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인의 양심을 일깨워준 대학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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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송하명 작성일2018.12.11 조회5,578회 댓글0건본문
구의10 방면 선감 송하명
2010학년 신입생 오리엔테이션(OT) 때가 잊히지 않는다. 어떤 것에도 미혹되지 않는다는 불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만학을 꿈꾸었던 나는, 대진대 체육관에 들어서는 순간 2,000여 명이 넘는 젊은 학생들의 웅성거리는 소리에 그만 두 어깨가 처지면서 자신감을 상실했었다. 그게 무엇 때문인지 명확하지 않지만 분명한 건 열정과 패기가 넘치는 젊은이들의 당당한 모습에 스스로 위축되었던 것 같다. 그만큼 그들의 나이에 맞는 당당한 모습은 수도와 학업 중 후자를 선택하여 학생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나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혼란과 비교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이 경험은 앞으로 나의 대학생활이 수도인으로서 양심을 찾기 위한 방황과 갈등의 수도장이 될 것임을 암시해 주었다.
대학에서 대순진리회에 대한 교과 강의만 열심히 듣다 보면 저절로 진리에 대한 각(覺)이 열릴 줄 알았던 것은 아주 순진하고 어리석은 착각이었다. 우리의 모든 일이 결코 쉽게 이루어지지 않듯이, 학업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공부하는 방법을 몰랐던 나는 교과 강의만 듣는다고 이 문제가 해결되진 않았다. 주어진 상황에 안주만 하는 수동적인 자세에서는 시간이 지나도 배움에 변함이 없었다. 그러자 나의 선택에 의문을 가지게 되었고 주위에서 ‘임원이 포덕 사업을 해야지 무슨 공부냐?’ 또는 ‘종사원 되려고 학교 가는 거냐?’ 등의 얘기들이 귓가에 맴돌았다. 당시 나는 이러한 주변의 이야기들에 너무 예민해져 있었기 때문에 내면의 변화에서 문제를 찾으려는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욕속부달(欲速不達)’이라고 마음만 급했지 바라던 바와는 멀어져 갔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아무런 창조적이고 참신한 생각이 아예 떠오르지 않았다. 그야말로 나의 머리는 정지 상태 그 자체였다.
그때 나는 그동안 수도한 것이 도움이 되지 못하는 현실에 큰 회의감과 상실감에 빠져들었다. 학교생활은 재미가 없고 강의가 끝나면 집으로 오기 바빴다. 집이 여주라서 도장과 가깝지만, 상제님께 읍배 드리러 가는 것도 꺼리게 되고 더구나 내가 학교 간 것을 아는 분을 만나는 것이 싫었다. 그야말로 나의 온갖 치부를 모두가 알게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만이 커졌다.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며 나만 믿고 뒷바라지하던 아내는 나의 이런 나약한 모습에 한숨만 늘었고 실망감 또한 커져갔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을 보고 그때 나를 채찍질한 것은 아내였다. 아내는 무기력증에 빠진 나를 일으켜 세워 함께 도장으로 향하게 했다. 그로 인해 나는 주말에 수호를 서면서 동료 임원들을 만나 나의 고민과 고충을 얘기하며 위로를 받고 현실의 나 자신을 살펴보는 시간을 가졌다. 그때 아내마저 낙담했다면 헤어나오기 힘들었을 것이다.
학교와 도장, 가정에서의 나의 모습은 모두 똑같았다. 임원이면서 이런 나약한 모습을 보일 때 그것도 종단의 큰 지원을 받고 공부를 하고 있었기에 신명의 벌을 받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만 커졌다. 어느 순간에 이르러서는 학교를 그만두고 일을 해야겠다는 어리석은 결심까지 하게 되었다. 그야말로 나의 모든 나약함이 좌절감으로 빠져드는 순간이었다. 그러다 문득 내가 어떻게 이 상황까지 오게 되었는지 곰곰이 생각해보게 되었다. ‘내가 왜 이렇게 되었을까?’ ‘도장에서 10년 동안 수호를 서면서 겪고 배웠던 나의 도심은 어디로 간 것일까?’ ‘무지하지만 순수했고 당당했던 나의 모습은 사라지고 왜 이런 온갖 치부만이 드러나는 것인가?’ ‘창조적인 생각은 닫히고 머리를 휘감고 있는 이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손오공이 말을 듣지 않을 때를 대비해서 삼장법사가 주문을 외우면 머리가 죄여져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이랄까?’ ‘이게 나의 겁액인 것인가?’
겁액에 휘감기어 있음을 직시한 그 순간, 이렇게 힘들 때 ‘나는 왜 상제님께 의지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돌이켜보면 많은 혜택을 받고 공부하면서도 나는 상제님을 찾지 않았다. 그동안 나는 종단의 임원임을 망각한 채 교수님과 동료들에게 너무 부끄러운 모습을 자주 보여주고 있었다. 능력도 안 되면서 모든 일을 내 힘으로만 해보려는 아집만 늘어서 나의 심신은 점점 피폐해졌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내 마음에는 비워내야 할 어떤 부끄러움도 자존심도 남아있지 않았다. “살아야겠다.” 당시 학교생활의 성공과 실패는 앞으로의 나의 수도생활에 큰 영향을 줄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였다. 우선 공부보다도 상제님의 기운을 통하여 심신을 회복하기 위해서 수련과 기도가 필요했다. 그날부터 나는 강의가 없는 시간에 8층 기도실에 올라가 먼저 수련을 통하여 상제님의 기운을 단전에 연마하기 위해 간절히 상제님을 찾았다.
일단 개심(改心)을 했으니 나의 생활에 많은 변화를 주어야 했다. 아침 5시 기상 후 캠퍼스를 한 바퀴 돌고, 기숙사로 돌아와 씻고 기도를 모신 후 훈회수칙을 낭독하며 일과를 시작했다. 이런 생활은 졸업하기 전까지 계속 이어졌다. 그리고 공부 방법을 지도해주는 몇 분의 멘토를 만나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그중 ‘배움에서 내가 이해를 못하면 자신이 못난 탓이 아니라 가르치는 스승의 탓이다.’ 라는 멘토의 강렬한 한마디는 나의 뒤통수를 때렸다. 훌륭한 스승은 모자란 학생들조차도 쉽게 이해시킬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곧 수직적 사고방식에서 수평적인 사고를 하라는 뜻이었다. 이 한마디는 항상 자신만을 탓했던 나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었고 나의 학문하는 자세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의식의 전환이랄까, 그 후로 나는 학문을 하는 데 있어서 장애가 되었던 수동적 자세에서 열정과 패기가 넘치는 적극적인 자세를 갖춘 대학생으로 변해갔다. 그때부터 학교생활은 너무 재미있어졌고 잠자는 게 아까울 정도로 할 일이 많아졌다. 나의 심신은 가볍고 평안해졌으며 학업에 대한 열정은 모든 것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일 것만 같았다. ‘아! 일상생활뿐만 아니라 공부도 상제님의 임의에 맡기고 성경신을 다하다 보면 이룰 수 있겠구나!’ 라는 자신감을 느끼게 되었다. 이젠 나의 머리도 손오공의 머리띠가 벗겨진 것처럼 자유로워졌다. 이제는 채울 일만 생겼다. 무한히 채울 수 있을 것 같다.
그 후로 나는 대순진리회 수도인이 지켜야 할 가장 소중한 양심이 무엇인가를 확실히 인식하게 되었다. 『대순지침』에 “ … 나의 심기를 바르게 하고, 나의 의리를 세우고, 나의 심령을 구하여, 상제님의 임의에 맡겨라 ….”01는 말씀처럼 우리 도문소자의 일상생활은 항상 상제님과 함께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도장에 있으면서 소홀히 했던 수련 기도가 우리 수도인들에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또 우리는 상제님 주재 하의 인간이고 우리의 가장 큰 스승이 상제님이심을! 그리고 대순진리회는 모든 일이 신명과 함께 소통하지 않으면 한계에 부딪힌다는 것을!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이처럼 일상생활 속에서 수도인의 양심을 실천할 때 우리는 모든 두려움이 사라지고 누구 앞에서도 당당하며 떳떳한 일꾼이 될 수 있다. 그동안 내면의 양심만 찾고 대순진리회 수도인으로서의 양심을 소홀히 했던 나를 일깨워준 대학생활이 지금도 수도생활에 큰 힘이 되고 있다.
<대순회보> 17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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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幸於此世 有無量之大道 正吾之心氣 立吾之義理 求吾之心靈 任上帝之任意 洋洋上帝在上 浩浩道主奉命 明明度數無私至公 引導乎 無量極樂五萬年 淸華之世.”<83.5.23> (『대순지침』, p.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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