있었고 안중근 의사의 붉은 손도장도 함께 새겨져 있었다. 안중근 의사는 이 공원에 남다른 애정이 있는 것 같다. 안중근 의사가 뤼순감옥에서 두 아우 정근, 공근에게 마지막 유언을 남길 때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이장 해다오”라고 말을 했는데, 바로 그 당시 하얼빈공원이 지금의 조린공원이다.

 

하지만 순국 후 안중근 의사는 하얼빈공원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아직도 안중근 의사의 유해는 뤼순감옥 인근 공동묘지에 묻혀 있고, 많은 사람의 노력에도 고국으로 되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이 장소는 안중근 의사에게도 특별했지만, 지금은 한국인과 중국인들에게 안중근 의사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특별하고도 소중한 장소임이 틀림없었다. 끝으로 하얼빈으로 유학을 오게 돼서 안중근 의사 관련 유적지 세 곳을 답사할 수 있었던 것이 나의 삶에서는 평생 잊지 못할 매우 값진 시간으로 기억될 것이다.

 

 

 

01 중국 북부 헤이룽장성(黑龙江省) 하얼빈(哈尔滨)에 있는 사범대학.

 

 

<대순회보 19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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