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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보 농사꾼의 결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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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현주 작성일2019.10.16 조회5,50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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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릉1-11 방면 정리 이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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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사는 동네는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는 신흥 주택지입니다. 그래서 새로 짓는 건물도 있지만, 공터도 제법 있습니다. 아침나절 비가 촉촉이 내린 어느 봄날이었습니다. 가게에 우유를 사러 나섰다가 집 앞 공터에서 아들이랑 같은 어린이집을 다니는 아이의 할머니를 만났습니다. 아침마다 어린이집 차를 기다리며 대화하는 사이라 반갑게 인사했습니다. 할머니 손에는 호미가 있었습니다.

“안녕하세요, OO이 할머니. 뭐 하세요?”

“응, 상추랑 고추 좀 심느라고. △△엄마도 여기 한쪽에 뭐 좀 심어봐요. 키워서 따 먹는 재미가 쏠쏠해요.”

할머니는 심고 남은 거라며 동그랗고 한쪽 끝이 뾰족한 까만색 씨앗을 주셨습니다. 부추 씨앗이랍니다. 매일 얼굴 보는 사이에 주신 성의를 거부할 수 없어 공터 한쪽 끝에 씨앗을 심었습니다. 비를 머금은 땅은 폭신폭신해서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 씨앗을 넣고 쓱쓱 쉽게 메울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제 인생 첫 농사가 봄비와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며칠 날씨가 따뜻하다가 하루 비가 온 다음 날 OO이 할머니를 공터에서 만났습니다. 할머니 손에는 또 다른 모종이 있었습니다.

“OO이 할머니, 또 뭘 심으세요?”

“오이랑 호박. 비 왔을 때 심어야 일이 적어요. 아 참, 여기 와서 봐요. 저번에 심은 부추가 싹이 올라왔어.”

할머니 부름에 가서 보니 진짜 연두색 싹이 올라와 있었습니다. 제가 심은 부추도 꼬부라진 허리를 펴고 땅속에서 올라오는 중이었습니다. 정말 신기했습니다. 농사는커녕 화분 하나도 키워본 적이 없는 저에게 자신감을 일깨워준 새로운 경험이었습니다. 도장에서 수호 서며 밭에 작업을 가본 적이 있지만 시키는 걸 따라 했을 뿐이었습니다. 순간 제가 농사에 재능이 있는 건 아닐까 즐거운 착각이 들었습니다. 그 길로 시장에 가서 방울토마토 모종을 사 왔고 호미도 없이 젖은 땅을 맨손으로 파서 모종을 심고 잘 자라라고 흙을 토닥여 주었습니다.

그날부터 집을 나올 때면 공터에 들르는 게 일상이 되었습니다. 제 땅은 아니지만 내 손으로 심은 작물이 있으니 제 밭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작물은 기대만큼 빨리 자라지는 않았습니다. 한 주가 지나고 또 한 주가 지나고 한낮의 햇볕이 뜨겁다고 느낄 때쯤에서야 작물이 커가는 것이 눈에 보였습니다. 작물만 크는 게 아니라 잡초도 하루가 다르게 올라왔습니다. 거름도 안 준 밭에 영양분을 뺏길세라 매일매일 잡초를 뽑았습니다. 비가 일주일 넘도록 안 올라치면 생수통에 물을 받아 나르기까지 했습니다.

그런 제 정성을 알아주기라도 하듯 세 걸음도 안 되는 밭에선 노란 꽃들이 올망졸망 모여 피었고 꽃이 떨어지면 빠알간 방울들이 조롱조롱 달렸습니다. 이웃 할머니의 조언에 따라 지지대를 세우고 예쁘게 자라라고 순을 쳤습니다. 한 줄기에 꽃이 너무 많이 피면 열매가 크지 않으니 꽃을 따내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3~4일마다 빨갛게 익은 방울토마토를 한 대접씩 따 먹으며 이웃 할머니께 나눠 드리고 오이랑 호박도 얻었습니다. 잔디 인형 머리처럼 수북이 자란 부추는 칼로 베어 먹고 보름이 지나면 또 수북이 자라났습니다. 덕분에 비 오는 날마다 부추전을 실컷 부쳐 먹었습니다.

한바탕 비가 쏟아지고 나면 식물은 더 빨리 자랐습니다. 마치 ‘이때다’ 하는 양 잡초도 무성해졌습니다. 장마 동안 돌보지 못했더니 세 걸음짜리 밭은 풀밭이 되어 버렸습니다. 한여름 뜨거운 햇살은 작물도 키우고 잡초도 키웠습니다. 어떻게 할지 손대기가 겁나서 그 뒤로는 밭에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흐르고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더니 한낮에 뜨거운 햇볕만 피하면 산책하기 좋은 날씨가 되었습니다. 마트에 갔다 오는 길에 밭에서 일하고 계시는 OO이 할머니를 보았습니다. 할머니 밭은 잡초가 없었고 빨간 고추와 누런 노각이 날 좀 봐 달란 듯이 달려있었습니다. 진한 초록색의 둥그런 호박들은 자리를 잡고 앉아 ‘이제 호박 마차가 될 거에요’라고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바로 옆에 아무렇게나 잡초가 우거진 제 밭을 보니 너무 민망해서 차마 할머니께 인사를 건네지 못했습니다.

다음날 아들을 어린이집에 보내고 동네가 조용해지길 기다려 밭에 갔습니다.

누가 보는 사람이 없는지 저도 모르게 주위를 살폈습니다. 세 걸음짜리 밭도 못 돌본 저의 게으름이 들킬까 봐 부끄러웠나 봅니다. 농사 도구라고 할 것도 없어 주방에서 쓰는 가위를 들고 잡초를 잘랐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건 돌보지도 않은 밭에 방울토마토가 더 빨갛게 주렁주렁 달려있었습니다. 심지어 단맛이 났습니다. 자기 키보다 더 큰 잡초 사이에서 작고 하얀 꽃들이 소복소복 모여 저를 반겼습니다. 자세히 보니 부추였습니다. 한참을 찾지도 않아 서운할 만도 하겠건만 예쁘게 하얀 꽃을 피우고 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잘라먹고 또 잘라먹고 비 오는 날 감성을 일깨워준 녀석에게 고맙고도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안개꽃을 닮은 작고 하얀 부추꽃을 한 움큼 꺾어서 집으로 가져왔습니다. 부추꽃은 음료수통에 꽂혀 저에게 며칠 동안 작은 행복을 주었습니다. 지나간 봄, 여름 두 계절 동안 우리 사이 뭔가 소통하고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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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로도 몇 번 더 방울토마토를 따 먹었는데 바람 끝이 차가워지면서 잡초도 작물도 말라갔습니다. 하얀 꽃을 피웠던 부추는 까만 씨앗을 맺었고 봄에 뿌렸던 것보다 더 많은 씨앗을 제게 주었습니다. 부추 씨앗을 훑고 나니 곧 닥쳐올 찬바람에 부추가 얼어 죽으면 어쩌나 걱정되었습니다. 마침 버리려던 스티로폼 상자가 생각났고 부추를 옮겨 심었습니다. 한 포기라도 놓칠까 꼼꼼히 살폈습니다. 묵직한 상자는 햇볕 잘 드는 베란다에 자리 잡았습니다. 입에도 눈에도 즐거움을 준 부추에게 보답한 것 같아 얼마나 마음이 뿌듯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옮겨 심으면서 마지막으로 잘라 먹고는 그 뒤로 자라는 부추가 전만 못했습니다. 가늘어져 힘없이 쓰러지고 색깔도 연해졌습니다. 밭에 있을 때와 비교할 수 없이 자주 살피고 물도 꼬박꼬박 챙겨 줬습니다. 날이 추워서 그러나 싶어 따뜻한 거실로 자리를 옮겼지만, 부추는 여전히 가늘고 힘이 없었습니다.

한 해가 지나고 날이 따뜻해졌습니다. 봄비가 내린 날, OO이 할머니는 공터에 또 뭔가 심고 계셨습니다. OO이가 유치원에 가면서 할머니와 인사할 기회가  없었던 터라 반가웠습니다.

“OO이 할머니, 잘 지내셨어요?”

“오랜만이네, △△엄마. 날 풀리면서 방심했는지 OO이랑 같이 감기 걸려서 한동안 집에만 있었어요. 그 바람에 진즉에 뭘 심었어야 했는데 좀 늦었네.”

할머니 얼굴이 핼쑥해 보이긴 했습니다. 그런데 밭에는 누가 심어 놓은 것처럼 부추가 자라고 있었습니다.

“농사 이제 시작하셨다고요? 이 부추 할머니께서 심으신 거 아닌가요?”

“그거? 작년에 심었던 게 겨울나고 이제 올라온 거네. 겨울난 부추는 아무도 안 준대요. 맛 좋고 영양도 많다고. △△엄마도 작년에 부추 심었잖아요. 올해는 더 굵고 맛있는 부추가 자랄 거에요.”

아차 싶었습니다. 초보 농부의 무지에서 비롯한 배려가 부추에게 맛 좋고 영양 많아질 기회를 뺏은 거였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보니 베란다 한쪽 구석에 버려진 것처럼 있는 부추가 안쓰러웠습니다. 사람이었다면 좋은 기회를 뺏겨 원이 맺힐 수도 있겠구나 싶어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초보라 뭘 모른다는 게 이런 결과를 가져오는구나 반성도 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저는 작물 농사만 초보가 아니라 자식 농사도 초보였습니다.

첫째 아이가 또래보다 언어가 느린 것 같아 작년 한 해 교정 센터에 다니며 언어치료를 받았습니다. 센터에 갈 때마다 걱정과 불안이 밀려왔습니다. 첫째가 치료를 받는 동안 둘째를 안고 기다리는 게 제겐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되짚어 보니 굳이 그럴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은 별문제 없이 지내는 첫째를 보며 치료받은 덕이기도 하겠지만 그냥 뒀어도 시간이 해결해 주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놀면서 배우고 겪어내면서 잘 자랐을 아이의 소중한 시간을 뺏은 것 같습니다. 자식 농사 초보 엄마의 과한 배려였거나 욕심이었겠지요.

다시 생각해보니 제 수도 생활도 실수 연속이었던 것 같습니다. 걱정한답시고 수반들이 감당하기 힘들어 보이는 일은 하지 못하게 하고 포덕하면서 어려운 상황이 생기면 극복할 수 있게 끌어주기보다는 쉽게 가자고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수반들이 포덕을 할 일꾼의 길 보다는 상제님을 믿기만 하는 신앙인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저도 점점 포덕에 대한 의지가 꺾이면서 아이 둘을 키우는 현실을 핑계로 지금의 삶에 안주하게 된 것이겠지요.

누군가 먼저 해본 경험을 전한다는 건 큰 공덕인 것 같습니다. 농사를 지어 본 이웃 할머니 덕분에 제가 농사의 수고로움과 즐거움, 수확의 행복을 맛보았으니까요. 저의 수도 생활이 부족한 초보의 실수였지만 그 실수도 귀한 경험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실수와 실패의 경험도 누군가에게는 분명 도움이 될 것입니다.

지금 제 손에는 작년에 받아놓은 부추 씨앗이 있습니다. 초보 농사꾼의 소중한 결실입니다. 이 씨앗을 또 심을 겁니다. 남은 씨앗은 누군가에게 나눠 줄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받은 상제님의 덕화도 나눠야겠다는 마음을 먹어봅니다. 하지만 그 씨앗이 빨리 열매 맺지 않는다고 독촉하지 않을 겁니다. 자연은 때가 되어야 자라고 어려움을 겪고 나면 더 튼튼해진다는 걸 알았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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